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시대 곧 온다!"는데 무슨 민주화? "종북 뿌리, 부림사건서 찾아야"

  •            [인보길 초대석] 고영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


  • 당시 변론은 부산 지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김광일·문재인 등이 무료로 맡았는데,
    특히 노무현은 고문당한 학생들을 접견하고
    권력의 횡포에 분노하여
    이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이들은
    1983년 12월 전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으며,
    이후 부산 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부산 지역 사상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이 사건은
    2000년대 이후 사법부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어 재심 판결을 받았다...

        - <두산백과 사전> 중에서


    영화 <변호인>이
    개봉 나흘만에 175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영화 속 역사적 배경인
    <부림사건>(釜林事件)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변호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세무 변호사로 부산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노무현 변호사(송강호 분)가 <부림사건>을 접한 뒤로,
    비로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게 됐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부림사건>이란 무엇인가? 

    두산백과 사전을 살펴보면
    "1981년 제5공화국 군사독재 정권이
    집권 초기에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부산 지역 사상 최대의 용공(容共)조작 사건"이라고 명기돼 있다.
    한 마디로 공산주의자가 아닌 멀쩡한 일반인을 공산주의자처럼 만들어서
    범죄사실을 억지로 만들어 낸 [조작 사건]이라는 얘기다.

    두산백과 사전에 따르면,
    1981년 9월 당시 부산 지검 공안부에서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교사·회사원 등을 영장 없이 체포한 뒤,
    짧게는 20일,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으로 감금,
    [물 고문]과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인 고문을 가한 것으로 나와 있다.
    결국 심한 고문에 못이겨 피의자들이
    "이적 표현물을 학습하고 반국가단체를 찬양했다"는
    [거짓 자백]을 했다는 게 <부림사건>의 핵심 요지다.

  • "<부림사건>은 명백한 [공산주의 운동]"

    그렇다면 <부림사건>은
    정말 공안당국이 조작한 [날조된 역사]일까?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고영주 변호사는
    "<부림사건>은 명백한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이 사건이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되고 있는 현실이야말로
    [조작된 역사]"
    라고 꼬집었다.

    <부림사건>이란 명칭은
    부산의 <학림사건>이라는 뜻에서
    나중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원래 [의식화 사건]은 전부 수풀림(林)자를 붙입니다.
    무성한 수풀처럼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죠.
    80년대 초부터 전국 대학가에
    [의식화 학습] 바람이 불기 시작됐습니다.
    이 [의식화 학습]은
    반미좌경(反美左傾) 사상을 배우는 건데요.
    당시 부산에선 <전민학련>과는
    별도로 학생 조직이 결성됐어요.
    전국적인 조직에 안들어가고
    과감히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거죠. 


    편집자 주: 
    광주 5.18 이후 1980년 여름에 <학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학림>은 1981년 여름 검거될 당시에 수사기관이 붙인 이름이다.
    정확한 명칭으로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 쌍둥이 조직이었다.
    현재 뉴데일리의 주필로 독창적인 글을 쓰고 있는
    박성현은 당시 <전민학련>수도권 조직책이었다.

    80년 여름에 <학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상황을 좀 참고할 필요가 있다.

    80년 겨울,
    1960년대 중반 이후 20년 가까이 서울대 학생운동을 지도해 온
    지하 인맥이 검거된 사건이 있었다. 
    이 인맥에 대해 수사기관은 <무림>이란 이름을 붙였다.
    당시 전체 운동 역량의 90%가 서울대였기 때문에
    <무림>은  전체 급진운동 역량의 핵심 인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림>은 80년 봄에 조직 실체가 드러났다.
    그래서 <무림>
    "역량을 보존해야 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80년 광주 이후, 80년 여름부터
    "동면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동면이냐 저항이냐?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전투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기존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던 <무림>에 대해 반발해서
    저항
    을 주장했다.
    이들이 <학림>을 만들었다.

    <학림>은,
    6.25 이후 처음 만들어진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전투적 지하 조직]이었다고
    박성현은 증언하고 있다. 

     
    영화 <변호인>이 다루는 <부림>은,
    <학림>의 부산지역 조직으로서
    그 안에는 [노동자 파트]와 [학생 파트] 양쪽이 모두 존재했다.

    <부림>은,
    박성현과는 전혀 상관없이,
    <전민노련>을 만든 이태복이 직접 구축했다.


  • (서울=연합뉴스) 이태복 전 복지부 장관(가운데) 등이 기자회견을 갖고 학림사건에 대해 서울고법에 재심을 신청한다고 밝히고 있다. 2009.7.7
    ▲ (서울=연합뉴스) 이태복 전 복지부 장관(가운데) 등이 기자회견을 갖고 학림사건에 대해 서울고법에 재심을 신청한다고 밝히고 있다. 2009.7.7


    이태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0 년 가까이 징역을 살고 나와
    DJ 정부에서 보사부 장관을 역임했다.

    박성현은,
    자신이 했던 운동이
    [공산주의의 통일전선 노선]을 따랐다고 생각해서,
    <학림>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않았고,
    민주화운동 보상을 받지도 않았다.

    <학림>의 후신이,
    80년대 최대의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
    (북한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 사건으로 꼽히는 <깃발>(1985년 검거)이다.

    <깃발>에 의해,
    레닌
    책이,
    6.25 이후 처음으로 번역되어 지하 출판되었다.

    <깃발>의 후신이,
    1987년에 검거된 <제헌의회> 그룹이다.

    이 그룹에 의해 마르크스의 책이,
    625 이후 처음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제헌의회> 그룹의 후신은 둘이다.
    하나는 민중당(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등)이며,
    다른 하나는 사노맹(박노해 백태웅 조국 은수미 등)이다.

    한마디로 <학림>은,
    PD(북한과 관계없는 순수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권의 출발점이다.

    PD는,
    90년 경까지는
    [김일성주의](NL = 민족해방노선 = 주체사상파)와
    맹렬한 사상투쟁을 벌였다.

    1980년 출발시기에서 1990년경까지
    PD는,
    북한을 [제대로된 사회주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90년 경까지는, 
    [평양에 대해 비판적/적대적 입장을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PD)와,
    [북한-전체주의를 추종하는 민족해방노선](NL)
    팽팽한 긴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6.25이후 35년 이상 숨죽여 왔던 [구세대 종북] 인사들이
    대거 지상으로 튀어나오면서

    NL이 득세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또한 북한 최고위 간첩 이선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
    천문학적 거액을 뿌리면서 <중부지역당>을 조직하면서
    NL
    이 압도적으로 득세했다.
    예를 들어
    [북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진 양심적 통일운동 지식인]
    으로 알려졌던
    최고급지식인 원로 김낙중은,
    이때 백만달러 이상의 돈과 권총과 난수표를 받아 챙겼다.

    이선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PD 성향 (=당시에는 북한-전체주의에 대해 비판적 성향)을 가졌던
    민중당 핵심 인사를 포섭해서,
    NL과 결합시키는 것
    ]이었다.

    [구세대 종북]의 활성화와 북한의 공작에 의해,
    90년대 초반 이후,
    PDNL에 완전히 굴종하는 상황이 되었다.

    PDNL에 굴종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김정일
    가장 공을 많이 들여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대남공작이다.

    이 굴종은
    사실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망을 뜻한다.
    [김일성-전체주의]
    북한에서는,
    [숙청]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을 개잡듯 잡아 죽였다.
    대한민국에서는,
    거물간첩의 공작과 돈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안락사시켰다.

    90년대 초반 이후에 대한민국에는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진짜 급진 좌파-진짜 빨갱이)
    가 없다.
    이름만 PD일 뿐,
    모두
    [김일성-전체주의] 부역자로 보면 된다.



    고 변호사는
    "12.12 사태와 5.16 군사혁명, 5.18 사태 등을 연달아 겪으면서,
    대학가에 군사정부에 대해 극도로 [염증]을 느끼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면서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이 자연스레
    [공산주의 사상]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부 대학생 사이에선,
    이런게 <자유민주주의>라면,
    <자유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선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이 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체제에선 [공산혁명]으로만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품게 된 거죠.
    아주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에 빠져든 겁니다.
    그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은
    군사정부만 교체할 수 있다면
    <악마>하고도 손을 잡겠다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고 변호사는
    "<학림사건>이나 <부림사건> 등
    각종 [의식화 사건]으로 뿌리내린 [좌경사상]이 결국
    오늘날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종북 세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종북 세력]의 뿌리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못박았다.



  • "공산주의 세상이 오면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할 겁니다"

    고 변호사는
    "자신이 특별히 <부림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워낙 컸기도 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라며
    "당시 피의자에게 [협박]을 당하는 기막힌 경험을 했었다"고 토로했다.

    전 [말석]이어서 제1피의자 조사를 맡게 됐죠.
    이 분을 처음 조사할 때인데요.
    들어와서 자리에 앉자마자 하는 소리가
    "검사님! 아니, 검사님은 역사의 발전 법칙도 모르십니까?"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그때부터 자기 지식을 자랑하는 겁니다.

    피의자 : "검사님은 역사의 발전법칙도 모르십니까?"

    검사 : "그게 무슨 소립니까?"

    피의자 : "역사라는 건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에 의해 발전돼 나가는데요.
    원시공산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봉건사회, 근대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곧 [공산주의 사회]가 됩니다.

    곧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터인데
    역사가 바뀌면 주역도 바뀌는 법이고
    지금은 우리가 검사님한테 조사를 받고 있지만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그땐 저희가 검사님을 심판할 겁니다."


    고 변호사는
    "이는 역사학자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였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유물사관(唯物史觀)을
    마치 자랑삼아 저에 늘어놓은 것"
    이라고 밝혔다.

    대체 이게 피의자가 검사에게 할 소리입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저도 나름의 논리를 갖고,
    이OO씨와 몇차례 입씨름을 했었죠.
    일각에선 공안검사가 강압 수사를 했다고 하는데요.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이OO씨가 천연덕스럽게 이런 얘길
    저에게 꺼내 놓겠습니까?


    고 변호사는
    "당신들 말처럼 역사라는 게 공식처럼 발전하는 것이라면
    공산주의 사회에도 모순이 있을 것 아니냐?
    그러면 그 다음 사회는 무엇이냐?"
    고 되물었더니,
    이씨가 "지금 언어유희하냐? 우리 갖고 장난치지 말라"
    벌컥 화를 냈다고 말했다.

    검사 : "역사라는 게 당신 말처럼 딱딱 공식대로 발전하는 것이라면
    공산주의 사회에도 모순점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다음 사회는 어떤 사회가 도래하는 겁니까?
    "

    피의자 : "아니, 아직 공산주의 사회도 완전히 도래하지 않았는데,
    그 다음 사회를 논하는 건 언어의 유희 아닙니까?
    저희 같고 장난치지 마십시오!
    "

    검사 : "저도 장난칠 생각 없습니다.
    솔직히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살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만약 그때 내가 살아있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당신들의 심판을 받아야겠죠.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자유민주주의 체제입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공안 검사이구요.
    그래서 당신들을 조사하고 기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 변호사는
    "이처럼 <부림사건>은 결코 흔히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며
    "저는 당시 피의자들이 [공산주의 운동]을 벌인 것이라고 누차 얘기해 왔건만,
    이제와서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을 하고 있다"
    고 개탄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몰랐습니다.
    선생님에게 물어봐도,
    아버지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공산주의 사상을 알고 있는 자신들이
    마치 [선각자]가 된 것인냥 착각을 한 거죠.



  • "문재인은 부림사건 변호 맡은 적 없어"


    고 변호사는
    "문재인 변호사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무료 변론]을 했다는 얘기도 거짓"
    이라며
    "당시 문재인 변호사는 변호 업무를 시작하지도 않았었고,
    김광일 변호사 역시 아내 분의 반대로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고 주장했다.

    훗날 문재인 변호사가
    <부림사건> 변호를 맡았었다는 얘기가 널리 퍼졌었죠.
    [저쪽 동네]에서 먼저 불거진 얘기입니다.
    그래서 청와대 인맥이 전부
    [부림사건 인맥]이라는 말까지 나온거구요.
    저도 그런 얘기들이 하도 많이 나오길래 그런 줄 알았죠.
    하지만 문재인 의원은
    그 당시 변호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인단에 참여했었는지도 몰랐어요.
    이 사건은 워낙 규모가 컸기 때문에
    부산지역 대 선배들이 관여했습니다.
    이흥록씨가 당시 대표 변호사였을 거예요.
    저희들은 어차피 법정에서
    이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변호사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었어요.
    그 뒤로
    "노무현과 문재인의 운명적인 첫만남"이라면서
    두 사람이 <부림사건> 변호를 맡았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회자됐어요.


    고 변호사는
    "팩트가 틀린 얘기였지만,
    최근 문재인 의원 스스로
    [자신은 이 사건 변호를 맡은 적이 없다]고
    밝히기 전까지는
    모두가 기정사실로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부풀려진 허구의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알려져,
    수년 동안 문재인 의원을 [미화]하는 미담(美談)으로 활용돼 왔음을 지적했다.

    고 변호사는 최근 <부림사건>을 두고
    고문을 통한 [용공(容共)조작사건]이라고 규탄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과 관련,
    "경찰 조사 단계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공안 검사가
    피의자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일단 [정치사범]이 오면
    [칙사대접]을 하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고 전했다. 

    [물고문] 등 강압적인 방법이 동원됐다는 세간의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한 것.

    나중에
    "수사과정에서 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다"
    "허위자백을 유도했다"
    "용공조작이다"란 말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제가 만난 피의자들은요,
    수사 중엔 누구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얘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어요.
    고문 얘기는
    전부 재판 중에 거론한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모진 고문을 당했던 사람이
    면전에서 검사를 협박하는 게 쉬운 일일까요?

    물론 고문을 당했다는 피의자 측의 주장을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아는 부분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당시엔 시시한 [잡범]들도
    경찰서에 가면 그냥 오는 법이 없었어요.
    일단 조사를 받으면
    한참 얻어맞고 나오는 일들이 많았던 시대였죠.
    다시 말하자면 피의자들이 경찰 조사 때
    한 대도 맞은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검찰 조사 만큼은 확실합니다.
    당시 공안 검사가 피의자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날 수가 있기 때문에
    일단 [정치사범]이 오면 저희는 [칙사대접]을 합니다.
    불행한 환경에서 조사를 한 적은
    단언컨대 단 한차례도 없었습니다.



  • "<부림사건>은 오늘날 [종북세력]의 뿌리"


    고 변호사는
    "당시 <부림사건>을 [용공조작]이라고 한다면
    80년대 후반, 운동권 학생들이 급격히 [좌경화]에 빠진 점과,
    오늘날 종북세력이 자리잡게 된 배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며
    "<부림사건>이 기폭제가 돼 공산주의자들이 생겨났고
    현재까지 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현시대에 [종북세력]으로 나타난 것"
    이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강압수사다" "조작이다" 말이 많죠,
    [공산주의 얘기]는 피의자가 스스로 꺼낸 겁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먼저 유물사관을 언급하며
    공산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언했어요.
    <부림사건> <학림사건>은
    여러 공안 사건 중에서도 제일 강력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 무리 중에서도 의식 수준이
    가장 높았던 사람들이 연루됐기 때문이죠. 


    고 변호사는
    일부 시민단체에서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
    과거 판결을 180도 뒤집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는 일들이
    빈번해진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고 보상 받는 방법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 데요.

    첫째는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재심을 유도,
    대법원 판결 통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는 방법이 있구요.

    둘째는 사법 판결을 거치지 않고,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에서
    자체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
    보상을 이끌어내는 방법입니다.

    재심을 맡은 재판부에선
    당시 수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불법 감금에 의한 진술"이라고 판단,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요.
    이는 공안수사 과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 변호사는
    "간첩 사건의 경우 바로 피의자를 처벌하는 게 아니라
    피의자를 통해서 다른 정보를 색출하거나
    조직의 전모를 알아내는 게 최우선 과제"
    라며
    "그러다보니 피의자를 장기간 데리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훗날 이 사건이 [재심판대]에 오를 경우
    [불법 감금]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는 것"
    이라고 밝혔다.

    간첩 사건을 예로 들어 볼까요?
    일단 간첩 혐의자가 체포되면
    바로 사법처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잘 구슬려서 우리 쪽으로 포섭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둡니다.
    한 명의 피의자를 통해서
    다른 정보를 색출하거나 조직의 전모를 알아내는 것이죠.
    북한의 대남 전술을
    흐트러뜨리는 방편으로도 활용되기도 하죠.

    자, 일단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선 잘 대해줘야 합니다.
    고문은 커녕, 호강을 시켜줍니다.
    고문을 하고 윽박지르면 우리 편으로 돌아서겠습니까?
    명동 구경도 시켜주고 대한민국의 현실도 알려주고….
    그렇게 해서 큰 성과를 거둔 사건이
    <다대포 간첩사건>입니다.

    한 전향한 간첩이 북한 측에
    "지금 복귀하려고 하니, 간첩선을 보내라,
    접선 장소는 OOO이다"라는 메시지를 건네
    실제로 넘어온 북한 무장 공비들을 생포했었죠.

    그런데 이런 특수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60~90일 이상 수사기관에서 데리고 있었으니 불법 구금"
    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주요 [증거능력]마저 부정해 버리니
    당시 공안에서 수사한 결과가 무용지물 돼 버리는 거죠.
    사실 간첩을 생포했을때
    본인 주장을 빼고 나면 남는 게 뭐 있겠습니까?

    어쨌든 이런 식의 재해석으로,
    무죄를 낼 수 없는 사건들이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했습니다.
    이유도 없이 막무가내로 끝에 석줄만 붙여서
    [민주화 운동]이라고 결론지은뒤 보상을 받게하는 겁니다.



  • "전교조의 참교육, 알고보니 공산주의 교육"


    고 변호사는
    "89년 전교조가 내세운 <참교육>의 실체가
    바로 [공산주의 교육]이라는 것은 자신이 처음 밝혀낸 사실"
    이라며
    "전교조가 생겨나기 이전,
    <민중교육지 사건>을 조사하다,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식화 운동]의 실체를 알게 됐다"
    고 밝혔다.

    1987년 쯤에 <민중교육지 사건> 재판에 관여하게 됐어요.
    저는 사건 공판만 하는게 아니라,
    항상 압수물들을 다 읽어봅니다.
    <민중교육지>에 대한 재판이니
    당연히 <민중교육지>도 다 읽어보고,
    압수된 노트나 메모도 다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노트 중에 이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지금 전국 대학가가 완벽하게
    (공산주의 사상으로)의식화가 됐는데,
    왜 혁명이 이뤄지지 않는지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분석을 해 놓은 것이,
    "대학생들은 머리에 먹물이 들어가서
    아무리 [의식화 운동]을 해도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민중혁명이 성공을 하느냐?
    4.19혁명 때를 봐라.
    그때는 초등학생 중고등학생까지 모두 거리로 뛰쳐나왔다.
    민중혁명이 성공하려면
    초등학생 중고등학생을 의식화 시켜야 한다.
    그러면 이들을 의식화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학생들을 주도적으로 의식화 시켜야 한다.』


    이 글을 읽고 그때만해도
    그냥 공상을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사람이 상상으로야 무슨 얘기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89년도에 갑자기 선생님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들고 일어난 거예요.
    [아,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고 변호사는
    "당시 자신만 이런 배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각 교육부처에서도 [전교조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제가 쓴 <전교조가 표방하는 [참교육]의 실체>가
    언론에 뒤늦게 소개되면서
    전교조 가입자 90% 이상이

    [탈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고 밝혔다.

    그 당시 대검 공안기획관실에는
    연구관이 6명 있었는데
    저는 노동 담당이었고,
    이 문제는 학원 담당이 맡았습니다.
    그때 공안기획관이 저에게 묻더군요.
    "대체 참교육이 뭐고,
    선생들이 왜 노동조합을 만들려 하느냐?"고.
    그래서 제가 설명했죠.

    『"<참교육>이란
    일본의 <진(眞)교육>을 우리말로 바꾼 것인데,
    <진교육>은
    공산당보다 더 좌익 성향이 강한 사회당 계열로서
    일본 교육을 황폐화 시킨
    <일본 교원 노조>가 만든 것이다.

    <진교육>의 속뜻에는
    [기존 교육은 가짜 교육]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학생 대부분은 민중의 자식이다.
    학생들이 성장을 하고 졸업을 해서
    부르주아가 될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민중계급이 될 텐데,
    민중의 자식이고 민중이 될 학생에게
    자본가가 될 자본교육을 시키는 것은 [가짜 교육]이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드는 교육,
    민중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교육,
    민중 혁명 역량을 키우는 교육이 참교육이라는 뜻이다"』

    설명을 했죠.

    다음날은 공안연구관들이 토픽을 정해서
    검사장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마침 제 차례였어요.
    전교조 문제도 시끄럽고,
    준비된 자료도 있고 해서 아침에 관련 보고를 했어요.

    당시 이를 접한 김기춘 총장이
    해당 내용을 바로 언론에 배포하라고 지시해
    제가 기자실에 미리 만들어둔 자료를 전달했죠.
    전 일간지에 <전교조가 표방하는 참교육의 실체>가
    한면에 걸쳐 다 나왔어요.

    당시 정원식 문교부 장관이
    "7월 31일까지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2만명 전원을 해직처리하겠다"고 선포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불과 사흘 전까지
    탈퇴한 교직원은 1%도 안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쓴 글이 일간지에 보도되자
    이틀 동안 90% 이상이 탈퇴했습니다.
    결국 1천4백여명만 남았고
    이들이 전원 해직처리 되면서 사태가 해결됐죠.


    고 변호사는
    "10년 후에 김대중 정부 들어서서
    전교조가 노동조합으로 합법화 됐지만,
    여전히 이적단체인 것은 변함이 없다"
    며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가르치는 내용은
    삼민(민족 민주 민중) 이념이에요.
    [민중교육]이 이적표현물로 처벌받았는데
    이 [민중교육]을 강령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
    전교조는 여전히 이적단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교조를
    노동조합으로 합법화 시키니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합법적이므로,
    이적단체일리가 없다고 받아들이게 된 거죠.
    또 학부형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요.
    89년만 해도 촌지 문제, 입시 지옥 등으로
    학부형들이 한창 열 받아 있는 상태였죠.
    그런데 갑자기 전교조가 나타나 참교육을 외치니,
    이게 [촌지 안받는 교육]인줄 알고
    지지를 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사실 애당초 전교조는
    [촌지 안받는 교육] 얘기는 꺼낸 적이 없어요.



  • "북한이 저를 가리켜 [천하의 역적]이라고…"


    고 변호사는
    "오랫동안 공안 검사 활동을 해 온 관계로
    김대중 정부 때에는 [제거 대상 10걸]에 속해 있었고,
    노무현 정부 때에는 인사상 불이익을 여러번 당했었다"
    는 고충을 털어놨다.

    저쪽에서 저를 갖고 비난할때
    "핍박을 받았다고 하면서
    대검 감찰부장을 지내고 남부지검장을 지냈다.
    이게 뭐 핍박이냐"고 항의를 하곤 합니다.

    사실 제가 공안을 쭉 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소문에) [제거 대상 10걸]에 속해 있었어요.
    노무현 정부 때에도 동기들에게 밀리는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었구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등
    주요 공안 사건은,
    제가 다 직·간접적으로 연루가 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때부터
    이미 북한 방송에서 저를 가리켜
    [천하의 역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선 대놓고 죽이겠다고는 안했지만
    욕은 정말 많이 먹었습니다.
    하지만 전,
    기본적으로 좌익들, 종북세력에게 욕을 먹으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고 변호사는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과거의 [공안사건]을 죄다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시키고

    거액의 보상금을 타게 끔 한 [일련의 조치]를
    다시 되돌려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회에서 재심이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하든지,

    아니면 정부에서 입법으로 제출을 하는 수밖에 없다"
    고 지적했다.

  • 다음은 고영주 변호사와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의 대담 전문

    인보길 : 영화 <변호인>이
    과거 <부림사건>(부산 학림사건)을 다뤘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분이셨으니
    진상에 대해 훤히 잘 알고 계시겠죠?

    고영주 : <학림사건> 뒤에
    부산에서 비슷한 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부산의 <학림사건>이라는 뜻에서 <부림사건>으로 부르고 있죠.
    원래 [의식화 사건]은 전부 수풀림(林)자를 붙입니다.
    무성한 수풀처럼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죠.

    ※<학림사건>이란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 첫 모임이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열린 것에서 붙여진 이름.
    <전민학련>은 1981년 초
    대학생 이선근·박문식·이덕희·홍영희 등이
    전국적인 학생조직 구성을 목표로 결성한 단체다.
    1981년 6월, 광민사 대표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검거된 후
    본격적으로 수사가 시작, 수십명이 연행되면서 해체됐다.

    ■ 인보길 : 벌써 30여년 이상 지난 사건이기 때문에
    요즘 세대에겐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질 텐데요.
    왜 지금 <부림사건>이 재조명 되고 있는지,
    하필 개봉일을 12월 19일에 맞춘 이유는 무엇인지,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영주 : 지난 19일 문재인 의원이 책을 펴냈었죠?
    그 책 이름도 12월 19일입니다.
    이름하여 <1219, 끝이 시작이다>.
    말 그대로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의미,
    즉 정치적 재기의 의지를 표명한 행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보길 : 제가 짚어볼까요?
    12월 19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일이자
    박근혜 현 대통령의 당선일이기도 합니다.
    바꿔 말하면 친노(親盧) 세력이 처음 집권한 날이면서도,
    문재인이 정권교체에 실패한 날이기도 하죠.
    결론적으로 12월 19일을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는 날로 삼은 것 같습니다. 

    고영주 : 친노세력들이 자기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이 영화를 적극 이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북한처럼 노무현 대통령을 신격화 영웅시해서,
    [합리화]와 [정당화]를 이끌어내려는 것이죠.

    인보길 : 당시 <부림사건>의 내용과 수사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고영주 : 80년대 초부터 전국 대학가에
    [의식화 학습] 바람이 불기 시작됐습니다.
    이 의식화 학습은 반미좌경(反美左傾) 사상을 배우는 건데요.
    이같은 현상이 일시에 도래된 이유는,
    12.12 사태와 5.16 군사혁명, 5.18 사태 등을 연달아 겪으면서
    대학가에 군사정부에 대해 극도로 염증을 느끼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 발단이 됐습니다.
    이에 일부 대학생들은
    "이런게 <자유민주주의>라면,
    <자유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선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다.
    이 체제에선 [공산혁명]으로만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품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에 빠져든 겁니다.
    그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은 군사정부만 교체할 수 있다면
    <악마>하고도 손을 잡겠다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종북 세력]입니다.
    요즘은 공산주의 좌파의 실상이 많이 알려져
    다시 우경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종북 세력]이 우연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그 뿌리가 이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부림사건>의 내용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이는 대학생 사이에서 이뤄진,
    일종의 [의식화 학습]으로, 부산 지역을 거점으로 발생했습니다.
    당시 조직적인 학생운동을 위해
    <전민학련>,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 등이 연달아 결성됐는데요.
    특히 이태복씨가 만든 <전민학련>은
    학생 조직을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부산 지역에선 좀 다른 기류가 흘렀습니다.
    부산 대학가에선
    "우리 의식수준이 너희보다 더 높은데
    왜 우리가 너희 밑으로 들어가야 하느냐"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부산에선 별도의 학생 조직이 결성됐어요.
    전국적인 조직에 안들어가고 과감히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거죠. 

    제가 특별히 <부림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워낙 컸기도 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주임 검사는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였던 최병국 검사였는데요.
    공안 검사 3명이 달려든 큰 사건이었습니다.
    전 [말석]이어서 제1피의자 조사를 맡게 됐죠.
    사실 30년이 지난 사건이고, 피의자로만 불러왔기 때문에
    훗날 누가 이 사건에 대해 물어봤을 때
    "제1피의자의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요즘엔 이 점을 문제 삼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어떻게 피의자 이름도 기억을 못하느냐며….
    그래서 저도 나중에 기록을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이OO씨가 당시 제1피의자였더라구요.
    이름을 본 순간, 기억이 났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분을 처음 조사할 때인데요.
    들어와서 자리에 앉자마자 하는 소리가
    "검사님! 아니, 검사님은 역사의 발전 법칙도 모르십니까?"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그때부터 자기 지식을 자랑하는 겁니다.  



  • 아래는 당시 이OO과 고 검사가 나눴던 대화.

    피의자 : "검사님은 역사의 발전법칙도 모르십니까?"

    검사 : "그게 무슨 소립니까?"

    피의자 : "역사라는 건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에 의해 발전돼 나가는데요.
    원시공산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봉건사회,
    근대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곧 공산주의 사회가 됩니다.
    곧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터인데
    역사가 바뀌면 주역도 바뀌는 법이고
    지금은 우리가 검사님한테 조사를 받고 있지만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그땐 저희가 검사님을 심판할 겁니다."


    고영주 : 이는 역사학자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유물사관(唯物史觀)을
    마치 자랑삼아 저에게 늘어놓은 거죠.
    대체 이게 피의자가 검사에게 할 소리입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저도 나름의 논리를 갖고,
    이OO씨와 몇차례 입씨름을 했었죠.
    일각에선 공안검사가 강압 수사를 했다고 하는데요.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이OO씨가 천연덕스럽게 이런 얘길 저에게 꺼내 놓겠습니까?
    사실 저 역시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책으로
    공부를 하는 입장이었는데요.
    가만히 말을 듣다보니 좀 이상하더라구요.
    역사라는 게 이 사람 말처럼 딱딱 공식처럼 발전하는 것이라면
    공산주의 사회에도 모순이 있을 것 아니냐?
    그렇다면 공산주의 다음 사회는 어떤 사회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이OO씨가 저보고 언어유희하지 말라며 화를 내더군요.
    우리 갖고 장난치지 말라며….

    아래는 당시 이OO과 고 검사가 나눴던 대화.

    검사 : "역사라는 게 당신 말처럼
    딱딱 공식대로 발전하는 것이라면
    공산주의 사회에도 모순점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다음 사회는 어떤 사회가 도래하는 겁니까?"

    피의자 : "아니, 아직 공산주의 사회도 완전히 도래하지 않았는데,
    그 다음 사회를 논하는 건 언어의 유희 아닙니까?
    저희 같고 장난치지 마십시오!"

    검사 : "저도 장난칠 생각 없습니다.
    솔직히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살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만약 그때 내가 살아있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당신들의 심판을 받아야겠죠.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자유민주주의 체제입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공안 검사이구요.
    그래서 당신들을 조사하고 기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영주 : 들으신 바 대로, 흔히 있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피의자와 나눴던 대화를 누차 얘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들이 벌인 [공산주의 운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치부하면 곤란하죠.
    그 당시에는 아무도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몰랐습니다.
    선생님에게 물어봐도,
    아버지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공산주의 사상을 알고 있는 자신들이
    마치 선각자가 된 것인냥 착각을 한 거죠.

    인보길 : 한 마디로 조사를 받던 피의자로부터 포섭을 당할 뻔 하셨군요. 

    고영주 : 포섭이라고 볼 수도 있고,
    협박 비슷한 것을 당했다고 볼 수도 있죠.

    인보길 : 저도 예전에 젊은 후배 기자들이
    저를 그런 식으로 설득하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화제를 좀 바꿔서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가 된 계기가
    이 사건의 [무료 변론]을 맡으면서부터라고 하는데요.
    문재인 변호사도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무료 변론]을 했었나요?

    고영주 : 훗날 문재인 변호사가
    <부림사건> 변호를 맡았었다는 얘기가 널리 퍼졌었죠.
    [저쪽 동네]에서 먼저 불거진 얘기입니다.
    그래서 청와대 인맥이 전부
    [부림사건 인맥]이라는 말까지 나온거구요.
    저도 그런 얘기들이 하도 많이 나오길래 그런 줄 알았죠.
    하지만 문재인 의원은 그 당시 변호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인단에 참여했었는지도 몰랐어요.
    이 사건은 워낙 규모가 컸기 때문에 부산지역 대 선배들이 관여했습니다.
    이흥록씨가 당시 대표 변호사였을 거예요.
    저희들은 어차피 법정에서
    이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변호사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었어요.
    그 뒤로 "노무현과 문재인의 운명적인 첫만남"이라면서
    두 사람이 <부림사건> 변호를 맡았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회자됐어요.
    팩트가 틀린 얘기였지만,
    최근 문재인 의원 스스로
    [자신은 이 사건 변호를 맡은 적이 없다]고 밝히기 전까지는
    모두가 기정사실로 간주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무료 변론에 동참한 것으로 알려진 김광일 변호사도
    사실은 부인이 반대해 변론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 인보길 :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했던 변론, 기억나십니까?

    고영주 : 부산 지역 거물 변호사들이 나섰는데
    옆에 있는 신참 변호사들에게 발언 기회나 있었겠습니까?

    인보길 : <부림사건> 피의자들이 했다던
    [의식화 학습]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신다면?

    고영주 : 처음엔 사회에 대한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을 읽게 하죠.
    그 다음엔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같은 책들을 권해요.
    주로 이영희씨의 글이 초기 학습자료로 많이 쓰였습니다.
    이런 책자들은 여태까지의 고정 관념을 깨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한 마디로 인식을 바꾸는 교재들이죠.
    그 다음에는 북한식 공산주의 선전 이론을 배우죠.
    <김일성>이 항일혁명을 했다는 식으로….
    이를테면 북한은 항일혁명세력이 세운 정부이고,
    우리는 친일세력이 세운 정부라는 잘못된 관념을 주입시키기도 합니다.

    인보길 : 당시 피의자들이 인과 관계가 명확한 <부림사건>을 두고
    고문을 통한 [용공(容共)조작사건]으로 규탄하는 배경은 무엇인가요?

    고영주 : 나중에 "수사과정에서 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다"
    "허위자백을 유도했다" "용공조작이다"란 말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제가 만난 피의자들은요,
    수사 중엔 누구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얘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어요.
    고문 얘기는 전부 재판 중에 거론한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모진 고문을 당했던 사람이
    면전에서 검사를 협박하는 게 쉬운 일일까요?
    물론 고문을 당했다는 피의자 측의 주장을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아는 부분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당시엔 시시한 [잡범]들도 경찰서에 가면 그냥 오는 법이 없었어요.
    일단 조사를 받으면 한참 얻어맞고 나오는 일들이 많았던 시대였죠.
    다시 말하자면 피의자들이 경찰 조사 때
    한대도 맞은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검찰 조사 만큼은 확실합니다.
    당시 공안 검사가 피의자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날 수가 있기 때문에
    일단 [정치사범]이 오면 저희는 [칙사대접]을 합니다.
    불행한 환경에서 조사를 한 적은 단언컨대 단 한차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강압수사다" "조작이다" 말이 많죠,
    [공산주의 얘기]는 피의자가 스스로 꺼낸 겁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먼저 유물사관을 언급하며
    공산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언했어요.
    <부림사건> <학림사건>은 여러 공안 사건 중에서도
    제일 강력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 무리 중에서도 의식 수준이 가장 높았던 사람들이 연루됐기 때문이죠.
    이것을 [용공조작]이라고 한다면
    80년대 후반, 운동권 학생들이 급격히 [좌경화]에 빠진 점과,
    오늘날 종북세력이 자리잡게 된 배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당시 <부림사건>이 기폭제가 돼 공산주의자들이 생겨났고
    현재까지 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현시대에 [종북세력]으로 나타난 겁니다.

  • 인보길 :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
    과거 판결을 180도 뒤집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는 일들이 빈번해졌습니다.
    특히 <부림사건>은 2000년대 사법부의 일부 무죄판결과 함께
    [민주화운동]으로 포장돼 보상 받았는데, 그 구체적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고영주 :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고 보상 받는 방법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 데요.
    첫째는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재심을 유도,
    대법원 판결 통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는 방법이 있구요.
    둘째는 사법 판결을 거치지 않고,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에서
    자체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 보상을 이끌어내는 방법입니다.
    재심을 맡은 재판부에선 당시 수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불법 감금에 의한 진술"이라고 판단,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요.
    이는 공안수사 과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간첩 사건을 예로 들어 볼까요?
    일단 간첩 혐의자가 체포되면, 바로 사법처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잘 구슬려서 우리 쪽으로 포섭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둡니다.
    한 명의 피의자를 통해서 다른 정보를 색출하거나
    조직의 전모를 알아내는 것이죠.
    북한의 대남 전술을 흐트러뜨리는 방편으로도 활용되기도 하죠.
    자, 일단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선 잘 대해줘야 합니다.
    고문은 커녕, 호강을 시켜줍니다.
    고문을 하고 윽박지르면 우리 편으로 돌아서겠습니까?
    명동 구경도 시켜주고 대한민국의 현실도 알려주고….
    그렇게 해서 큰 성과를 거둔 사건이 <다대포 간첩사건>입니다. 

    한 전향한 간첩이 북한 측에
    "지금 복귀하려고 하니, 간첩선을 보내라,
    접선 장소는 OOO이다"라는 메시지를 건네
    실제로 넘어온 북한 무장 공비들을 생포했었죠.
    그런데 이런 특수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60~90일 이상 수사기관에서 데리고 있었으니 불법 구금"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주요 증거능력마저 부정해 버리니
    당시 공안에서 수사한 결과가 무용지물 돼 버리는 거죠.
    사실 간첩을 생포했을때 본인 주장을 빼고 나면 남는 게 뭐 있겠습니까?
    어쨌든 이런 식의 재해석으로,
    무죄를 낼 수 없는 사건들이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했습니다.
    이유도 없이 막무가내로 끝에 석줄만 붙여서
    [민주화 운동]이라고 결론지은뒤 보상을 받게하는 겁니다.

    저희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심의위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적도 있는데요.
    주로 명망있는 인사들을 섭외, 보상심의위원회를 만들고
    그 밑에 [실무위원]에는 좌익세력을 포진시키는 겁니다.
    사실 이들 실무위원이 모든 과정을 주관합니다.
    자기들끼리 민주화 운동 심의를 하고 땅땅땅 치면 끝이에요. 

    지금껏 <민보상>을 통해 엄청난 액수의 보상이 이뤄졌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어쨌든 잘못됐어도
    재판을 통해 [무죄]를 유도, 보상을 받게끔 하는데 반해,
    <민보상>은 현행법상 [유죄]라는 사실이 번복되지 않은 가운데,
    막무가내로 민주화 운동 도장을 찍어주고 보상을 해주는 식입니다.
    법에 의지하지 않고 [유공자]라고 온갖 명예를 주고
    보상을 한 것이 지금까지 1천억원이 넘습니다.
    누가봐도 反국가단체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까지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했으니 할 말 다했죠.
    이러니 <부림사건> 같은 점잖은 공산주의 운동을 민주화로 둔갑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죠.

    인보길 : 그때 남민전에 있었던 인물이
    지금도 민주당에 있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공안 검사로 재직해 오셨는데
    <부림사건> 말고도 특이한 사건은 없었습니까?

    고영주 : 대한민국에서 [의식화 운동]이 처음 생겨났을때
    제가 공안 검사를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실상을 제일 많이 알게 됐죠.
    압수수색으로 온갖 증거물들을 다 접하게 되거든요.
    보통 검사들은 순환 근무를 하기 마련인데
    저는 공안을 잘 한다고 해서 계속 공안 사건만 맡게 됐습니다.
    <민중민주주의>가 [이적 이념]이라는 걸
    제일 먼저 밝혀낸 사람이 접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서도 나오는데요.
    사실 <민중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똑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공안 당국이 인민민주주의와 이름이 비슷한
    <민중민주주의>를 공산주의로 몰고 있다"며
    "이게 바로 용공조작"이라고 발뺌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1985년 고대의 <일보전진>이란 책을 분석하다가
    "자유민주주의는 가짜 민주주의다"라면서
    민중민주주의를 얘기하는 대목이 나와서
    민중민주주의를 이적 이념으로 간주, 학생 2명을 구속 기소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민중민주주의>란 용어를 못쓰는 것이거든요.
    85년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 선동할 자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동안에도 <민중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선전 선동을 해왔어요.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이적단체로 규정한 것도 제가 한 것이구요.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표방하는 <참교육>이
    [이적이념]이란걸 밝혀낸 것도 제가 한 겁니다.
    전통적인 공산주의 이념 사건을 수사해온 분은
    최상엽 장군이나 전경식 검사장 등
    쟁쟁한 공안 검사들이 계시지만
    지금처럼 변형된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서는 제가 처음 시작했다고 봐야죠.
    생각하는 것과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전부 제가 만들었죠.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등
    주요 공안 사건은 제가 다 직·간접적으로 연루가 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인보길 : 그럼 좌익들의 주적이겠네요.

    고영주 : 그런 셈이죠.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때부터
    이미 북한 방송에서 "천하의 역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인보길 : 이름을 거론했어요?

    고영주 : 네, 분명히 이름이 다 나와 있습니다.

    인보길 : 북한에서 그런 협박을 가했는데, 남한에서 협박 받은 일은 없나요?

    고영주 : 여기에서도 많았죠.
    대놓고 죽이겠다고는 안했지만 욕은 정말 많이 먹었습니다.
    하지만 전, 기본적으로 좌익들,
    종북세력에게 욕을 먹으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보길 : 우리나라의 좌익들은
    끊임없이 변형을 하면서 공산주의 혁명 운동을 하고 있군요. 

    고영주 : 그게 용어 혼란전술이죠.

  • 인보길 : 노무현 정권 때 직책은 뭐였습니까?

    고영주 : 저쪽에서 저를 갖고 비난할때
    "핍박을 받았다고 하면서
    대검 감찰부장을 지내고 남부지검장을 지냈다.
    이게 뭐 핍박이냐"고 말하곤 합니다.
    사실 제가 공안을 쭉 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소문에) [제거 대상 10걸]에 속해 있었어요. 

    인보길 : 영광이네요.

    고영주 : 이 중 7명은 최병국이나 주선해 등 검사장급이고,
    검사장급이 아닌 사람은 저를 포함해 3명이 있었죠.
    일곱 분은 당연히 DJ정권때 나갔구요.
    3명 중 이상현한기용은 계속 <고검>에만 머물다가 나갔죠.  

    검찰은 탄핵할 증거가 없으면 못내보내요.
    인사로 물먹일 방법 밖에는 없죠.
    인사발령을 통해 망신을 주고 스스로 나가게끔 유도하는거죠.
    저는 진짜로 우연히 살아났습니다.
    당시 대검 공안부장을 하던 주선해 검사장이 청주 검사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대검 공안부장은 빅4에 들어가는 자리이고
    청주 검사장은 초임 검사장이 가는 가리인데,
    한 마디로 나가라는 거죠.
    주 검사장도 나갈 생각을 하고,
    [그래도 총장에게 한 마디는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
    당시 김태정 총장실에 들거간거죠.

    그때 주선해 검사장이
    "우리가 총장님 모시고 김태정 공안을 했지 주선해 공안을 했습니까?
    그런데 총장님은 계시면서 저를 문책 인사를 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앞으로 누가 공안 검사가 되겠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만둘 각오를 하고 내뱉은 말인데,
    김태정 총장이 의외로
    "그래? 미안해.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나"고 나온 거예요. 

    김 총장이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이자
    주 검사장도 순간 마음이 바뀌어서
    "이왕 이렇게 말씀하시니 일단 발령이 난 것은 부임을 하겠습니다.
    그 대신에 공안 검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고영주김재기는 챙겨주십시오"라는 말을 엉겹결에 꺼낸 겁니다.

    사실 이 분이 제 얘기를 하려고 총장실에 들어간 건 아니지만
    얼떨결에 제 이름이 튀어 나온 거죠.
    그런데 이 김태정 총장도 보스 기질이 있어서
    "알았어! 두 사람은 내가 책임질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법무부 인사위원회에서
    저는 당연히 <고검>가는 것으로 분류가 돼 있었는데
    그 당시 "고영주 검사가 일을 열심히 한 것이지
    정치권과는 관련이 없지 않느냐"는 말이 나와
    <고검>이 아닌 <서울중앙지검> 형사 2부로 가게 됐습니다.
    다만 공안에서는 영구히 배제되는 조건이었죠.

    그런 우여곡절 끝에 살아나서 동기들에게 한번 밀리고
    간신히 김대중 정부 말기에
    검사장으로 승진해서 광주고검 차장으로 가 있었죠.

    그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거예요.
    노무현 정부는 개인적인 원한 관계(부림사건)가 있으니
    나를 내보내려고 했죠.
    그 당시에 검사장들이 15명 정도가 옷을 벗었어요.
    그러니까 약 3기 정도가 비는 거예요.
    제 밑에 밑에 검사들까지 다 승진해서 저보다 다 좋은 자리로 가고,
    저만 전국 검사장 자리 중에서 [말석]에다 갖다 놓은 거예요.
    김대중 정부 때에도
    저도 모르게 형사 2부장 발령이 됐지만
    저는 어쨌든 즐겁게 지내고,
    인사에 대해 크게 불만이 없었는데,
    그런데 이번 건은 정말 불공평 한 거예요.
    자기들이 공산주의 된다고 해놓고선, 안됐잖아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가 안됐는데,
    왜 내가 쟤네들한데 심판을 받아야 되느냐?]

    그래서 도저히 이번 인사는 승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열이 너무 받아서 잠도 안오고 밥도 잘 안먹고…. 

    그랬더니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더라구요.
    [이러다간 내가 죽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내가 그만두면 해결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사표를 내려고 했죠.
    그때 같이 공안을 했던 곽영철 검사장이
    "검찰 인사라는 게 그런게 아니다 한번 더 참고 기다려봐라"라는 말을 했어요.
    저는 미련하게 평생 검사할 생각만했지
    변호사 개업을 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때 변호사 개업을 하려고 했다면 당장 그만뒀을 겁니다.
    [뭐 연금으로 먹고 살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선배가 "절대로 안된다"며 만류를 하셨어요.
    생각해보니
    연금으로 먹고 사나, 고검 차장으로 먹고 사나
    다 마찬가지더다구요.
    검사 중에는 평생 검사장 승진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고검 차장으로 몇년 동안 돌리는 건데
    그냥 [평검사]라고 생각하고 눌러 앉기로 했어요.   

    어느날 출근을 하려고 하니 전화가 한통 왔어요.
    "고영주 검사장님 되세요? 저 강금실이에요"
    당시 법무부 장관이 강금실씨였거든요. 

    이번주에 서울 안오시냐며 올라오시면 꼭 한 번 뵙자고 하더군요.
    사실 저를 [말석]에 갖다 놨는데 강금실이 좋을리가 있겠어요? 
    그런 상황에 이런 전화를 받았어요.

    당시 <한총련> 수배를 해제해야 한다.
    <전교조>를 복직시켜야 한다는 얘기들이 많이 나올 때였습니다.
    이 문제로 대검과 법무부 장관과의 갈등도 심할 때였죠.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한 것도 제가 한 일이고
    <전교조>를 해직토록 한 것도 저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한 일 때문에 (저를)찾는다고만 생각했죠. 

    그래서 강 장관을 대면해선
    "<한총련>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죠?"라고 물으면서
    왜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는지,
    <전교조>가 표방한 참교육 이념이 왜 [이적이념]인지 차근차근 알려드렸어요.
    그러자 강 장관은
    "다른 데에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좋은 말씀을 들었다"며
    "저 오해하지 마세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왜 저를 보자고 하셨느냐"고 물었더니
    강 장관은
    "자기가 처음 장관으로 부임해선
    청와대에서 준 자료들만 갖고 인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자기가 한 번 제대로 인사를 해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어요.
    실제로 강 장관은 적재적소에 명망 있는 사람들을 앉히려 노력 중이었어요.
    이 와중에 대검 공안부장 자리를 놓고 자문을 구했는데,
    이구동성으로 "고영주 검사장이 맡아야 된다"는 얘기가 나와
    이렇게 찾아뵙게 됐다고 말했어요.

    사실 이 양반이 아무 것도 모르고 한 소리이죠.
    저는 강 장관에게
    "평소 검사로서 소신있게 일을 해왔습니다.
    제가 대검 공안부장이된들
    이 정부 하에서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죠.
    장관이 중요 직책을 맡아 달라고 부탁한 것을 싫다고 거절하니
    분위기가 이상해졌죠.
    거기에서 끝났습니다.
    서로 어색한 상태로 헤어졌죠.

    이후 대구에 와 있는데 강 장관으로부터 또 전화가 왔어요.
    자신이 "청와대 들어가는 길"이라며
    대뜸 "대검 공안부장 꼭 맡아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어요.
    아침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냥 "네"라고 답했는데,
    역시나 그날 저녁에 "아이구 죄송합니다"란 전화가 왔죠.
    문재인이 비토를 한 거예요.

    아마 그때 청와대 민정수석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 당시 청와대 내에 정무수석-민정수석-홍보수석 등이
    포함된 [7인 위원회]가 인사를 담당했는데
    거기에서 문재인이
    "고영주 검사장은 안된다"
    고 말한 모양이에요.

    저로선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죠.
    그 후론 강금실 장관에 대해 섭섭한 감정은 사라졌죠.
    나름대로 애를 쓰셨던 분이에요.

    하루는 휴가를 내고 용평에 머물러 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검사장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고 검사장님이 사건을 맡아 달라"는 전화였죠.
    청주에서 국정상황실장하던 <양길승 몰래카메라 사건>이 터진 겁니다.
    그래서 정식 인사보다 하루나 이틀 먼저 청주 검사장으로 부임을 했죠. 

    부랴부랴 돌아와서 사건을 살펴보니
    도저히 풀 수 없는 [심연]이 4개나 있더라구요.
    다행히 하늘이 도와서 진상을 밝혀냈어요.
    이 사건은 대통령이 청남대에 가 있는 동안,
    양길승 국정상황실장이
    청주에 있는 <키스 나이트 클럽>에 갔다오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힌 사건입니다.
    이 영상이 며칠 후 SBS 뉴스에 그대로 보도가 됐죠.
    당시 <키스 나이트 클럽> 사장이 살인죄 혐의를 받고 있었거든요.
    그야말로 세상이 발칵 뒤집어진거죠.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 살인 혐의가 있는 사람을 비호하고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전국에서 기자들이 몰려 왔죠.  

    인보길 :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고영주 : 자초지종을 설명하자면 꽤 긴데,
    결론만 말씀드리면 청주지검 검사가 이 걸 시킨거예요.
    그래서 검사를 구속해서 징역 4년 실형을 받게 했죠. 

    이후에 대검 감찰부장을 거쳐 남부지검 검사장으로 갔다가
    나중엔 2006년 1월 30일 나왔습니다. 

    "노무현 정권때 대체 무엇을 핍박 받았느냐?"
    "대검 감찰부장과 남부검사장을 지냈는데 뭐가 핍박이냐?"고
    묻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이러한 말못할 사정이 있었던거죠.

    제가 DJ정부때 [제거 대상 10걸]에 포함됐었고,
    노무현 정부때에는 유일한 청와대 비토 대상이었어요.
    남은 게 저 하나밖에 없었던거죠.

    ■ 인보길 : 2006년에 검사 옷을 벗으시고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드셨죠?

    ■ 고영주 : 제성호 중앙대 법대교수가 위원장을 맡고
    제가 자문을 구하는 형식으로 발족했죠.
    이걸 만든 이유는 그 당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생겨나
    과거 공안사건을 전부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시키는 바람에
    당시 고생했던 대공요원들이 죄다 [反민주 인사]가 돼 버렸잖아요?
    특히 <친일反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서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들을 전부 [친일反민주 인사]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여기에 맞대응을 하려고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란 단체를 만든거죠.
    그 당시 전교조 부산지부 통일학교 교재도 폭로하고,
    빨치산 유적지 순례 사건도 폭로했죠.
    그 덕분에 교육위원 선거때 전교조가 거의 전멸했었어요.
    그리고 정권 교체가 돼서 저희 할 일이 더 많아졌죠.
    무력화된 공안기관을 정상화 시키고 현대사 왜곡 문제도 바로잡아야 했죠.
    전교조 문제도 마찬가지구요.
    각계에 퍼진 종북세력을 무력화 시키는 일도 시급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기존 단체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게 된 겁니다.

    인보길 : 기억에 남는 활동을 꼽아보신다면?

    고영주 : 친북 반국가행위 인명사전을 만들어 100명을 발표했죠.
    국민행동본부와 함께 통합진보당 해산 청원을 하고,
    전교조를 이적 단체로 고발했고,
    교과서 현대사 왜곡된 부분도 계속해서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동안 정체돼 있었던 각종 사건들이 순식간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보길 : 되고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지지부진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고영주 : 그런 측면도 있지만 정부 의지는 분명히 드러났잖아요?
    다만 사법부에서 자꾸 발목을 잡는 것이지요.
    [사법부 좌편향 문제]에 대해선 제가 발표도 했었어요.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말씀을 드린 겁니다.
    요즘도 애국단체들이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물러가라"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죠.
    실제로는 많은 부장 판사들이 잘못을 했지만
    일일이 대응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시위를 하는거죠.

    인보길 : 아까 얘기로 잠시 돌아가보면
    89년도 전교조가 출범한 직후
    <참교육>이라는게 바로 [공산주의 교육]이라는 것을
    어떻게 발견했고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고영주 : 1987년 쯤에 <민중교육지 사건> 재판에 관여하게 됐어요.
    저는 사건 공판만 하는게 아니라, 항상 압수물들을 다 읽어봅니다.
    <민중교육지>에 대한 재판이니
    당연히 <민중교육지>도 다 읽어보고,
    압수된 노트나 메모도 다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노트 중에 이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지금 전국 대학가가 완벽하게 (공산주의 사상으로)의식화가 됐는데,
    왜 혁명이 이뤄지지 않는지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분석을 해 놓은 것이,
    "대학생들은 머리에 먹물이 들어가서
    아무리 의식화 운동을 해도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민중혁명이 성공을 하느냐?
    4.19혁명 때를 봐라.
    그때는 초등학생 중고등학생까지 모두 거리로 뛰쳐나왔다.
    민중혁명이 성공하려면 초등학생 중고등학생을 의식화 시켜야 한다.
    그러면 이들을 의식화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학생들을 주도적으로 의식화 시켜야 한다. 

    이 글을 읽고 그때만해도 그냥 공상을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사람이 상상으로야 무슨 얘기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89년도에 갑자기 선생님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들고 일어난 거예요.
    [아,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저는 이런 배경을 알고 있었는데
    이걸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그 당시 대검 공안기획관실에는 연구관이 6명 있었는데
    저는 노동 담당이었고, 이 문제는 학원 담당이 맡았습니다.
    그때 공안기획관이 저에게 묻더군요.
    "대체 참교육이 뭐고, 선생들이 왜 노동조합을 만들려 하느냐?"고.
    그래서 제가 설명했죠.
    "<참교육>이란 일본의 <진(眞)교육>을 우리말로 바꾼 것인데,
    <진교육>은 공산당보다 더 좌익 성향이 강한 사회당 계열로서
    일본 교육을 황폐화 시킨 <일본 교원 노조>가 만든 것이다.
    <진교육>의 속뜻에는 [기존 교육은 가짜 교육]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학생 대부분은 민중의 자식이다.
    학생들이 성장을 하고 졸업을 해서 부르주아가 될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민중계급이 될 텐데,
    민중의 자식이고 민중이 될 학생에게
    자본가가 될 자본교육을 시키는 것은 [가짜 교육]이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드는 교육,
    민중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교육,
    민중 혁명 역량을 키우는 교육이 참교육이라는 뜻이다"란 설명을 했죠.

    제가 이런 걸 지어낼 일이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우리나라 선생들이 그럴리가 있겠느냐"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당시 공안검사들이 하는 얘기였죠.

    심지어 내 말이 맞는지 투표를 해보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니,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어떻게 표결로 가늠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죠.

    나는 10년 이상 공안 검사를 해왔는데,
    엊그제 공안 검사로 부임한 사람과 무슨 언쟁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됐다. 내 나라만 망하냐? 네 나라도 망하지] 하고
    그냥 나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공안기획관으로부터 전화가 다시 왔어요.
    지금 청와대에서 관계 기관 회의를 하려고 하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노발대발 했다는 거예요.
    선생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
    관계 부처에선 대체 뭐하고 있느냐는 거죠.
    원래는 학원 담당 연구관이 가야 하는데
    솔직히 아는 게 전혀 없고,
    미덥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뭘 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고 검사가 같이 좀 가 달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때 저는 [공안 검사들도 내 말을 안 믿는데,
    청와대에 가선 입을 꽉 다물어야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요. 아무도 진상을 모르는 거예요.
    노동부-교육부-경찰-안기부-기무사 등
    아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어요.
    그 당시 정무 비서관인 윤여준씨가 마지막으로
    "대검에서 온 고 검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이대로 회의가 끝날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얘기를 쭉 했죠.
    그런데 여기는 분위기가 다른 거예요.
    윤여준 비서관이
    "고 검사님, 지금 내용을 글로 써 주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부탁을 하더군요.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친다는데,
    당시 일이 바빴지만 밤을 새워
    [전교조가 표방하는 <참교육>의 실체]에 대해 글을 썼어요.
    그래서 다음날 청와대에서
    이 글을 팜플렛으로 만들어 전국 학교에 배포를 했죠. 

    다음날은 공안연구관들이 토픽을 정해서
    검사장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마침 제 차례였어요.
    전교조 문제도 시끄럽고,
    준비된 자료도 있고 해서 아침에 관련 보고를 했어요.
    당시 이를 접한 김기춘 총장이
    해당 내용을 바로 언론에 배포하라고 지시해
    제가 기자실에 미리 만들어둔 자료를 전달했죠.
    전 일간지에
    <전교조가 표방하는 참교육의 실체>가 한 면에 걸쳐 다 나왔어요.
    당시 정원식 문교부 장관이
    "7월 31일까지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2만명 전원을 해직처리하겠다"고 선포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불과 사흘 전까지 탈퇴한 교직원은 1%도 안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쓴 글이 일간지에 보도되자
    이틀 동안 90% 이상이 탈퇴했습니다.
    결국 1천4백여명만 남았고 이들이 전원 해직처리 되면서 사태가 해결됐죠.

    인보길 : 그 뒤에 전교조가 합법화 됐죠?

    고영주 : 네, 10년 후에 김대중 정부 들어서서
    노동조합으로 합법화 됐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내용은 삼민(민족 민주 민중) 이념이에요.
    민중교육이 이적표현물로 처벌받았는데
    이 민중교육을 강령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
    <전교조>는 여전히 이적단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교조>를 노동조합으로 합법화 시키니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합법적이므로 이적단체일리가 없다고 받아들이게 된 거죠.
    또 학부형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요.
    89년만 해도 촌지 문제, 입시 지옥 등으로
    학부형들이 한창 열 받아 있는 상태였죠.
    그런데 갑자기 <전교조>가 나타나 참교육을 외치니,
    이게 [촌지 안받는 교육]인줄 알고 지지를 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사실 애당초 전교조는 [촌지 안받는 교육] 얘기는 꺼낸 적이 없어요. 

    인보길 :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청와대가 부림사건 관련자로 꽉 찼을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고영주 : 저는 검사로서 일을 했고 그쪽은 변호사로서 일을 했고,
    그래서 이런 문제를 저쪽에서 문제삼을 것으로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제가 좀 어리숙했던거죠.
    사실 김대중 정부때 한광옥 의원이 비서실장을 했잖아요.
    그분은 제가 구속을 했었어요.
    국가모독사건으로.
    당시는 대통령과 정부를 비방하면 형법상 국가모독죄가 인정됐거든요.
    그런데 한광옥씨는 전혀 보복을 안했어요.
    그래서 저는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보복을 안하는 줄 알았죠.
    나중에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새 정부가 들어섰을 때에도,
    물론 대우 받을 생각은 안했지만
    적어도 이런 인사가 이뤄질 줄은 생각을 못했어요. 

    인보길 : 민보상이 대한민국 건국이래 발생한 모든 공안 사건을 뒤져서
    무죄를 이끌어내고 거액의 보상금을 타도록 했는데
    이게 법치국가에서 가능한 일입니까?

    고영주 : 불가능한 일이죠.
    이명박 정권 당시 역사교과서 문제가 터졌을때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것을 분명히 책에 기록하라"라는 지시가 내려가니,
    당시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 위원 22명 중 9명이 사표를 내고 나갔어요.
    이 사람들은 [민중민주주의]도 [민주화 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우리가 보기엔 [민중민주주의]는 [공산주의 운동]인데
    [민중민주주의]를 위해서 노력을 한 것도 모두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시키고 있죠.
    그러니까 대외적으로는 다 [프롤레타리아 민주화 운동]인 거예요. 

    인보길 :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
    법에 의하지 않은 [사법 혁명]이 일어난 셈인죠.
    이렇게 뒤집혔으면 나라가 뒤집힌 셈인데
    이것을 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중심으로 다시 뒤집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고영주 : 저희가 이명박 정권때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고 이름을 붙였잖아요.
    그때 주위에서 비난을 많이 했어요.
    "그럼 지금 국가가 [비정상]이란 말이냐"는 거죠.
    사실 저희가 보기에는 비정상이죠.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청와대에서 "비정상을 정상화 시켜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얘기를 했어요.
    우리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와 생각이 같아서 요즘은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인보길 :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잘못됐다고 법적으로 다시 규정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분명히 공산주의 운동인데
    이것을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시키고,
    거액의 보상까지 해준 사실을 확실하게 국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보상금은 모두 환수를 해야죠.

    고영주 : 예전에 전여옥 테러사건 기억하실 거예요.
    그 당시 <남민전><동의대 사태> 등을
    <민보상>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지은데 대해,
    저희가 반발을 하고 <민보상> 위원들을 고발한 일이 있었어요.
    전여옥 의원도
    "이건 부당하지 않느냐,
    이걸 뒤집을 방법이 없느냐"고
    물어보시더라군요.
    그래서 제가 국회에서 재심이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죠.
    그 다음날 전여옥 의원이 이것을 [입법 발의] 해서 테러를 당했잖아요?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죠.
    사실 입법으로 해야하는데,
    지금 민생 입법도 하나도 처리가 안되는데 협조가 되겠습니까?

    인보길 : 정부는 당연히 정부 입법으로 제출을 해야죠.

    고영주 : 당연히 정부가 해야죠.
    하지만 뭐, 저희가 정부도 아니고…, 한계가 있습니다.

    인보길 : [제주 4.3사건] 같은 경우는
    보상금이 무려 1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상을 받는 과정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고영주 : 박원순 시장 얘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제주 4.3사건]도 바로 세워야 할 사건 중 하나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지역 문제가 걸려 있는 사건이라,
    정부 차원에선 다루기가 꽤 어려울 겁니다.
    민주주의라는 게 표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보길 : 아무튼 [공산주의 운동]이
    이렇게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되고
    보상까지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영주 :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등
    다수의 공산주의 운동 사건을 두고 [용공조작]이라고들 하는데,
    만일 [용공조작]이 맞다면 지금 종북 세력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그 사건이 [용공조작]이 아닌,
    진짜 [공산주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종북세력들이 존재하게 된 겁니다. 

    인보길 : 공산당의 아주 기본적인 전술이죠.
    해방 이후 70년 이상,
    이들 세력은 남에게 뒤집어 씌우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스스로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하는 전술을 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지금의 통진당 사태는 어떻게 보십니까?
    진짜 해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고영주 : 국민의 70% 이상이 찬성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헌법재판관도 사람이기 때문에
    적어도 6명 이상은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터뷰이 = 고영주 변호사
    인터뷰어 =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
    정리 = 조광형 기자
    사진 = 정상윤 기자 / 영화 '변호인'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