• 동아일보 22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란에 강규형 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쓴 '비겁한 침묵'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세기 역사에서 실험된 기존의 진보 노선이 경제 사회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못해 결국 실패로 끝났다.” 1월에 출범한 ‘좋은 정책 포럼’의 일성(一聲)이다. 이 포럼은 기존 진보의 파산을 인정하고 대안으로서 ‘지속 가능한 진보’ 노선을 정립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한국정치의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는 김영춘 의원. 그를 언론에서 접할 때마다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 리더로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김 의원도 지난달 말 “대외경쟁력 제고에 대한 비전,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개선시킬 해답을 제시하지 않으면 열린우리당은 좌파 논리에 경도된 시대착오적 수구정당으로 낙인 찍혀 재집권의 길은 요원하다”고 발언했다. 또 개혁세력은 “새로운 성장 동력, 성장과 규제, 복지모델, 기업과 노조, 북한의 개혁 개방과 주민 인권 문제 등 구체적 각론에는 약하거나 비겁했다”고 개탄했다.

    이렇게 기존 진보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진보에 대한 모색을 세간에서는 한국적 ‘뉴레프트’ 또는 ‘제3의 길’의 태동이라 명명하고 있다. 편의상 이러한 흐름을 뉴레프트라고 하자. 이것은 기존 우파의 한계를 벗어나 경쟁력 있는 보수이념을 정립하려는 뉴라이트의 노력과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이런 상황은 두 집단이 선의의 경쟁을 통해 지금까지의 보수-진보의 상호 불신을 뛰어넘어 대화의 통로와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높이기도 한다.

    진보진영의 일각에서는 이렇듯 수구 좌파적 행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노력은 단발적인 문제 제기에 머무르고 있고 결집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뉴레프트가 갈 길은 멀다. 아직 우리 사회 저변에는 기존 도그마에 집착하는 수구좌파가 개명된 진보보다 훨씬 더 많다. 진보라는 단어가 주는 긍정적인 어감에 매료돼 20세기형 퇴보하는 진보의 구호를 생각 없이 추종하는 겉멋 들린 오렌지 진보 근성도 꽤 남아 있다.

    그러나 세계화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고, 국제협력을 경시하고, 건강한 경쟁을 부정하고, 불법적 파업과 폭력을 신봉하고, 절차적 정당성을 독선적으로 무시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파괴적 진보에 대해 뉴레프트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인권, 한미동맹, 북한 핵 개발 문제, 8·15통일축전, 전교조 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포스코건설 사태, 대추리 사태…. 수없이 많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새로운 진보를 표방하는 그룹이나 개인에게서 명확한 입장 표명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또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조국통일을 앞당긴다’ ‘침략적 한미동맹 해체하라’ ‘북한의 선군정치 덕에 전쟁이 안 난다’라는 등 구(舊)진보의 파멸적 주장과 행동에 대해 별 대응 없이 방관자의 입장을 취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8월 중순에 통일연대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같은 이른바 진보단체들이 대학 당국의 명백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연세대에서 8·15통일축전을 불법적으로 강행했다. 허락 없이 남의 시설물에 들어가 행사를 한 것은 건조물침입죄에 해당된다. 집회에서 온갖 시대착오적인 구호가 난무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 진보진영은 한마디 쓴소리 없이 방관 내지는 방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뉴라이트권에서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것과 비교되는 한심한 모습이다.

    구진보의 파산을 선언하고 지속 가능한 대안을 찾으려는 방향은 맞다.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해 가는데 펜티엄급이 아닌 386급 문제의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진보의 비극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이제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잘못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대안이고 뭐고 나올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에서 개명된 진보의 싹이 트기는 어렵고, 그 결과는 진보의 총체적 파산이 될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