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준 총 내려놓고 소련 볼셰비키 편에 서독립운동가들이 암살당할 때 '소련인'으로 안주
  • ▲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연합뉴스
    ▲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연합뉴스
    '봉오동 전투'로 유명한 홍범도(1868~1943)가 '자유시(自由市) 참변'을 방조한 공으로 레닌으로부터 표창까지 받은 사실이 알려져 역사학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가운데, MBC노동조합(3노조, 위원장 오정환)이 "편협한 민족사관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봐야 한다"며 "그가 항일독립운동을 한 것은 맞지만, 조국의 국민이 준 총을 내려놓고 볼셰비키군대로 활동했고, 자유시 참변에서 일찌감치 소련을 택해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는 칼럼 형식의 성명을 발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MBC노조는 1일 배포한 성명에서 "홍범도가 일제 치하의 간도 지방에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민족의 자존심을 드높이고 항일독립운동을 이끈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랑스러워하고 기억해야 할 일지만, 당시 세계사적인 흐름을 볼 때 결코 레닌의 소련은 우리 독립군을 민족주의 운동 지원과 민족국가 수립 차원에서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당시 레닌의 소련은 러시아 혁명 직후 '적백내전'에서 싸울 병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21년 우리 독립군을 끌어들인 것이었고, '무기를 반납하고 입국하라'는 소련의 요구를 거부한 김좌진·서일·이범석 부대는 만주로 돌아갔다"고 되짚은 MBC노조는 "반면 홍범도는 이들의 뜻대로 무기를 반납하고 입국해 소련 적군의 일원이 되는데, 자유시에 모인 한인 부대는 '상해파'라 불리는 사할린부대가 주도권을 잡다가 코민테른으로 군 권력이 넘어가면서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이 주도권을 잡게 됐다"고 당시 사정을 설명했다.

    MBC노조는 "홍범도는 당초 사할린 부대에 편입되어 있다가 소련 적군에 대항하지 않고 고려혁명군에 들어가 자유시 참변의 학살 현장인 수라세프카에는 가지 않았다"며 "자유시 참변으로 사망자가 4백명에서 6백명이라는 주장(출처: 간도지방 11개 단체 성토문/피해자 측 발표)과 사망자 36명, 도망자 34명, 행방불명 59명, 포로 864명이라는 주장(가해자 측 고려혁명군정의회 발표문)이 있지만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MBC노조는 "홍범도는 소련군 포로가 된 독립군 장병들의 재판에서 재판위원으로 참여했고, 이후 레닌을 만나 협조해준 것에 대해 치하를 받고 볼셰비키 당원증과 소련군 대위 직함, 그리고 권총과 금화를 하사 받았다"며 "반면 재판을 받은 5백명 가운데 428명은 죄수부대에 편입돼 우수문 벌목장에서 1년 이상 강제노동을 해야했고, 32명에게 징역형이 내려졌다"고 밝혔다.

    이후 "일본은 소련이 안정기에 접어든 1922년 연해주에서 철군했고, 연해주에 남은 홍범도의 군대는 필요 없게 돼 토사구팽당하게 됐다"며 "자유시 참변으로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게된 김좌진·김구 선생은 이를 계기로 반공주의 노선을 걷게 됐다"고 소개한 MBC노조는 "홍범도는 소련군에 순응해 평온한 여생을 보내며 천수를 누렸지만, 자유시 참변을 잊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은 테러단을 조직해 고려혁명군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MBC노조는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를 승리했지만 소련군에 스스로 편입돼 적백내전에서 볼세비키의 편에 서게 됐고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떠나 항일투쟁을 하거나 암살당할 때 소련인으로 안온한 삶을 살았다"며 "그의 자유시 참변 이후의 삶은 소련 귀화의 삶이었다. 그를 딱히 비난할 필요는 없지만 그를 우리 육군이 존경하고 귀감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