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白翎島는 西海상의 不沈의 海上要塞 
      
    李東馥    
      
     백령도(白翎島)를 다녀왔다. 6월28-29일 1박2일 코스. 필자가 고문으로 있는 자유민주연구학회(명예회장: 유동열 회장: 조영기)의 ‘안보현장 방문’ 행사에 참가한 것이다. 필자는 1998년 백령도를 다녀온 일이 있다. 이번의 백령도 방문은 그로부터 14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인천을 출항한 고속여객선 마린브릿지 호가 4시간반 동안 백령도를 향하여 항해하는 동안 필자의 상념(想念)을 사로잡은 생각은 백령도가 천안함 피침과 연평도 포격 등 서해(西海) 상에서 그동안 잇달았던 북한의 무력도발과 최근 격화일로를 걸어온 북한의 새로운 무력도발 위협으로 인하여 전운(戰雲)이 감돌고 위기감(危機感)이 지배하는 가운데 주민들이 극도의 불안감에 쫓기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작은 섬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발견한 백령도는 그 같은 필자의 상념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백령도 현지에는 안보 차원에서 필자가 걱정했던 그 같은 불안한 상황이 존재하지 않았다. 14년만에 다시 찾아간 백령도는 북한의 무력도발 위협 앞에서 더 이상 공포에 떠는 섬이 아니었다. 우선 군사적인 차원에서 대한민국의 “귀신 잡는 해병” ‘흑룡부대(黑龍部隊)’가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백령도는 이제 북한군의 어떠한 군사적 도발도 격퇴시킬 수 있는 ‘불침(不沈)’의 해상(海上) 마지노 요새(要塞)이자 북한군의 도발이 있을 경우 대안(對岸)인 장산반도(長山半島)의 북한군 연안(沿岸)포대 뿐 아니라 그 후방의 북한군 군사목표물까지 초토화(焦土化)시킬 수 있는 막강한 응징(膺懲) 화력(火力)을 완비한 ‘고슴도치’ 요새로 탈바꿈해 있었다.
     
     언론 보도는 북한군이 최근 상륙작전용 공기부양정(空氣浮揚艇)들을 백령도 대안의 장산반도 기지로 전진 배치했을 뿐 아니라 이 공기부양정을 이용하여 백령도 상륙작전을 가상(假想)한 상륙훈련을 실시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지만 백령도의 해병대는 이에 대해서도 완벽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우선 백령도 대안 장산반도의 기지에 전개되어 있는 북한군 공기부양정의 동태(動態)에 대해 우리 군은 최근 새로이 설치된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예하의 해-공군 협동으로 공중과 해상에서 그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완벽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이들 공기부양정을 이용한 기습 상륙작전을 전개할 경우에 대비하여 우리 군은 백령도에 ‘코브라’ 공격용 헬리콥터를 배치하고 있었다. 장산반도 기지를 출항한 북한군 공기부양정이 백령도에 도착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16분, 이에 대하여 ‘코브라’ 헬기기 요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2분, 결국 북한군 공기부양정은 백령도에 도달하기 위하여 건너야 될 장산해협의 북측 수역을 벗어나기도 전에 우리 군의 ‘코브라’ 헬기에 의하여 모두 격침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북측의 공기부양정은 대부분 노휴화되어 훈련작전 때면 그 상당수가 고장을 일으켜 훈련 참가를 포기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군은 파악하고 있었다.
     
     육상(陸上)의 백령도는 섬의 상당 부분이 지하로 요새화되어 있었다. 백령도의 지하 요새는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위대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재발견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징표(徵標)였다. 안내하는 ‘흑룡부대’ 장교의 설명에 의하면, 토목공사의 경우, 백령도의 지하 요새는 그 대부분이 이미 1970년대에 고 박 대통령의 지시로 진행되어 완성되어 있었다. 고 박 대통령은 대만(臺灣)의 금문도(金門島)를 모방(模倣)하여 백령도도 지하로 요새화 할 것을 지시하여 이에 따라 지하 요새 구축공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백령도의 지하 요새는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이끈 좌파(左派) 정부 시기 방치되어 폐허(廢墟)로 변모했던 것을 최근 대대적인 복구(復舊) 및 현대화 공사를 통하여 이제는 일조유사시(一朝有事時) 이 섬의 방어 병력 대부분이 북한군의 포격 사정권(射程圈) 밖에서 방어 작전을 수행할 뿐 아니라 주민 대다수도 수용할 수 있는 현대화된 지하 요새로 재탄생(再誕生)해 있었다.
     
     지금의 백령도는 서해 상에 위풍당당하게 떠 있는 대한민국의 ‘불침의 항공모함’이다. 북한의 끝없이 증폭되는 무력도발 위협에도 불구하고 백령도에는 많은 뭍사람들이 생각하는 공황(恐惶), 즉 패닉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백령도에는 최근 간척 공사로 무려 백만 평의 농지가 새로 생겨서, 특히 벼농사의 경우, 섬 주민들의 완전한 자급자족을 달성할 뿐 아니라 이 섬에 주둔하는 군 장병의 주곡은 완전히 백령도 쌀로 충당하고 있었고 섬 자체의 화력발전소를 가동하고 있다.
     
     그런데, 백령도에 관하여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당초에는 북측 지역이었던 백령도는 6.25 개전 초기 유엔군 해군에 의하여 점령되었지만 한 때 북한군이 역습하여 일시적으로 이를 재점령했던 기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이 섬의 원주민들로부터 이때 북한군은 당시 백령도 주민 2만여 명 가운데 4,400여 명의 청년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했다는 놀라운 증언이 채집(採集)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엄청난 사실이 어찌 된 영문인지 밖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백령도의 지금 민간인 인구는 5천여 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때 4,400여 명이 일시에 학살되었다는 것도 좀처럼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섬 주민들의 설명에 의하면, 6.25 당시 백령도 주민은 2만여 명이었고 그 뒤 인구는 더욱 늘어나서 1970년대에는 한때 3만5천여 명에 이르렀으나 그 뒤 특히 청년 중심으로 도서 주민들의 육지로의 이탈이 늘어나면서 오늘의 인구로 감소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도서 주민들의 이탈 현상을 비유적으로 설명해 주는 말이 있었다. “백령도에는 처녀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이에 대한 섬사람의 대답이 재미있었다. “전에는 이 섬에는 농사짓고 고기 잡는 일 이외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특히 처녀들의 경우 고등학교만 나오면 거의 전원 육지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섬에는 처녀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백령도에서는 1893년 남한 땅에서는 전국 두 번째로 세워진 ‘중화동 교회’가 ‘교회역사관’ 및 교회 입구의 수령(樹齡) 520년을 자랑하는 무궁화나무와 함께 또한방문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이 교회에는 한반도에 기독교의 복음을 최초로 전한 초기 선교사 중의 한 분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창설한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Underwood) 선교사가 1900년에 방문하여 설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