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링컨 때의 워싱턴과 朴槿惠 때의 서울

    하버드 대학 도날드(David Harold Donald) 명예교수의 <링컨 전기> 제2권 가운데
    25에서 38페이지 발췌 (번역 남신우) 소개.

    이동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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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컨의 생각으로는 戰時에 시민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는 것은
    '국가의 차원을 초월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편법'이었다. 
       
    1950년 공산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이가 열 살이었던 사람의 2016년 나이는 76세다.
    보통 사람의 지능은 열 살 이후에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은 보통 평생 동안 간직한다고 한다.
    통계청의 인구통계에 의하면 ‘6.25 전쟁’ 발발 때 열 살이었던 76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45만명이다. 이들 가운데는 작금 대한민국 정국의 혼란상을 보면서 6.25 전야(前夜)의 대한민국을 연상(聯想)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특정한 사회 현상이 비단 한 나라에서만 국한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아니면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의 중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반복하여 일어났고
    심지어는 현대에 와서도 전개되는 것을 보는 경우가 또한 적지 않다.

    1776년에 독립하여 금년으로 만 24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미국은
    1861년부터 4년간 ‘남북전쟁’(Amercian Civil War)이라고 하는 대규모의 내전(內戰)을 겪는
    엄청난 몸살을 앓았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에 관한 미국 역사의 기록을 보면
    ‘남북전쟁’ 개전(開戰) 전야에 혼란을 극했던 미국 정국(政局)의 상황이 어떤 면에서는
    ‘6.25전쟁’ 발발 직전의, 아니면 그보다도 작금의, 대한민국 정국이 보여주고 있는 극심한 혼란상과 놀라울 정도로 방불(彷佛)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 면에서 당시 미국의 정국 상황을 한 번 복습(復習)해 보는 것이
    대한민국이 지금 처해 있는 난국(難局)을 극복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1860년은 미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의 해였다.
    이해 11월6일 링컨(Abraham Lincoln), 브레켄리지(John C. Breckenridge), 벨(John Bell) 및 더글라스(Stephen A, Douglas) 사이에 4파전(派戰)으로 실시된 대통령선거의 승자(勝者)는 링컨이었다. 이미 선거 때부터 북부 27개 주와 남부 11개 주 사이에는 노예 해방 문제를 놓고 국가분단의 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서 1860년의 선거에서 링컨은 남부 10개 주에서는 단 1명의 ‘선거인’도 확보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1860년12월에서 다음 해 1월에 걸쳐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한 남 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미시시피, 앨래배마, 조지아, 루이지아나, 텍사스 등 7개 주(버지니아, 아칸소, 북 캐롤라이나, 테네씨 등 4개 주는 후에 합류)로 구성된 ‘남부연합’(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또는 The Confederacy)은 링컨 대통령이 1861년3월4일 취임하기가 무섭게 4월12일 남 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고립된 북군(北軍) 기지 섬터(Sumter) 요새(要塞)를 포격전으로 점거함으로써 ‘남북전쟁’의 전단(戰端)을 열었다.

    그러나, ‘남북분단’과 ‘남북전쟁’ 발발 전야의 미국은 4분5열된 정치세력과 분열된 여론으로
    인하여 문자 그대로 ‘콩가루 집’이었다. 미합중국에 잔류한 27개 주의 정가(政街)와 언론계 및
    학계는 ‘노예해방’, 남부의 ‘분리독립’ 및 ‘남북전쟁’을 둘러싼 찬반론 등이 난마(亂麻)처럼 엉켜서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난장(亂場)판이었다.

    링컨이 선장(船長)으로 키를 잡은 미합중국의 수도 워싱턴은 비단 남과 북을 각기 지지하는 세력뿐 아니라 링컨이 말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아니다”라고 벌떼처럼 덤벼드는 다양한 비판 세력이 혼거(混居)하는 가운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격랑(激浪)에 흔들리고 있었다.
    링컨은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여당인 공화당 안에서도 사고무친(四顧無親)인 경우가 허다했다.

    미국판 ‘종북(從北)’ 현상의 풍미(風靡)도 없지 않았다. 워싱턴과 링컨의 주변에는
    ‘남북분단’이 현실화되고 ‘남북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미합중국보다는 ‘남부연합’의 이익을
    앞세우는 인맥(人脈)이 정부와 여•야를 막론하고 워싱턴 정가과 언론에 광범위하게 포진(布陣)하여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남부의 편에 서서 북부를 해코지하고 친 형제들이 남북으로 갈라서서
    전쟁에 참전하여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었다.

    링컨은 그만의 특유한 방식으로 이 격랑을 위태위태하게 헤쳐 나갔다.
    그는 소년기의 필자가 고지식하게 믿었던 것처럼 민주주의 방식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위대한 설득력으로 반대파나 비판세력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문제 해결 방식으로 설득력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그는 불가피하게 필요할 때는 “영장 없는 구금”을 위하여, 명백하게 위헌 조치인,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집행 정지”도 걸핏하면 단행했고 언론 폐간도 서슴치 않았다.
    1862년의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도 위헌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극단 조치에 대한 물의(物議)가 일어날 때마다 링컨은 뚝심으로 이를 헤쳐 나갔다. 그는 “그런 헌법 조항이 있는 줄 몰랐다”고 억지를 쓰면서 “대통령의 전시 비상조치권” 이론을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링컨의 미국에는 가령 ‘6.25전쟁’ 개전 직전이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는 볼 수 없는 다른 정치문화가 있었다. 그것은 그처럼 사사건건 링컨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물고
    늘어지는 가운데도 정계, 특히 야당의 주류(主流)와 언론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에 관한 한
    정쟁(政爭)을 멈추고 링컨의 선택을 지지해 준 것이다.

    특히 1861년 링컨 대통령이 남군 배후에 고립된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선공(先攻)을 계기로 ‘남북전쟁’ 수행을 위하여 7만5천명의 “시민병 동원”을 결심했을 때,
    그 동안 사사건건 링컨과 정치적으로 대립해 왔고 한 해 전의 대통령선거에서 링컨에게 패배했던 민주당 지도자 더글라스(Stephen Douglas) 상원의원이 보여준 태도는 그 대표적 사례였지만
    그 뒤 장기적인 소모전(消耗戰)으로 변질된 전쟁에서 쉴 사이 없이 발생하는 병력 소모를 보충하기 위하여 링컨이 여러 차례 수십만명 씩 신병을 징집할 때 의회의 여야 의원들은 매번 링컨의
    이 조치를 예외 없이 승인해 준 것도 같은 의미에서 평가될 일이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권, 그 가운데 특히 야당 인사들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관심 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어 드리기 위하여 재미 건축공학자로 그 동안 여러 해 동안
    모국(母國)의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북한 민주화 투쟁에 헌신적으로 동참하면서 링컨 전기(傳記)를 깊이 연구해 온 남신욱 박사가 번역하여 2003년 살림출판사를 통하여 1.2권으로 간행한
    하바드 대학 도날드(David Harold Donald) 명예교수의 <링컨 전기> 제2권 가운데
    25에서 38페이지까지를 발췌하여 여기에 싣는다.
    관심 있는 독자들이 이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오늘의 국난(國難)을 극복하는 지혜를 취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소망(所望)이다. [李東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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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컨 때의 워싱턴과 朴槿惠 때의 서울

    남신우 번역

    섬터 요새가 항복한 다음 날인 4월15일 링컨은 미국 남부의 7개 주에서 “법 집행이 불가능”해졌으므로 “이 집단을 진압하고 법을 정상적으로 집행하기 위하여” 연방 각주에서 “7만5천명의 ‘시민병’을 동원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긴급 국회를 7월4일 소집하겠다고 선언했다.
    링컨의 선언문을 전 국민이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여당인 공화당뿐 아니라 야당인 민주당 당원들도 모두 대통령의 조치를 지지하고 나섰다.
    4월14일 링컨은 비밀리에 야당인 민주당 지도자 더글라스를 2시간 동안 만나서
    그가 다음 날 발표할 예정인 선언문 내용을 미리 보여주었다.
    더글라스 상원의원은 이제까지 그가 사사건건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해 온 것을 접어놓고
    이번 링컨의 선언문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전국 신문들에게 보냈다.
    이 성명서에서 더글라스는 “본인은 현 정부의 모든 정책에 아직도 기본적으로 반대하지만,
    이번에 대통령이 연방 존속과 아울러 정부를 유지하고 연방 수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헌법에 규정된 모든 대통령의 업무를 집행하는 것을 전적으로 도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며칠 후 일리노이 주로 돌아가서 “평화로의 첩경은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최대 규모로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통령을 지지하라고
    서부 민주당 당원들을 설득하는 노력을 헌신적으로 전개했다.

    대통령 선언문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시민군’ 동원 수자가 너무 소규모라는 것이었다. 더글라스는 링컨에게 “20만명을 동원하라”고 건의했고 브라우닝(Orville Hickman Browning)은 “30만명은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7만5천명이라는 수자는 연방 잔류와 ‘남부연합’ 합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남부연합’에 동조하는 북부 소재 주들의 향배(向背)에 신경을 쓴 링컨이 스캇(Winfield Scot) 장군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이들은 만약 미합중국이 거대한 병력을 소집하면 링컨이 이 병력을 가지고 남부를 침략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링컨은 한꺼번에 수십만명의 병력을 동원할 경우 미합중국에는 당장 그들을 무장시키고, 먹이고 운송할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링컨은 ‘시민군’ 복무기간도 90일로 한정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전쟁이 단시일 내에 끝나리라고 예상해서가 아니라 1795년에 제정된 관련 법규가 ‘시민군’의 경우 국회 소집 이후 30일 이상 복무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회가 7월4일 개회하니까 이 법에 의하여 이번에 소집되는 ‘시민군’의 복무기간은 8월4일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만약 국회가 7월4일 이전에 개회한다면 이들의 복무기간은 그보다도 더 앞당겨서 종료되어야 할 판이었다.

    링컨의 선언문이 발표되자 해당된 여러 주들은 각기 활당된 규모의 ‘시민군’ 모집을 서둘렀다.
    이들은 활당된 병력을 동원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젊은 청년들 수천명이 몰려와서 입영을
    지원했고 뉴 햄프셔 주 내슈아의 레니위크 디커슨 같은 사람은 대통령에게 “결혼 생활 17년의 나에게 자식이라고는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이 아들이 벌써 장성해서 연방의 존속을 위하여 이미 입영을 지원했다”면서 “산악지대 뉴 햄프셔 주에는 건장하고 용맹한 청년들밖에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왔다.
    지원자들 모두가 “전쟁터에서 우리와 싸우게 될 반란군들이 가엾다”고 호언(豪言)했으며
    나이 어린 한 지원병은 자기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저의 애국충정은 하늘을 찌른다”면서
    “우리에게는 모두 영광스러운 두 가지 길밖에 없는데, 하나는 자유의 제전에 죽음으로 순절(殉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의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영광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남는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미합중국에 잔류해 있던 남부 주에서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북 캐롤라이나 주의 존 엘리스(John Ellis) 지사는 “우리 주에서는 군대를 보낼 수 없다”는 내용을 링컨에게 통고했다. 버지니아, 테네시 및 아칸소 주에서도 비슷한 통고를 링컨에게 한 뒤 모두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했다. 그들은 즉각 ‘남부연합’에 가입했고 이에 따라 ‘남부연합’은 버지니아의 주 수도 리치몬드를 연합의 수도로 결정했다.
    접경 주들에서도 링컨의 선언문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켄터키는 “자매(姉妹) 주들을 진압하는 전쟁에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통보했고 미주리도
    링컨의 ‘시민군’ 소집 명령이 “불법적이고 위헌적인 잔악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델라웨어는 “‘시민군’의 지원을 막지는 않는다”는 정도의 미적지근한 입장을 결정했다.

    이들 접경 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주가 메릴랜드였다.
    메릴랜드는 지리적으로 수도 워싱턴을 둘러싸고 있었고 워싱턴을 포함한 ‘콜럼비아 독립행정구’로 연결되는 모든 철도선이 통과하고 있었다.

    토머스 힉스(Thomas Holliday Hicks) 주 지사와 조지 브라운(George William Brown) 볼티모어 시장은 4월18일 “이곳 민심은 폭발 직전의 상태로 민감하다”면서 링컨이 소집하는 ‘시민군’이
    “메릴랜드를 통과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알려 왔다.
    그 다음 날, 아니나 다를까, 볼티모어를 경유하던 ‘매사추세츠 6연대’가 남부 독립 지지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시민군’과 민간인 몇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힉스 주 지사가 친 북부 성향이면서도 이탈 세력의 눈치를 몹시 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링컨은 그에게 “앞으로는 ‘시민군’이 볼티모어 시를 관통하지 않고 시를 우회하여 진군하도록 조치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이번에 우리가 이렇게 양보하면 그 다음 당신들은 이제는 한 술 더 떠서 볼티모어를 우회하는 것도 불허하는 것은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는데
    과연 힉수 주 지사는 링컨 대통령에게 “어느 주의 ‘시민군’도 메릴랜드 주 안으로 들어 와서는
    안 된다”면서 “주미 영국대사에게 이 문제의 중재를 맡기자”는 엉뚱한 제안을 하여
    링컨의 화를 돋우기도 했다.

    “당신들은 나더러 내가 한 약속을 저버리고 싸움 한 번 하지 않은 채 정부를 적들에게 넘겨주라는 말이요?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고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거요! 명예를 중시하는 남자라면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메릴랜드 주 대표단에게 “수도 워싱턴을 방위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고 군대가 수도에 들어오려면 메릴랜드 주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려 애썼다.
    “우리 군대가 두더지도 아닌데 땅굴을 파고 오라는 말이요, 아니면 새가 되어서 날아서 들어오라는 말이요?” 링컨은 대표단에게 “자, 다들 돌아가서 메릴랜드 주민들에게 그들이 우리 군인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하라”면서
    “그러나, 만일 우리 군대가 다시 공격을 당하면 그때는 우리도 사정없이 반격할 것이라고 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링컨의 이 같은 협박은 공포(空砲)였다.
    링컨에게는 볼티모어를 공격할 군대는커녕 수도 워싱턴을 방위할 병력조차 없었다.
    섬터 요새가 공격을 당한 뒤 워싱턴은 사실상 군사적으로는 텅텅 빈 도시였다.
    육•해•공군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친 ‘남부연합’ 관리들과 장교들이 썰물처럼 수도에서 빠져 나갔고,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 인물이 리(Robert E. Lee) 장군이었다.
    그는 미합중국군 지휘권을 버리고 자기는 버지니아 주 사람이라는 이유로 수도를 버리고 떠나서 남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겉으로나마 수도를 방어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 장군은 권총 세 자루를 차고 ‘아칸소 이쑤시개’라는 별명의 대검(帶劍)을 차고 다니면서 소위 ‘클레이 방어군’을 조직했다. 캔사스 주 상원의원 당선자 제임스 H. 레인(James H. Rain)도 캔사스에서 취직을 하기 위해 상경(上京)한 사람들을 모아서 ‘개척자 방위군’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백악관(白堊館) 동실(東室)에 진(陣)을 쳤다.

    워싱턴 시는 1주일 동안 사실상 포위된 상태로 지내야 했다.
    메릴랜드 폭도들은 볼티모어 시와 다른 북부 도시들을 연결하는 철교를 끊어 버렸고 전신도 단절시켰다. 버지니아 북쪽으로부터 ‘남부연합’군이 워싱턴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끊일 사이 없이 떠돌았고 수도에 살고 있는 수천명의 친 ‘남부연합’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링컨은 백악관 안에서 서성대면서 지원군이 도착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포토맥 강 쪽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일과였다.
    “왜 안 오지? 왜 안 오는 거야?”라는 말이 항상 그의 입에 붙어 있었다.
    날마다 “뉴욕 7연대가 도착한다,” “로드 아일랜드 연대가 도착한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지원군은 모습을 들어 내지 않았다. 대통령은 너무나 속이 상한 나머지 부상당한 매사추세츠
    6연대 병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북군이 정말 있는지 믿을 수가 없네. 7연대라는 것은
    신화(神話) 속의 군대 이야기고 로드 아일랜드도 지도에서 없어진 것 같군, 눈에 보이는 자네들만이 유일한 북군인 듯 하구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4월25일 뉴욕 7연대가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버틀러(Benjamin E. Butler) 장군이 머리를 써서 볼티모어를 우회하여 군인들을 배에 싣고
    체사피크 만을 타고 애나폴리스로 가서 거기서부터는 기차로 병력을 워싱턴으로 수송한 것이다. 이후 며칠 동안 군사들은 수천명씩 속속 수도로 입성했다.

     4월26일경 메릴랜드 주 의회가 프레데릭 시에서 회의를 열고 “합중국 이탈을 결의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스캇 장군이 ‘이탈파’ 주 의원들을 모조리 체포하려 했지만 링컨은 이를 중지시키면서 “주 의회가 만약 정말 합중국 이탈을 결의하면 때는 메릴랜드 주요 도시들을 포격하고 ‘인신보호법’을 폐기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내놓았다. 메릴랜드 주 의회가 “합중국 이탈”을 결의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버틀러 장군은 만약에 대비한 조치로 5월23일 그의 군대로 볼티모어 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페데랄 힐에 진지를 구축했다.

    링컨은 실제로 4월27일 워싱턴과 필라델피아를 연결하는 축선(軸線) 상의 지역에서
    ‘인권보호법 ’ 시행을 유보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군사책임자들은 ‘남부연합’을 지지한다고 의심되는 자들이나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의심의 대상이 되는 자들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게 되었다.
    용의자들을 기소나 재판 없이 무기한 구금할 수 있게 되었고 판사가 ‘인권보호법’에 의거하여
    용의자의 신병인도를 요구해도 체포담당관이 이에 불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대통령의 조치는 전쟁 초기 어수선할 때 한 동안은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메릴랜드 주 콕스빌에서 반란군 훈련을 실시한 존 메리맨이라는 자가 체포된 것을 계기로
    아연 정치문제가 되었다. 체포된 메리맨은 볼티모어 만(灣)에 있는 매킨리 요새에 감금되었는데 그는 터니 대법원장으로부터 ‘인권보호 영장’을 발급 받았다. 터니는 메리맨을 정식 재판에 넘기든지 아니면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링컨 대통령의 명령으로 메리맨을 체포했던 장교가 터니의 영장 수령을 거부하자
    터니는 “행정부 최고 수반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이 “대통령의 전시 특권법 내용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면서 터니 대법관의 판결을 아예 무시해 버렸다.

    링컨은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5월3일 그는 추가 지원군 소집을 공표하면서 이번에는 이들의 복무 기간을 3년으로 연장했다.
    그는 국회의 동의도 기다리지 않고 합중국 육군에 보병 8개 연대, 기병 1개 연대, 포병 1개 연대를 증편(增編)했고 해군 수병 18,000명을 모집했다.
    그해 4월19일에는 ‘남부연합’ 가담 7개 주의 해안봉쇄(海岸封鎖)를 명령했고
    뒤에 북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주가 추가로 ‘남부연합’에 합류하자 이들 두 주의 해안도 역시
    봉쇄했다. 그리고 역시 의회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의 해군 기지창에 5척의 증기선(蒸氣船)을 추가로 구매하여 해상교통의 안전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전쟁으로 교통이 두절되는 데 대비하여 모건(E.D. Morgan) 뉴욕 주지사와 캬메론(Simon Cameron) 국방장관의 추천에 따라 캬메론의 측근 인물인 커밍스(Alexander Cummings)에게 정부를 대신하여 군대와 물자를 수송하는 일을 위탁했다.

    링컨은 확신을 가지고 ‘남북전쟁’은 “2개의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이 전쟁의 성격을 “2개의 국가 간의 전쟁”으로 수용하면 연방의 영구성을 부정하고 연방 이탈에 합법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이런 식의 해석은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후 4년간 링컨은 남부 11개 주의 사람들에 대하여 ‘반란세력’이라는 호칭을 고수하면서
    “이 반란집단은 정상적인 법 집행을 통하여 진압하기에 지나치게 강력하기 때문에 ‘전쟁’의 방법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허구적 법률 해석을 완강하게 고수했다.

    그는 때로는 ‘내전’(內戰•Civil War)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통상적으로는 ‘반란’(叛亂•Rebellion)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임기 중 메시지나 연설문에서 그는 ‘반란’이라는 용어를 400회 이상 사용했다.
    그는 남부 주들이 연방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남부연합’의 ‘존재’를 단 한 번도 인정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남부를 가리켜 ‘연합’이라고 호칭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부닥칠 때는 반드시 ‘남부연합’이라는 호칭 앞에 ‘이른바’라는 접두 형용사를 붙여서 호칭했다.

    사실은 ‘남북전쟁’의 성격이 “나라 안의 반란세력이 정부에 반기(叛旗)를 든 것에 불과”하다는
    링컨의 주장은 다른 면에서 그가 취한 행동과는 배치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컨대, 그가 남부에 대하여 ‘해안 봉쇄’(Blockade)를 단행한 것도 유사한 경우였다.
    ‘해안 봉쇄’라는 것은 교전(交戰) 중의 국가들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반란세력’에 대해서는 당연히 ‘폐쇄’(Closure)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았다. 이에 대하여 펜실베니아 공화당 지도자 스티븐스(Thaddeus Stevens)는 “링컨의 ‘해안봉쇄’는 우리나라를 우리 스스로가 ‘봉쇄’했다는 것이니 실수일 정도가 아니라 주책”이라고 비판했지만 링컨은 이에 대해 “나는 국제법에 의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몰랐고 그렇게 말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았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스티븐스가 “무슨 소리냐. 당신은 법률가가 아니냐”고 따지자 이에 대해서는 “나는 서부의 시골 마을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던 사람으로 국제법 같은 것은 몰랐기 때문에 국제법 관련 부분은 국무장관 수워드(William H. Seward)에게 일임하고 있었다”고 시치미를 떼면서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을 어떻게 하느냐. 그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눙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1861년7월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도 자신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주로 행정부에 속한 기능으로 생각”하며 “입법부나 사법부가 전쟁수행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전시에는 시민의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도 너무 따지면 안 된다는 생각”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국군 총수로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평상시 집행권이 입법부에 속해 있는 사안이라도 국군 총수인 자신이 대신 집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안봉쇄를 실시한다든지, 지원군 복무연한을 3년으로 연장한다든지, 정규 육•해군을 증강한다든지, 무기와 군수물자 구매를 위한 자금을 개인으로부터 빌린다든지 하는 문제들은 비록 국회의 사전 동의가 법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지만
    “전시에는 대통령이 국회의 사전 동의 없이 조치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정부를 수호하기 위하여 행정부는 전시 비상대권을 발동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신보호법’의 집행을 유보시킨 조치는 입법부뿐 아니라 사법부의 권한까지도 건드린 사안이라서 후폭풍(後暴風)이 거셌다. 영장 집행 유보는 국회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입장이었던 터니 대법원장은 메리맨 판결 때 대통령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링컨은 터니 대법원장의 이 같은 분노 폭발에 무대응(無對應)의 대응을 선택했지만
    뒤에 국회에 보낸 메시지를 통하여 “영장 집행 유보권의 행사 주체에 관해서는 헌법에 명문 조항이 없다”면서 “국회가 휴회 중이고 나라가 위급할 때는 행정부 수반이 이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반박하면서 “시민의 자유만을 고집하다가는 이 법 한 가지 이외의 모든 법이 집행되지 못하고 이 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정부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방치해야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링컨은 그 뒤 전쟁 진행 기간 중에 여러 차례 ‘인신보호법’의 집행을 유보시키는 조치를 반복하여 취했는데 1862년9월24일과 1863년9월15일에는 전국적으로 ‘인신보호법’ 집행을 정지시켰다.
    처음에는 국무장관이 정부를 대표하여 시민을 임의로 체포, 구금했는데
    믿을 만한 통계에 의하면, 전쟁 발발 후 9개월 동안에 도합 864명이 재판을 거치지 않고 감옥에 갇혔다. 1862년 집행권이 국방장관에게로 넘어간 뒤에는 이 조치에 의하여 투옥된 사람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링컨의 생각으로는 전시에 시민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는 것은 “국가의 차원을 초월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편법”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