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박근혜에게 바가지 씌우고 빚 꿔줘...죄책감-연민 팔아먹는 3류 시인 안도현...大시인 김지하의 '긴장'을 안다고?
  • [연탄 콤플렉스 환자] 안도현!

    김지하가 연탄재보다 못하냐?



  • 싸구려 죄책감을 포장한 시(詩)를 파는 3류 시인 안도현이, 한국문학/한류의 거대한 주춧돌을 놓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시인' 김지하를 패대기 치겠다고 설친다.

    11월29일 안도현은 김지하에 대해 “1990년대에 들면서 문학적, 미학적으로 긴장감(=창의성의 원천)이 많이 떨어졌다”라며 “김지하의 박근혜 지지는 오판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적, 미학적 긴장감?

    그런 이상야릇한 말은 없다.
    [문학과 미학에서 성과를 내게 만들어 주는 정신적 긴장]이 있을 뿐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해 보자.

    “김지하가 이제 한 물 가서, 정신적 긴장이 게게 풀려 문학과 미학이 안 되니까, 늙으막에, 박근혜를 지지하는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김지하라는 큰 인물에 대해 이 같은 주장을 하려면 첫째, 김지하의 정신적 긴장이 소진되었다고 보는 근거를 대야 하고, 둘째, 박근혜 지지가 왜 오판인가, 그 논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안도현은 아무런 근거와 논지를 내놓지 않았다.

    라디오 인터뷰여서 못 내놨다고?
    그렇다면 어딘가에 [안도현의 김지하 비판]이라는 소논문 혹은 에세이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김지하를 까려면 제대로 까라.
    매끄러운 말솜씨로 슬쩍슬쩍 칼집만 내는 비열한 짓은 이제 그만!



    1. 싸구려 죄책감/연민을 파는 문학 브로커


  • 우선 안도현의 정신세계—그에게 조금이라도 ‘정신’머리가 있다면 말이다—를 잠시 살펴보자.

    아무 근거 없이 김지하를 매도하는 무도무례(無道無禮)를 저지르려면, 우선 그 정신이 지극한(?) 경지에 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도현의 문학은 [싸구려 죄책감/연민의 상품화]에 지나지 않으며, 그 정신은 [연탄 콤플렉스]에 다름 아니다.

    그는 싸구려 죄책감/연민을 파는 문학 브로커일 뿐이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근거와 논지를 제시하겠다.

    안도현은 아무 근거/논지 없이 김지하를 짓밟지만, 나는 근거/논지를 칼날 삼아 안도현을 갈갈이 찢어 해체한다.
    그는 무도무례 한 사람이고, 나는 살기(殺氣) 그득한 도살자(屠殺者)이다.

    안도현의 대표작 2편은 모두 연탄을 모티브로 삼았다.

    하나는 <연탄 한 장>.
    다른 하나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

    그래서 나는 그를 ‘[연탄 콤플렉스] 덩어리’라고 부른다.

    잠시 살펴 보자.

    우선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뜩선뜩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 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을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지


    무슨 죄책감이 이리도 많은가?
    무슨 죄책감을 이리도 조잡하게, 남에게 강제하는가?

    안도현은 실력으로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그 시가 종친초(종북, 친북, 떼촛불 혼합체) 문화권력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다.
    그는 애초, 종친초 문화권력이 띄워낸 3류 시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는 거의 화장실 낙서 수준이다.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었던
    저 연탄재를 누가 발로 함부로 찰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버리고 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  진실로 뜨거운 사람이었던가?

    전교조 건물 화장실 벽에 끄적거려 놓으면 딱 좋은 시다.
    사람들에게 막연한 죄책감/연민을 강매한다.

    죄책감과 연민을 억지로 퍼뜨리는 것—이것이 종친초 문화권력의 선동 전술이다.

    이런 식의 메시지.

    “그 때 그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희생당하고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세상을 뒤집어 엎어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
    죄책감 자체가 정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은 수치스런 나라이고 민족의 정통성은 평양에 있다”고 믿는 친북자학사관의 대변인 한홍구가 쓴 김일성 관련 에세이들은 이런 메시지를 던진다.

    “김일성 장군께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시면서 일제에 대해 무장 투쟁을 하고 계셨을 때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요?
    해방 후에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이 수치스런 나라,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들은 일제 시대에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요?
    우리 사회의 할아버지들은, 소년 시절에는 일제의 군국소년이었고 청년시절에는 미국의 냉전용병이었고 장년시절에는 박정희의 병영국가 신민(臣民)이었지 않나요!
    이제 할배가 되어 북한에 대해 ‘전쟁불사’를 외치고 있지 않나요?
    아! 저주받은 대한민국!”


  • * 한홍구는 성공회대 역사학 교수로 <한겨레>에 종-친북사관을 선전-선동하고 박정희 전대통령을 상스런 육두문자로 비난하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이른바 민중화가 홍성담의 상스러운 박근혜 출산 그림 전시회 주최측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편집자 주]

특히 한홍구처럼 엉뚱한 일—김일성을 따라 보급투쟁(마적질)을 하지 못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 인생을 망치고 사회를 위태롭게 만들게 된다.

그래서 ‘철의 여인’ 대처(Thatcher)는 이렇게 말했다.

집단적으로 전염된 죄책감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축적되면, 나라를 망가뜨리는 위험한 정치적 주장이 나오게 된다.


정치적 선동을 위해 죄책감/연민을 사용하려면 그 공격 타겟이 명확해야 하고, 그 표현이 절절해야 하며, 그 내밀한 속살이 약자(弱者)에 대한 가슴 빠개지는 공감(compassion)으로 승화되어 있어야 한다.


최고의 [죄책감/연민의 문학]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외국 문학에서는 19세기 러시아 문호 체호프(A. Chekov)의 단편소설 <반카>(Vanka)를 꼽고 싶다.

구두방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꼬마 ‘반카’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고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할아버지께 더 잘해 드릴 테니까 제발 오셔서 데려가 주세요…”

이런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우표도 붙이지 않고 봉투 겉면에 달랑 ‘할아버지께’라고 써서 우체통에 넣는다.
편지를 부칠 줄도 모르는 꼬마였던 것이다!

이 짧은 단편을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핑 돈다.

“아동노동만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일터에 보내는 대신에 학교로 보내면 부모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브라질 룰라(Lulla) 정책]“<반카>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우리 문학에서는 김지하의 <황톳길>(1970)을 [죄책감/연민의 문학]의 최고봉에 놓고 싶다.

    해방공간에서 좌익이었던 덕분에, 철삿줄에 묶여 테러를 당한 다음, 그 깔닥거리는 목숨이 가마니에 쌓여 버려진 ‘아버지’(=작품 속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연민]을 표현한다.

    너무 절절해서 [죄책감/연민]에 곧바로 전염된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5년, 이 시를 읽고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 했다.

    김지하가 이 시를 썼었던 1970년은 아직 우리 사회가 지독히 가난했던 시절이었고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다”라는 위기의식이 지식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시대였다.

    김지하의 <황톳길>은 소름 끼치도록 애절하게 당시의 시대적 고민을 선홍색으로 보여주고 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샆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든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 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안도현의 연탄 타령을 김지하의 [황톳길]과 비교해 보면, 안이 [싸구려 죄책감/연민]을 팔아먹기 위해 얼마나 지겨운 시를 써왔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안의 시는 싸구려다.
    가짜다.
    인기와 영향력을 탐하는 장삿속이다.

    안의 지겨운 시가 떠받들여 졌던 것은 오직 [종친초 문화권력] 덕분이다.

    안도현 [종친초(종북, 친북, 떼촛불의 혼합체) 문화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싸구려 [죄책감/연민 알약]을 제조했다.
    김지하
    [박정희 권위주의 체제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각오]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안도은 문학 브로커 질로 돈과 영향력을 누렸다.
    김지하는 예술적 승화 덕분에 고문과 감옥을 겪었다.

    그런 안도현이 아무 근거와 논지 없이 ‘김지하가 이제 한 물 가서, 정신적 긴장이 게게 풀려 문학과 미학이 안 되니까, 늙으막에, 박근혜를 지지하는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라는 취지의 극언을 한다.

    안도현은 자신의 대표작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탄재를 함부로 걷어차지 마. 너는 평생 동안, 누구 한 사람, 따듯하게 해 준 적 있어?”

    나는 안도현에게 말해주고 싶다.

    “김지하를 함부로 칼질하지 마.
    너는 평생 동안, 목숨 걸고 싸워본 적 있어?
    한국문학/한류를 위해 소중한 자산(=판소리, 탈춤, 마당극, 전통 리듬)을 부활/발전시켜 본 적 있어?”


    안도현의 눈에는, 김지하는 연탄재보다 못 한 존재인가?

    그럴 것이다.
    [연탄 콤플렉스]
    에 걸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연탄재보다 못 한 존재로 보는 법이다.

    인간보다 연탄재를 더 존중하고, 인간보다 연탄재를 더 사랑하는 자—이게 바로 안도현의 황폐한, 물신숭배(物神崇拜, fetishism)에 물든 깡통진보 멘탈이다.



    2. 안도현, 당신이 [정신의 긴장]을 알아?


    안도현은 김지하에 대해 [1990년대 이후 문학적, 미학적 긴장이 풀렸다]고 말한다.

    이 자못 멋 잇게 들리는 말 역시 브로커의 구라에 지나지 않는다.

    왜?
    ‘긴장’이란 말의 미학적, 도덕철학적 본뜻과 전혀 다른 문맥에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에서 ‘긴장’(tension)이란 단어는 흔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

    그런데 니체(Nietzsche)가 이 단어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했다.
    1885년 실스마리아(Sils-Maria)에서 쓴 명문—<선과 악을 넘어서>의 서문—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안도현!
    좀 길지만 고스란히 번역해 주마.
    잘 배워서, 다음부터는 ‘긴장’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도록!

    그러나 플라톤에 대한 투쟁, (혹은 요즘 풍조를 따라 ‘인민을 위해’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2천년 동안 유럽을 지배해 온 기독교가 행사하고 있는 사상/정신/문화적 압력에 대한 투쟁은—(기독교야 말로 ‘인민을 위한, 인민 버전의’ 플라톤 철학, 아닌가!)—이제껏 지구에 존재한 적 없는 거대한 [정신적 긴장]을 만들어 냈다.

    정신을 활에 비유하자면, 이 정도 긴장에 담긴 에너지라면 무지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과녁까지 화살을 날려 보낼 수도 있다. 지금 유럽사람들은 이 [긴장]을 고통으로 느끼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두 번의 시도가 있었다.

    하나는 가톨릭 제수이트(Jesuit) 사상.
    다른 하나는 민주 제도를 옹호하는 계몽주의 흐름.

    이 중 계몽주의는, 인쇄 출판의 자유와 신문의 보급에 힘 입어, (모든 것에 시들하고 우울한 색채를 덧칠함으로써) 인간 정신이 더 이상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 냈다.

    (아, 그러나! 인간 정신은 갈망 그 자체 아닌가! 정신이 스스로의 본질—갈망 에너지라는 본질—을 깨닫지 못 하는 시대! 독일인들은 유럽에서 화약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독일인들은 인쇄술을 만들어 냄으로써 또 한 번 위대한 발명을 이룩했다. ‘위대한 독일’ 만세닷!)

    그러나 우리는 제수이트 파(派)도, 민주 체제 지지자도 아니고 ‘순종’ 독일인도 아니다. 우리는 ‘선량한’ 유럽인들이며 자유스런 영혼 아닌가!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직 ‘갈망하는 정신’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직 2천년 동아 쌓여 온 [활의 긴장]이 고스란히 유지되어 있다. 그리고 어쩌면 화살도 있을 지 모른다. 어쩌면 성취해 내야 할 과업도 있을 지 모른다. 아,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목표(과녁)도 있을 지 모른다….



    [긴장]은 갈망이다.

    “인간 정신은 마땅히 [긴장] 즉 갈망 그 자체이어야 한다”—이는 니체 도덕철학(“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삶은 어떤 프로세스인가?”라는 화두에 관한 철학)의 핵심이다.

    니체야말로 [긴장](갈망)을 인간 실존의 근원적 조건으로 명확하게 규정한 첫 사상가이다.

    니체에게 [긴장]—갈망은 에너지이고 화살을 쏘아내는 힘을 뜻한다.

    니체가 ‘화살’, ‘목표’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인간 정신은 마땅히 [긴장]—갈망—이어야 한다”라는 끔직한, 그러나 동시에 황홀한 진실을 뜻한다.


    인간 실존에게 [긴장], 갈망, 화살, 과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니체의 이야기 두 가지 예만 더 들어 보자.

    첫째, <우상의 황혼> 첫 부분의 제목 자체가 “좌우명과 화살”이다.
    니체는 여기에서 마흔 네 개의 좌우명을 썼는데, 이 하나 하나는 실은 화살이다.

    마지막 좌우명은 이렇다.

    행복에 이르는 내 방식의 길은?
    명확한 ‘네’.
    명확한 ‘아니오’.
    과감하게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직선 궤적. 


    둘째, <적(敵)그리스도> 첫 꼭지의 마지막 부분 역시 갈망과 과녁을 이야기한다.

    요즘 세상이 떠드는 미덕을 따르며 사느니 차라리 얼음 속에서 사는 편이 낫다.

    우리는 용감해져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가차없는 비판을 들이대야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는 이 [용기](=진실을 받아들이고 옹호하는 용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울해졌고 운명주의자로 타락했었다.

    운명이라고?
    넘쳐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런데 그 힘이 뻗치지 못 한 채 막혀 있다는 것,
    그래서 [긴장]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 아닌가!

    우리는 번개와 행동을 [갈망]한다.
    비실거리는 놈들의 뜨듯 미지근한 행복 따위는 사양이다.
    점잔 떨며 한 발 빼는 것도 사양이다.

    아, 이 공기와 하늘에 폭풍우의 기운이 감돌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성정(性情)이 어둡게 변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 데에도 길이 없다!

    이런 세상에서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명확한 ‘네’. 명확한 ‘아니오’. 과감하게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직선 궤적—이것들이 바로 행복이다.

    니체는 인류 최초로 [긴장]과 갈망이야말로 인간 실존이며 창조 에너지라고 가르친 사람이다.

    썩은 [연탄재 콤플렉스] 덩어리인 안도현이 과연 ‘정신적 긴장’이 무엇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없다.
    ‘정신적 긴장’은 진실을 향해 [지금의 나]를 넘어서기(going-over)해서 용맹정진하는 것을 뜻한다.
    정신 자신을 해부대상으로 삼아 해부용 메스를 들이대어 가르고 또 가르며 파고드는 정신—이것이 ‘정신적 긴장’이다.

    니체(Nietzsche)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들은 미덕을 아무리 잘 실천해도 인민과 혈통이 같아.
    침침한 눈을 가진 인민과 혈통이 같아.
    정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민과 혈통이 같지.

    정신은 생명을 가르고 파고드는 또 하나의 생명이지.
    그래서 정신이 지식을 넓힐 때마다 고통이 뒤따르지.
    당신들, 그거 몰랐었지?

    정신의 행복은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기름을 바르고 눈물로 씻어져서 성스럽게 되는 데 있어.
    당신들, 그거 몰랐었지? (중략)

    당신들이 아는 건 정신이 아니야.
    정신에서 튀는 불똥만 알 뿐이지.
    정신은 모루이며 망치야.
    망치로 사정없이 모루를 내리치는 게 바로 정신이야!(중략)

    게다가 한 번이라도 정신을 감히 눈 더미 속에 파묻어 본 적 없잖아?
    그렇게 하려면 정신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어야 하는데!
    당신들의 정신은 뜨뜻미지근하지도 않잖아!
    그러니 당연히 정신이 차가워질 때의 황홀한 느낌도 모르겠지.


    안도현이 어떤 이상야릇한 ‘긴장’ 속에서 사는 존재인지, 그 자신의 말을 빌어 해체해 보자.

    시퍼런 날을 들이대 가죽을 홀랑 벗기면 벌건 근육과 핏줄이 나오기 마련이다.
    안도현은 이번에 정치 투기판에 뛰어 들며 이렇게 말했다.

    “서민들의 골목상권을 무너뜨리고, 민간인 사찰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4대강 삽질로 산하를 무너뜨리고, 용산참사로 세입자들의 둥지를 무너뜨리고…울화가 치밀었다.

    문학은 세상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연애편지보다 정권교체가 더 절실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지난 날이었다"


    하나씩 까보자.

    ■ 첫째, 정부가 골목상권을 무너뜨렸나?

    정직하게 말하자.
    인구의 80% 이상이 아파트에서 사는 나라다.

    아파트에는 ‘골목’이 아니라 ‘상가’ 밖에 없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골목상권을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깔끔하고 수준 높은 것을 선호한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자유민주주의이다.
    기업의 투자와 활동을 제약할 때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최근 파리바께트 신규 진출을 제한하니까 독립 빵집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뚤레쥬르만 늘어났다.
    풍선효과다.

    자칭 시인이라는 자가, 정치 투기판에 뛰어들며 꼽은 첫번 째 이유가 파리바께뜨인가?

    이런 것을 두고 ‘골이 비고 환장한 상태’라고 부른다. 

    뱀발: 나는 지은 지 40년 된 단독주택에서 산다. 집안엔 온통 개 오줌과 개털 투성이. 항상 이것저것 손 볼 일이 많아 ‘집’의 또다른 이름은 ‘주말 노동수용소’이다. 최근에는 옹상한 구석에 뚫려 있는 쥐구멍을 틀어막다가 망치로 손가락을 쳐서 손톱이 빠졌다. 쥐 사냥을 시작해서 완샷에 여덟 마리를 잡았다. 요즘 세상 풍조로 보면, 내가 사는 공간은 ‘사람 사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안티크’에 가깝다. 그래도 나는 깔끔한 아파트보다 이런 곳을 좋아한다. 평생 동안, 스카이라인이 낮은, 재래시장, 담배가게, 복덕방이 얽혀 있는 서울 북촌 ‘골목’ 지역에서 살고 있다. 나야말로 골목 상권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이다.


    둘째, 민간인 사찰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고?

    이 무슨 호들갑인가?
    그 민간인들이 보통사람들인가?
    힘깨나 쓰고 방귀깨나 뀌는 사람들—범털이 태반이다.

    이 사람들 모니터링 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었다.
    DJ, 노무현 정부에서도 엄청 했다.
    까닥 선을 넘으면 불법이 되는 일이며 결코 자랑할 짓이 못 되지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극악한 행위’는 아니다.

    정치 투기판에 나설 이유가 오죽 없었으면 두 번째로 꼽은 게 기껏 범털 모니터링인가?


    셋째, 4대강 삽질로 산하를 무너뜨렸다고?

    4대강에 대해선 게거품 물 일이 하나도 없다.
    4대강 안했으면 올해 가뭄과 홍수로 작살났다.

    안도현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하천 자연생태계’라는 것은 실은 강바닥의 썩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다.
    쓰레기를 모아 놓으면 자연생태계가 되나?

    차라리 인천 검단 수도권쓰레기 매립장에 가서 자연생태계를 찾도록!


    넷째, 용산 참사로 세입자의 둥지를 무너뜨렸다고?

  • 오래 전에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세입자 보상이 끝난 일이다.
    전철연인가 뭔가 하는 꾼들이, 보상 끝난 지역에 다시 들어와서 자칭 ‘세입자’로 신분을 바꾼 다음에, 대로 변에 망루를 짓고 보도에 화염병을 던졌다.

    경찰이 진압하자 그 중 한 명이 화염병 던져서 경찰과 자기 멤버 중 일부를 방화-살인한 사건이다.

    영안실을 차려 놓은 한남동 순천향 병원을 몇 달 동안 깔아 뭉개서 병원 경영을 박살낸 사건이다.

     

    안도현이 정치 투기판에 뛰어 들며 꼽은 4가지 이유란 공허한 엉터리 명분 지나지 않는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도록. 이렇게!

    “제가 평생 지은 글이란 게 사실, 야리야리한 감상으로 포장한 죄책감/연민 알약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알약을 장기 복용하면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이 많이 생겨요.
    그래서 종친초 문화권력이 저를 띄워 줬었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니까 그 짓도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정치 투기판에 뛰어 들었습니다.
    좀 어어삐 여겨 주십쇼.”




    3. 정신분열인가? 무당인가?


    안도현!

    김지하가 겪고 있는 정신적 긴장이 어떤 것인지 말해 줄 테니까, 귓구멍 뚫고 잘 듣도록!
    아, 고막 상할 까봐 걱정이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극도의 긴장 속에 놓인]
    인간 정신이 만들어내는 새된 비명을 듣지 못 하는 고막 따위는 터져 나가도 그만이다.
    이왕이면 송곳이나 드릴로 왕창 뚫어버리도록.

    김지하의 김지하 본인에 관한 투쟁에 비하면, 그의 저항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현대의학의용어로 표현하면, ‘만성적 정신분열’과 싸워서 극복해 낸 사람이다.

    세상을 한없이 투명하게 통찰하는 여리고 순수한 감수성 덕분에,
    또한 고문과 수감 덕분에,
    또한 종북 세력의 암살음모 덕분에,
    그의 정신분열은 더욱 더 심각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뱀발: 종북 세력이 김지하를 죽이거나 혹은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 놓고 이를 박정희 정부에 뒤집에 씌우려고 시도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김지하 본인과 그 부인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 같은 악성 정신분열을 극복하려면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 존 내쉬의 일생을 그린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보면, 얼마나 지독한 긴장 속에서 살고 있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정신분열에 걸린 천재 수학자가 자신의 힘으로 정상성을 회복한 인간 승리를 다룬다.
    그는 늙어서도 환각과 환청에 시달려서 매 순간 자신의 감각경험(sensory perception)이 현실인가 아닌가를 검증하며 살았다.
    예순 여섯 때에 노벨재단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선생님께서 노벨상을 받게 되셨습니다”라고 통보받자, 옆에 있던 학생에게 “이 사람, 진짜야 아니면 환각이야?”라고 묻는 장면은 영화의 하일라이트 중 하나이다.

    안도현은, 이런 위대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긴장이 떨어졌다’고 극언을 한다.

    김지하는 그 존재 자체가 실존적 긴장이다.

    그래서 그가 한 소리 부르짖으면 산하가 울리는 게다.
    그의 부르짖음 속에는 호랑이 같은 맹수가 내는, 사람 귀에 들리지 않는 낮은 주파수의 울림이 깔려 있다.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안도현은, 김지하의 분열증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을까?

    일반 분열증 환자는 환각과 놀지만, 김지하는 귀신과 놀고 망자(亡者)와 희롱한다.

    남양주 두물머리 강변에 서면, 능욕당한 후 찢겨 죽은 여인 이이(李이(蝨))의 혼백을 만나고, 
    곤지암 옹기구이 터를 거닐면 최해월(崔海月)을 시신을 수습한 요섭(세례명 요셉)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서 김지하의 부르짖음에는 신기(神氣)귀기(鬼氣)가 혼합되어 있다.

     
    김지하는 무당이다.

    그의 여리고 예민한 영혼 속에서는 지난 120년 세월 동안 이 땅에서 살아간 무수한 사람들의 피, 땀, 성취, 억울함 전체에 대한 진오귀굿(영혼을 달래서 천도시키는 굿)이 진행되고 있다.

    하루 이틀 동안의 굿판이 아니다.
    1960년대 초 이후, 무려 반세기 동안 이어지고 있는 굿이다.

    김지하의 존재 자체가 굿판이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다.
    그 자신 매일 매 순간 이 운명을 직시하고 산다.

    그는 운명 그 자체가 된 사람, ‘운명적 존재’가 된 사람이다.

    운명 그 자체가 된 김지하를 향해 ‘정신적 긴장이 풀어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안도현.

    그의 귀에는, 김지하의 영혼이 만들어내고 있는 떨림이 안 들린다.
    그의 눈에는 귀신, 망자와 희롱하고 있는 김지하의 몸짓이 보이지 않는다.

    귀가 있되 퇴화했고, 눈이 있되 썩었다.



    4.거대한  뿌리를 찾아서


    아무리 영험한 무당도 수 백명이 떼죽임(democide)을 당한 동굴(예를 들어 파주 태백단이 6.25 때 바닥 빨갱이들에 의해 죽임당한 곳) 같은 곳에서 진오귀굿을 하는 것은 꺼려한다.
    그 슬품과 원(怨)이 너무 강해서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지하는 우리 민족 전체의 120년 역사에 맺힌 사연들에 대해 50년 째 진오귀굿을 해 오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굿은 북한 전체주의 체제가 붕괴한 다음, 70년 세월 동안 지구 최악의 시스템 아래에서 신음해 온 사람들의 한과 원을 담아내는 것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둘 것이다.
    그 전에는 절대로,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내 눈에는 그의 운명이 보인다.

    왜 보이냐고?
    나는 무당이 아니지만 [망자(亡者)의 군대]가 보낸 전령(傳令, herald)이기 때문에. 

    [망자(亡者)의 군대]가 무엇이냐고?
    톨킨(A. Tolkien)이 지은 <반지의 제왕>에 나온다.
    싸움의 막바지에 [죽음의 계곡]에 뛰어나와 사우론의 제국을 쓸어 버린다.

    요즘 표현으로 바꾸면 ‘선배세대의 음덕(陰德)과 축복’이다.

     
    김지하는 무슨 재주로 이 처절한 굿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

    거대한 뿌리—민족 문화의 원형(原形, Archetype)들에서 그 에너지를 충진받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

    김지하의 일생을 관류(貫流)하고 있는 사명은, 문명을 통찰하고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조선의 사상/문화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에서 ‘원형’이라 함은 그 민족/문화로 하여금 생존하고 번영토록 만들어 온 를 뜻한다.

    문화의 뿌리다.
    거대한 뿌리다.

  • 젊은 시절 김지하는 김수영에 매료되었다.
    현란한 모더니스트였던 김수영은 시(詩) <거대한 뿌리>에서 이렇게 읊었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 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하던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연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 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지금 한강대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는 민족문화의 뿌리이다.

    “이 뿌리가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과 박정희의 [조국근대화]와 어긋났다”는 생각,
    —이것이 김지하가 평생 보듬어 온 화두이다.

    미국 문명, 서구 문명의 요체를 파악한 위대한 두 명의 지도자들—이승만과 박정희가 위로부터, 전격적으로 진행한 대한민국 건국과 조국근대화였기에...
    당연히 [거대한 뿌리]는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

    김지하는 위대한 문화인류학적 통찰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이 [거대한 뿌리]의 힘과 가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 민족문화의 원형들을 발견하려 두리번거리며 살아 왔다.
    그래서 죽어 나자빠져 있던 판소리, 탈춤, 마당극, 전통 리듬을 부활시켜 살려냈다.

    저항시인으로 뜨기 한참 전의 일이다.
    지금부터 거의 50년 전의 일이다.


    최근 김지하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선생님은 세상을 관찰하실 때 항상 아키타입(archetype)이 무엇인가를 보시는군요.
    언제부터 그런 사고방식과 관점을 가지셨어요?”

    ■  “음..글쎄…
    고등학교 때부터였던 것 같아.
    아, 물론 고등학교 때 마르크스주의 서적도 읽었지.
    우리 아버님께서 좌익이었으니까,
    아버지를 좀 이해하고 싶어서…

    하지만 세상을 볼 때에는 아치타입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그래서 대학 입학하고 제일 공들여서 공부한 게 피렌체(영어로 ‘플로렌스’—필자) 르네상스였어.
    모든 종류의 지식과 문화의 용광로였지.

    지금 서구 문명은 죄다 피렌체야.
    단테(Dante)가 피렌체잖아?
    모든 성스럽고 잡스러운 게 다 있었어.
    그가 지은 ‘신곡’(필자는 이를 ‘신의 코메디’라고 부른다)에 상욕이 몇 번 나오는지 알아?”

    “…”

    ■  “열 일곱 번이야.
    개쌍욕이 무려 열입곱 번이나 나와.
    크크”


    민족문화의 원형들—아키타입을 꿰뚫어 본다는 게 무엇인지 예를 하나 들어 보자. 


  • 김지하와 나누었던 대화이다.

    ■  “2002년 붉은 악마 말이야.
    재밌쟎아?
    해골바가지(치우의 탈)를 쓰고 붉은 옷을 입고 놀잖아.
    이게 뭘까?”

    “…”

    ■  “2008년 촛불 말이야…이건 또 뭘까?”

    “거짓선동으로 국민을 속여서 난동을 부린 것, 아닙니까?”

    ■  “물론 그렇지.
    하지만 거기 밑바닥엔 뭔가 다른 게 있어.
    뭔가 근본적인 것.

    자네도 아는 사람이지?
    전주(全州)의 천박사 말이야.
    내가 전화해서 물었어.

    붉은 악마와 촛불의 바닥에 있는 게 뭐요?라고 물었지.
    천박사도 나랑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씻김’이래…내 용어로는 ‘흰 그늘’..씻김이 뭔지 알아?”

    “…”

    ■  "발효야.
    처음엔 더럽고 잡스러워 보이지.

    그런데 나중엔 훌륭한 것이 돼. 

    춘향가 쑥대머리 알지?
    춘향이가 변사또에게 섹스를 거부하고 감옥에 갇히잖아.
    그때 이몽룡이가 짠~ 나타난 거야.
    상거지 꼬락서니를 하고. 춘향이가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
    절망의 나락이지.

    쑥대머리를 불러.
    그래서 처음은 캄캄한 절망이야.

    그런데 거기 한 줄기 빛이, 긍정이 생겨나.
    그래서 절망을 뚫고 올라와.

    이게 씻김이야..”


    씻김은 니체가 말하는 ‘비극의 아름다움’과 궤를 같이 한다.

    절망의 바닥에서 오히려, 삶을 총체적으로 긍정하는 자세.
    그래서 마침내 이렇게 외치는 것.

    “그게 삶이었어? 좋았어! 한 번 더!”

    니체는 이를 두고 [신성한 ‘네’](=신성한 긍정, The Sacred ‘Yes’)라고 불렀다.
    뒤집기의 예술이다.

    붉은 악마와 촛불(의 바닥)에서 발견한 것을 두고 김지하는 왜 ‘씻김’이라고 부를까?

    김지하는 붉은 악마와 촛불의 바닥수많은 시민의 신명 축제—에서,
    그 동안 소외되어 숨 죽여 왔던 이 [거대한 뿌리]가 마침내 근대문명을 보듬어 안고 되살아나는 것,
    —총체적 긍정, 곧 ‘씻김’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김지하 식 사고방식이다.

    그의 평생 화두는 [조선의 거대한 뿌리와 근대문명의 상생 화합]이다.

    김지하는, 이 상생 화합이 반드시, [거대한 뿌리](문화 유전자)가 간직해 온 [문화 아키타입](=예를 들어 ‘씻김’)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믿는다.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씻김, 즉 ‘흰 그늘’거대한 뿌리에서 나오는 독특한 아키타입(archetype)이다. 
    우리스러운, 너무나 우리스러운 [비극미](悲劇美)이다.

    서구 비극미 아치타입은 니체의 [신성한 네]이고, 우리 비극미의 아치타입은 쑥대머리의 씻김이다.




    5. 박근혜가 받는 기대 혹은 빚


    기대는 빚이다.
    부담스럽다.
    바가지 씌우기이다.

    이런 식이다.

    “당신은 이러이런 기대를 받을 만한 사람이야.
    그니깐 당신은 그 기대에 부합되도록 행동해야 돼.”


    김지하가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천만에!
    박근혜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는 중이다.
    박근혜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빚을 꿔 주고 있는 것이다.

    빚 주는 사람은 ‘상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빚을 받는 사람은 ‘상환 약속’을 마음에 지켜야 한다. 


  • 안도현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박근혜는 무엇이 달라도 다른 사람일 것]이라는 김지하의 말을 듣고 웃었다”

    안도현은 평생 남의 돈만 받아서 쓰고 살았나?
    담보도 재산도 없는 상대방에게, 덜렁 사람 하나 믿고 빚을 줘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경우엔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징조, 근거—‘감’—를 중시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김지하는 자기 나름대로 박근혜를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고민이다.

    “이 여자가 빚을 갚을 수 있을까?
    내가 기대하는 역할을 조금이라도 해 줄 수 있을까?”


    김지하는 박근혜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갈갈이 찢어진 국민을 보듬어 통합할 수 있는 여성]을 기대하고 있다.

    김지하에 의하면, 이런 여성을 동학(東學)에서는 ‘물의 우두머리’(水王)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합치어 내닫는 생명이 곧 물이다.

    동학은 여성, 어린이, 약자를 중시하며 그 중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김지하는 불교의 화엄(華嚴) 사상을 중시한다.
    어린아이들이 세상을 주유하면서, 당대의 ‘깨달은 사람’들을 차례로 찾아가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통해 참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신화로 구성해 놓은 것—이것이 화엄경이다.

    김지하는 이렇게 말한다.

    “화엄은 금강산을 근거지로 삼아 북한강을 타고 내려온 ‘중조선’(中朝鮮=한반도 허리부분) 불맥(佛脈)에서 중시하는 사상이다.
    지금 불교계에서 화엄을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조계종의 부활에 대해 살펴야 한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이승만은 “한국 불교의 뿌리는 조계종이며 조계종의 뿌리는 화엄경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제 시대 때에 왜색 대처승 불교에 장악되어 있던 전국의 거의 모든 사찰을, 물리력을 동원해서 일거에 접수하고 비구승을 대대적으로 확충하여 거의 어거지로 조계종을 부활시켰다.

    덕분에 초기 조계종 승려 중에는 도박, 섹스, 돈에 환장한 폭력배들이 상당히 많게 되었다.
    룸 살롱에 가서 웃통 벗고 여자 끼고 노래 부르는 ‘스님’의 상반신 전체가 야쿠자 문신으로 수놓아져 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나오게 된 까닭이다.

     
    화엄 사상을 중시하는 오리지날 중조선 사찰 중의 하나가 북한산 문수사 아닐까?

    금강산에서 이어지는 산맥이 끝나는 봉우리가 바로 북한산 문수봉이기 때문이다.
    그 발치에 조그마한 혹이 하나 있다.
    비봉.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가 서 있다.
    맑은 날이면 한강 하구와 개성 송악산과 인천 앞바다가 보이는 전략 요충지이다.
    이 전략 요충지를 뒷받침하는, 신라 때 지은 작은 사찰이 바로 문수사이다.

    이승만의 어머니가 이승만을 임신한 상태에서 이 절까지 꾸역꾸역 올라와서 기도를 올리고 내려갔던 것은 우연일까?

    흥미로운 가설을 하나 세울 수 있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 출신이다.
    금강산 부근에서 시작되는 멸악산맥이 끝나는 지점이다.

    산맥 이름이 특이하다.

    “악을 멸하다”(滅惡).

    그 옆의 조그맣게 가지친 산맥의 이름은 더 묘하다.

    “부처”(Buddha, 佛陀).

    이 지역에 중조선의 화엄 사상이 뿌리깊게 전해졌던 것 아닐까? 

    열여덟살 무렵까지 정통 한학(漢學)을 배웠던 이승만은 소년 시절에 고승(高僧)으로부터 화엄 사상의 본질—여성, 어린이, 약자를 존중해야 하며, 이들이 큰 깨달음을 향해 단번에 도약할 수 있다는 믿음—에 깊게 노출되었던 것 아닐까?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1950년대 초 전국의 거의 모든 사찰이 대처승 패밀리 비즈니스로 타락했던 시절에 어떤 사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조계의 본질은 화엄이다. 조선 불교의 본질은 조계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김지하 사상의 두 개의 뿌리는 동학화엄이다.

    이는 여성, 어린이, 약자를 존중하는 사상이며, “이들이야말로 단번에 커다란 깨달음을 향해 도약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김지하는 이 비전을 박근혜에게 투사(投射)하고 있다.
    박근혜가 조금이라도 이 비전에 부합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박근혜에게 엄청난 기대와 빚을 지우고 있는 셈이다.

     
    김지하의 이 같은 바램은 씻김, 흰그늘에 다름 아니다.

    “민족문화의 거대한 뿌리가 그 한(恨)을 승화시켜 근대문명을 오롯이 자신의 일부로서 동화시켜내는 과정을 완성시키고 싶다”는 숭고한 욕망이다.

    김지하 본인민족문화의 거대한 뿌리를 나타내는 이미지이다.
    박근혜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근대문명의 힘을 나타내는 이미지이다.

    김지하의 박근혜 지지는, [근대 문명을 자신의 일부로 소화해 낸 거대한 뿌리]를 완성하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에 다름 아니다.

     이는 씻김의 완성이며 흰그늘의 결정판이다. 



  • 박성현 저 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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