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민주주의는 피를 더 흘리지 않아도 되나? 
      
    시민들이 왕의 목을 친 것은 그 434년 뒤였다. 암살이나 쿠데타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주고 받자는 약속을 하고 이게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마그나 카르타 반포 473년 뒤였다.

    趙甲濟  
     
     
     프랑스의 루이 14세 등 유럽 대륙에서 절대왕조가 강화되던 17세기, 영국에선 절대왕조를 깨는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영국의 황금시대를 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1603년에 죽자 영국인들은 스콧랜드 왕(王)을 초빙, 영국왕 제임스 1세로 세웠다. 그는 스콧랜드 왕으로 있을 때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관한 책을 쓴 이였다. "참다운 군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므로 하나님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신념을 가진 이였다. 자연히 그는 귀족-주로 지주(地主)-으로 구성된 의회(議會)와 자주 충돌하였다. 제임세 1세가 죽은 뒤 즉위한 아들 찰스 1세도 의회를 무시하려 하였다. 1628년 의회는 '권리 청원(請願)'을 채택, 왕(王)의 독재에 항의하였다.
     
      이때 중요한 인물이 역사에 등장한다. 올리버 크롬웰은 향신(鄕紳), 즉 지방유지(有志) 출신이었다. 농사를 짓던 그는 캠브리지 대학을 중퇴한 뒤 런던에서 법률학교를 졸업하였다. 1628년 국회의원으로 뽑혔다. 다음 해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 독재를 시작하였다. 크롬웰은 청교도였고, 키가 컸으며, 날카로운 눈매에, 목소리가 우렁찼다. 말은 논리정연하여 의회 지도자로 주목을 받았다.
     
      1642년 의회(議會)와 왕(王)은 드디어 내전(內戰)을 시작한다. 양쪽이 군대를 가졌다. 의회군에 가담한 크롬웰은 기병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가 조직한 기병대는 철기병(鐵騎兵)(Ironsides)으로 불렸다. 이 부대는 군율(軍律)이 엄하였다. 보초를 서던 중 잠을 자다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졌다. 무기를 버려도 죽음이었다. 비무장 시민을 약탈하면 엄벌에 처했다. 그 대신 부대원들끼리는 민주적 토론이 이뤄졌다. 모두가 청교도였으므로 왜 싸우느냐에 대한 자각(自覺)이 확고하였다. 말하자면 이념형 군대였다. 찬송가를 군가(軍歌)처럼 부르면서 적진(敵陣)에 돌입하였다.
     
      크롬웰은 왕군(王軍)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두 번 거뒀다. 1645년 6월14일 네즈비 전투에서 크롬웰 군대는 왕군(王軍)을 무찌르고 포로를 5,000명이나 잡았다. 찰스 1세는 고향인 스콧랜드로 도망갔다. 스콧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그의 신병을 잉글랜드 의회에 넘겼다. 1647년 찰스 1세는 다시 도망을 가서 군대를 조직, 내전(內戰)이 재연(再演)되었다. 의회군은 또 다시 승리, 찰스 1세를 붙들었다.
     
      의회의 지도자 크롬웰은 왕을 135명으로 구성된 재판부에 넘겼다. 재판부는 의원, 군인, 법률가들이었다. 전제(專制)와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된 찰스 왕은 1649년 1월30일 화이트홀 궁전 앞에 만들어진 처형대에서 집행인이 휘두른 도끼로 목이 날아갔다.
     
      의회는 그해 5월 왕정(王政)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크롬웰은 왕(王)이 되라는 간청을 거부하였다. 王이 암살되거나 폐위(廢位)되는 경우는 있어도 정식 재판을 거쳐 사형(死刑)이 집행된 경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절대왕조가 전성기를 맞고 있을 때였으므로 찰스 1세의 처형은 큰 충격을 주었다. 150년 뒤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 때 루이 16세 부부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데, 영국 청교도 혁명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크롬웰은 호민관(護民官)이란 이름으로 10년간 독재를 하였다. 의회(議會)는 분열되었으나 군대가 그를 지지하였다. 이 기간 크롬웰은 구교(舊敎)세력인 아일란드를 점령하고, 해양강국으로 떠오르던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여 이겼다.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을 민중혁명이 아닌 부르조아지 혁명으로 생각하였다. 농민보다는 지주(地主)와 상공업자를 중시(重視)하였다. 그는 "나라가 병이 들었을 때는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자(富者) 손에서 고생하는 편이 낫다"는 말도 했다. 보통선거권과 자유 평등을 주장하는, 몰락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수평파(水平派) 조직을 무력(武力)으로 억눌렀다.
     
      1658년 크롬웰은 말라리아에 걸려 급사(急死)하였다. 나이 59세였다. 아들이 호민관(護民官) 자리를 승계하였으나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의회(議會)의 결정으로 왕조(王朝) 회복이 이뤄졌다.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다시 영국의 왕(王)으로 추대되었다.
     
      찰스 2세가 맨첨 한 일은 크롬웰에 대한 복수였다. 일종의 국립묘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던 크롬웰의 시신(屍身)을 꺼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처형된 날인 1월30일에 크롬웰의 머리를 잘라내 창에 꽂아 웨스트민스터 홀의 바깥에 세워 두게 하였다. 크롬웰의 머리는 그 뒤 24년간 걸려 있었다. 1685년 이후 크롬웰 머리는 여러 사람 손을 거치고 경매에 붙여지기도 하였다. 머리가 캠브리지에 있는 시드니 서섹스 대학(캠브리지 대학의 일원. 청교도가 세운 학교. 크롬웰이 다닌 적이 있다) 교회에 묻힌 것은 부관참시(剖棺斬屍) 400년 뒤인 1960년이었다.
     
      찰스 2세가 크롬웰의 시신(屍身)을 훼손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왕권(王權) 약화의 대세(大勢)는 막을 수 없었다.
     
      찰스 2세가 죽은 뒤 왕위(王位)를 계승한 제임스 2세는 가톨릭 교도였다. 그는 성공회를 탄압하고 가톨릭 세력을 부활시키려 하였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신교(新敎) 세력과 의회(議會)는 쿠데타를 꾸민다. 네덜란드 지도자이던 오렌지 가문(家門)의 윌리엄 공(公)은 제임스 2세의 딸인 매리의 남편이었다. 부부는 신교도였다. 윌리엄 공(公)은 프랑스의 루이14세에 대항하여 네덜란드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영국 왕(王) 자리에 앉게 되면 대(對) 프랑스 연합전선을 꾸미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영국 의회(議會)는 윌리엄 공(公)이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 제임스 2세를 추방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윌리엄 공(公)이 이끄는 1만5,000명의 네덜란드 군(軍)은 영국에 상륙했다. 영국군의 신교도 장교들은 침공군과 맞서 싸우기는커녕 탈영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왕 제임스 2세는 세(勢)가 불리함을 깨닫고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영국 의회는 윌리엄 공(公)과 매리에게 의회가 결의한 '권리 선언'을 받아주면 왕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제의한다. '권리 선언'의 핵심은, 의회(議會)의 동의(同意) 없이는 왕이 과세(課稅)나 법률의 변경을 하지 못한다는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1689년 '권리 장전'이란 이름으로 공포된다. 왕이 주권(主權)을 의회에 넘긴 것이다. 영국은 지금도 국민주권(主權國)이 아니라 의회주권국(主權國)이다. 이렇게 하여 윌리엄 3세-메리 2세 공동 왕(王)이 등장하였다. 1688년에 이뤄진 이 쿠데타를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무혈(無血) 혁명이란 의미이다. 1642~1688년 사이 46년간 벌어진 내전(內戰), 왕(王)의 처형, 왕정(王政) 복구, 크롬웰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감안한다면 무혈(無血)이란 표현이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영국은 유럽에서 맨 처음으로 국민들이 왕(王)의 목을 친 나라이다. '전쟁 없이는 국민국가가 없고, 혁명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말대로 국민이 王의 목을 친 혁명을 맨 처음 치른 것이 영국이었다. 프랑스는 그 150년 뒤, 독일은 270년 뒤 왕의 목을 치거나, 왕을 추방하였다.
     
      한국에선 1960년 4월에 국민들이 권력자를 민중봉기로 몰아내는 기록을 세웠다. 영국인들이 17세기에 한 일을 310년 뒤에 한 것이다. 북한은 아직도 왕(王)의 목을 치지 못하고 있다.
     
      비록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지만 크롬웰의 역사적 기여에 대한 평가는 파묻을 수 없었다. 토마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크롬웰을 영국 최고(最高)의 영웅으로 평가하였다. 미카엘 H. 하트라는 사람이 만든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0대 인물 랭킹'엔 크롬웰이 41등에 올랐다. 국민의 이름으로 왕(王)의 목을 친 사건은 절대왕조의 조종(弔鐘)이 되었다. 이는 의회(議會)와 국민의 권리를 강화해가는, 인류의 민주주의 대장정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영국 민주주의 발전의 시발점은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제정이다. 귀족, 교회, 도시민들이 존 왕을 압박하여 받아낸 여러 가지 약속이다. 시민들이 왕의 목을 친 것은 그 434년 뒤였다. 암살이나 쿠데타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주고 받자는 약속을 하고 이게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마그나 카르타 반포 473년 뒤였다(1688년의 명예혁명). 이런 과정을 볼 때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가 앞으로 쿠데타도 혁명도 내전(內戰)도 없이 순탄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희망임을 알 수 있다. 북한노동당의 대한민국 전복공작과 민노당 같은 종북(從北)세력의 준동이 결합되어도 이를 방치한다면 한국은 피를 더 흘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