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과 대한민국 ❷
     UN의 길을 업신여긴 대한민국의 '옆길 外交史'

                                정 일 화(한미안보연구회 이사. 정치학 박사)
  • ▲ 정일화 박사
    ▲ 정일화 박사
<국제관계 어두워 식민지 나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식민지로 떨어진 과정은
일본의 한반도국제관계 봉쇄를 위한 치밀한 행위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청일전쟁(1894~5년)과 노일전쟁(1904~5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한반도로부터 물러가게 했고
영국과 미국은 조약 또는 협약이라는 편법외교를 통해 한반도지배의 묵시적 승인을 받았다.

 남의 나라 운명을 두고 제3국과의  전쟁이나 협약을 통해 침탈을 인정받는 다는 것은
법이론 상 원천적 무효에 해당하지만 일본인들은 그런 절차를 밟았기 때문에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반도 침탈의 최후 국제승인이라고 선전한 것은
미국과 맺은 소위 태프트-카츠라협약(1904년)이었다.
필리핀 여행을 하던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를 일본수상 카츠라가 식당에 초청하여 개인의견이라는 조건으로 진행한 긴 대화를 정리해 비밀협약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1941년 12월8일 일본이 미국을 적국으로 선포하고 진주만폭격을 감행함으로써
한반도침탈의 국제 논리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943년 12월 카이로에서 열린 연합국정상회담(미영중소)에서 연합국정상들은
카이로성명을 발표하고 일본의 한반도침탈은 폭력과 야욕(Violence and Greed)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무조건항복과 더불어 무효가 되며
한반도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독립이 될 것이라고 선언해
한반도국권회복이 국제적으로 보장되었다.

만일 당시 한국이 프랑스, 노르웨이, 스웨덴, 폴란드와 같은 망명정부를 갖고 있었다면
대한민국의 수립은 1945년 8월 15일로 이뤄졌을지 모른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책임있는 왕이나 관리들이 망명정부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9년후인 1919년 3월1일 거국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역시 인정받는 정부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상해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소재지인 중국(장개석정부)마저 임시정부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일본항복 후 대한민국 독립준비를 위한 주체가 되지 못했다.

일본패망이 눈앞에 닥아 오면서 독립주체가 없는 한반도는
다시 한반도 이해당사국의  비상한 관심 대상이 되었다.
일본제국주의가 물러간 자리에 중국,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이 제각기
유리한 한반도 운영을 위한 국제협상을 하려 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청일전쟁 노일전쟁에서 패한 보상으로
한반도를 자기네 영향권으로 들여놓기 위한 전후구상을 했다.
이해관계는 부딪쳤으며 결국 미-영-중-소는 얄타회담(1945년 2월)에서
어느 한 국가에게 한반도 우선권을 주지 않는 4대국 신탁통치를 한다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소련이 현실적으로 한반도 장악에 기선을 잡고 나섰다.

<한반도를 선점하는 발 빠른 소련>

미국이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하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기다리고 있던 시점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남진을 시작하여 빠르게 한반도군사점령에 들어갔다.
 미국은 8월9일 다시 나가사끼에 원폭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아직 무조건 항복은 없었다.
소련의 전쟁점령은 무섭게 진행되어 순식간에 한반도절반이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발표했을 때
일부 소련군은 개성 이남까지 탱크를 몰고 진출해 있었다. 
아직 미군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가장 가까운 부대가 오키나와 전투부대인 미24군단이었다.
아무리 빨리 기동해도 9월 초순까지는 한반도에 미군이 들어갈 수 없는 물리적 취약성을 계산한 미국 트루만 정부는 8월12일 소련의 스탈린에게 긴급전문을 보내
소련군이 38선 이남으로는 진군하지 말 것으로 권고했다.
당시 유능한 외교관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해리만(William Averell Harriman)주 모스크바대사가
이 전문을 들고 스탈린을 방문했으며 스탈린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38선 이남까지 내려온 일부 소련군도 모두 38선 이북으로 철수하도록 지시했다. 

 이북은 소련군점령사령부가 들어오자마자 즉각 공산정권을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남한은 미군 첫 선발대가 인천에 들어온 9월8일까지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그대로 남아있으면서 임기응변으로 정국을 지배하고 있었고 하지장군의 본 부대가 들어온 10월 초순에 이르러서야
 미군정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했다.

38선 이남은 한 달 간 주인 없는 혼란기를 겪었다.
한반도를 38선을 기준으로 반쪽씩 군사점령을 한 소련이나 미국은 하루아침에 분단된 한반도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련은 스탈린이 해리만의 전문을 적당히 어물거리기만 했었어도
한반도는 모두 공산점령이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고
미국은 일본이 8월 6일 히로시마원폭을 맞고 그대로 항복했더라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련과 미국은 38선문제 해결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열고 남북한대표가 포함된
임시과도정부를 수립하려했고, 모스크바외상회의에서 결정한 미영중소의 4개국 신탁통치를
실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 문제는 일본이 가장 골칫거리인 것 같이 보였지만
일본이 빠진 한반도 문제도 결코 해결이 쉽지 않았다. 

<유엔의 길이 최선의 선택>

혼란한 해방정국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던 미국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새로 설립된 국제연합(UN)으로 끌고 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모스크바 외상회의 결정이 있고 그 조약에 의해 설립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존재하는데
이런 국제조약의 틀을 벗어나 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일 명망 있는 국무장관이 된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같은 외교관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한국문제는 유엔총회로 넘어갔고 거기서 대한민국의 탄생이 이뤄지고
또 대한민국이 전쟁으로 넘어질 뻔 했을 때 유엔이 일어나 유엔군을 만들어 나라를 보존케 했다.

유엔이 대한민국정부를 세우고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한 것은
38선 이남의 정부를 계산에 두고 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1948년의 남북총선거를 거부한 지역에 불과하다.
남북 통일은 1948년에 선거를 실시하지 못한 북한지역이 자유롭고 평등한 선거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도 UN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결의해 놓고 있다.
대한민국은 UN이 최선의 선택으로 이뤄놓은 길을
업신여기면서 많은 헛된 길을 걸었다.
(jcolum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