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연대 병사들이 지친 모습으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고지를 점령한 적은 산발적으로 미군 포병진지를 향해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대대장을 불러 세웠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병사들이 주야의 격전에 지친 데다 고지에 급식이 끊겨 이틀째 물 한 모금 먹지 못했습니다.”

    후퇴하는 병사들 앞으로 달려갔다.

  • ▲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뉴데일리
    ▲ 한국전쟁 영웅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뉴데일리

    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후퇴하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 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부대에 돌격 명령을 내리고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병사들의 함성이 골짜기를 진동했다.

    대한민국 육군 대장 백선엽. 창군 때부터 군에 몸을 던져 1960년 예편하기까지 17년. 그 동안 백 장군은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피와 땀으로 지켜냈다. 그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전쟁의 영웅이었고, 정작 한국에서는 잊혀진 혹은 잊으려하는 6.25의 생생한 증인이다.

    용산전쟁기념관 4층 집무실에서 만난 백선엽 대장은 짙은 회색 정장에 하늘색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차림이었다. 올해 89세. 하지만 어깨에 빛나는 별만 없을 뿐, 육군 대장의 위풍은 온 몸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59년 전 6월은 어떤 모습일까?

    “6.25는 철저하게 우리가 선제공격을 당한 겁니다. 전쟁 발발 전 김일성은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 준비 완료’를 보고했어요. 스탈린이 ‘이승만 뒤에 미국이 있는데 성공하겠냐’고 물으니 김일성이 ‘남한에 박헌영이 이끄는 20만 남로당원이 있어 우리가 공격하면 호응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김일성은 중국에도 달려가 모택동에게도 남침 허락을 받았습니다. 북한은 당시 탱크 300대, 전투기 200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대포도 1200문이나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20개 사단을 소련 군사고문단 3000명이 훈련시켰습니다. 우리는 탱크도 전투기도 없었어요. 그러니 당할 수밖에요. 6·25전쟁을 북한하고 한 전쟁인 줄 아는데 아닙니다. 1950년 첫해를 제외하고 나머지 2~3년 동안 김일성은 보조 역할밖에 못했습니다. 6·25는 김일성과의 전쟁 그리고 중공군과의 전쟁, 이렇게 2개의 전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스탈린은 무기를 줬고, 모택동은 200만 명이란 대병력을 북한에 제공했습니다“

    개전 초기의 전황은 처참했다. 북한 탱크에 대항해 병사들은 수류탄을 안고 탱크에 달려들었다. 한강에서 흩어진 병사들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모르게 속속 마지막 방어선인 낙동강으로 원대를 찾아 복귀했다. 장비에 밀린 후퇴였지만 목숨을 던져 조국을 지키겠다는 병사들의 정신은 결코 북에 밀리지 않았다. 쓰러진 병사들의 공백을 책을 내던지고 달려온 학도병들이 채웠다. 변변히 소총 다루는 법도 익히지 못한 학도병들은 이름모를 무명고지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산화했다.

    기독교 신자이지만 기도를 안하던 백 장군은 이 때 다부동에서 단 한 번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번만 도와주세요.”라고.
     
    그리고 그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은 통일을 염원한 북진에 나선다. 역사적인 평양 점령을 앞둔 10월15일. 당시 1사단장이던 백 장군은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듣는다. 평양 공격에 국군 부대가 제외되었다는 것. 터무니없이 부족한 기동력이 문제였다. 밀번 미 1군단장을 찾은 백 장군은 눈물로 호소했다. 밤낮으로 걸어서라도 갈테니 평양 공격에 한국군 부대를 참가시켜 달라고. 밀번 군단장은 백 장군의 호소에 감동해 선뜻 요청을 수락했다. 작전 개시 직전 주공(主攻)부대를 바꾼 첫 번째 경우였다. 그것도 자신의 지휘 아래 있지만 국적이 다른 부대를 내세운 파격이었다.

    “임진강 전투 이후 쓰라린 후퇴를 거듭해온 전우들, 그리고 전사한 전우들의 명예를 위해서도 꼭 평양 공격에 참가해야 했다”고 백 장군은 회고했다. 그리고 그의 1사단은 ‘트럭보다 빨리 뛰어’ 가장 빨리 평양에 도착, 적도 평양을 탈환했다.

    백 장군에게 평양 대동강은 남다른 기억의 장소였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인 백 대장은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었다. 먹고 살기위해 찾은 도시가 평양. 그래도 생활이 어려워 백 대장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이끌고 대동강 강가에 나가 가족 모두 자살을 하려 했다고 한다. 그때 백 대장의 누님이 “나무도 심고 3년은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는 평양에 온 지 1년 밖에 안됐다. 2년만 더 견뎌보자”고 어머님을 설득해 다시 돌아온 아픈 기억의 평양이었다.

    숱한 고비마다 승리로 장식한 백선엽 장군은 1953년 1월 31일 33세의 나이에 한국군 최초이자 최연소 대장이 됐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자네 이번에 첫 번째 대장이 됐는데 옛날엔 임금만 대장이고, 신하 중엔 대장이 없었다. 우리는 이제 리퍼블릭(republic·공화국)이니까 그거나 알게’ 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그에게 6·25는 일생 최고의 토픽(topic)이었다. 그리고 자신만 아니라 한국국민 모두가 잊어선 안 될 상처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 ▲ 백 장군의 전공은 국내에서보다 6.25 참전 외국에서 더 유명하다. 방한한 조지 부시 전 미국대통령과 악수하는 백 장군 ⓒ백선엽 장군 제공
    ▲ 백 장군의 전공은 국내에서보다 6.25 참전 외국에서 더 유명하다. 방한한 조지 부시 전 미국대통령과 악수하는 백 장군 ⓒ백선엽 장군 제공

    “북한이 경제난 때문에 도발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김정일이 다른 데는 안가도 군대는 꼭 순시하잖아요? 북한은 선군(先軍)정치를 통해 전시 국가 총동원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에 맞서 휴전선에서 북한과 대치하면서 24시간 경계태세에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점을 우리가 잊어선 안 되고 경각심을 갖고 북의 행동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협박을 계속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국민은 무사태평인 것 같아 안쓰럽다고 말했다.

    “좌파정권 10년 동안 국민 안보의식이 많이 약해졌어요. 큰일입니다. 북한은 공산당 헌장에 적화통일을 명시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남한을 무력으로 정복하려는 목표를 단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백 장군은 “북한의 핵위협을 일단 미국 핵우산이 막아주겠지만 그것도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바른 의식을 일깨워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고령에도 건강을 돌보지 않고 외부 강연이나 강의 초청을 사양하는 법이 없다. 지난달에는 전북 익산까지 달려가 원광대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기도 했다.

    “요즘 6·25를 모르는 젊은 세대들이 많다고 해요. 기성세대들 잘못입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교육이 엎치락뒤치락하니까 정말 바로 알아야할 우리 역사도 왜곡되게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바로 알려줘야 합니다. 교과서에도 자세히 싣고. 북한에선 아침부터 밤까지 사상교육을 시킵니다. 이대로 나가면 큰일 나요.”

    백 장군은 같은 차원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이하 전작권) 이양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전시작전통제권은 장차는 우리가 행사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정세가 유동적이고 우리가 져야 할 예산 부담이 너무 큽니다. 지금 우리는 휴전상태입니다. 즉 전쟁이 끝나지 않은, 잠시 쉬고 있는 상태인데 절대 무리를 해서는 안됩니다. 전작권을 가져오면 자주국방이 되는 것처럼 보는데 한국이 자주국방을 할 능력이 있느냐는 점에는 무리가 있어요"

    백 장군은 “전작권은 시기를 봐가며 다시 논의할 사항”이라며 "지금 군 원로들을 중심으로 1000만인 서명운동을 하고 있어요. 정부가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고 강조했다. “안보에는 ‘설마’가 없는 법”이라고 덧붙였다.

    좌파정권 10년간 정작 그의 증언이, 교훈이 필요한 군부대는 어느 한 곳 그에게 강연을 요청하지 않았다. 되레 참전국인 미국에서 캐나다에서 그를 초청했고, 진정한 영웅으로 대접했다.

    백 장군의 육성은 지난 3월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 국립보병박물관에 영구 보존됐다. 미 보병재단 제리 화이트(예비역 소장) 회장이 백 장군에게 “백 장군의 생생한 전투 경험담을 직접 녹음해 달라”고 요청한 것에 따른 것. 백 장군은 외국 장교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박물관 개관식에 초청돼 미군이 참전했던 외국 격전지 10곳 중 한 곳인 다부동과 지평리 전적지의 흙을 뿌리는 행사에 참석했다. 주한미군은 백 장군 이름을 딴 ‘백선엽 어워드(award)’를 석달에 한번씩 모범 카투사(주한미국 지원 한국군병사)에게 수여하고 있다. 2005년엔 캐나다 정부가 백 장군에게 캐나다군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무공훈장(MSM: Meritorious Service Medal)을 수여했다. 한국이 대접하지 않는 한국 장군을 외국이 대접해 준 것이다.

    6·25 50주년이던 2000년 6월, 50주년 기념사업위원장을 맡고 있던 백 장군은 기가 막힌 일을 당했다. UN 참전용사 수천명을 초청했다. 이들 중엔 한국전에서 큰 부상을 당한 용사도 있었다. 모두 은인이었다.  행사 하일라이트로 용산전쟁기념관에서 남대문~시청 앞까지 용사들의 도보 행진을 계획했는데 정부에서 취소 지시가 내려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을 한 직후였다.

    “자신들이 피 흘려 지킨 나라가 이렇게 발전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백 장군은 “외국 참전 용사들의 얼굴을 차마 볼 낯이 없었다"고 아픈 기억을 되새겼다.

    미국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 장군인 그는, 맥아더 장군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 “누가 뭐래도 맥아더 원수는 한국인들의 은인입니다.” 맥아더 원수와는 한국전쟁 중에는 3번, 그리고 그가 은퇴한 뒤에는 계속 만나며 우의를 다졌다고 회고했다. “맥아더 원수는 이승만 대통령을 참 존경했어요. 숭배한다는 표현을 해도 무리가 안 될 겁니다.”

    맥아더 원수와 백 장군의 첫 만남은 1951년 3월18일 서울 만리동의 한 초등학교 교정에서였다.

  • ▲ 백 장군은 맥아더 원수와 전쟁후에도 만나 우의를 다졌다. ⓒ 뉴데일리
    ▲ 백 장군은 맥아더 원수와 전쟁후에도 만나 우의를 다졌다. ⓒ 뉴데일리

    “제너럴 백. 서울 재탈환을 축하합니다. 장병들의 급양(먹을 것과 입을 것)은 어떻습니까?” 예의 옥수수 파이프를 입에 문 맥아더 원수가 백 장군에게 말을 건넸다. 백 장군이 대답했다. “쌀은 충분합니다. 단지 야채와 감미품(과자류)이 부족합니다.” 맥아더 원수는 수행한 미 극동군사령부 경제국장 마켓 소장을 돌아봤다. “들었소?” 마켓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일본에서 전군이 5~6개월 먹을 수 있는 분량의 레이션이 날아왔다. 백 장군은 “그때 정말 큰 선물을 맥아더 원수에게 받았다”고 말했다.

    올 2월 국방부는 내년 6·25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의 하나로 ‘한국의 맥아더’인 백선엽 장군에게 한국 첫 명예 원수 추대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감회를 물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신의 일엔 소년처럼 수줍어하는 진정한 무인. 하지만 우리는 군인 아닌 한국 근대화의 주역으로서의 백 장군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전역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1969년 교통부장관으로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지휘했다. 그리고 1971년부터 충비(충남비료) 사장, 호남비료 사장, 한국종합화학 사장, 한국에타놀 사장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토대를 건설하고 발전을 일궈냈다. 재임 중 그가 건설한 공장만 14곳에 이른다. ‘중공업의 박태준, 중화학의 백선엽’ 쌍두마차가 한국 경제 근대화를 이끈 것이다.

    대담을 마치자 89세의 장군은 일행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전송했다. 돌아오는 길, 뉴스 전광판엔 ‘북한, 서해서 포사격 훈련 급증’이란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