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을 때려 친노를 놀래키고, 친노를 움직여 친박을 긴장시켜
  • "노련함은 DJ가 떠오르고, 날카로움은 한창 때의 노무현이 어른거린다."

    정치권에서 오고가던 평가처럼 '백면서생'이 아니었다. 사실상 대권행보를 시작한 반기문 UN사무총장이 내딛는 한발한발 발걸음에 한국 정치권이 휩쓸리고 있다.

    내년 4월 재보선쯤으로 봤던 등판 시기를 스스로 1년이나 당기면서 야권이 놀랐다. '충청 대망론'을 외치며 여권이 한창 기세를 올리려 하니 별안간 친노 최고 원로 이해찬과 티타임을 청했다. 여권에서는 '갸우뚱'하면서도 긴장하는 눈치다.

    저멀리 뉴욕에 떨어져 있는 반기문 사무총장이 '몇 마디 몇 발자국' 만으로 국내 정치권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정치력은 다시 한번 곱씹어 재평가 할 필요가 있다.

    MB정부 청와대에 근무했던 여권 고위관계자는 "반기문 총장 한 사람에 여권 뿐 아니라 야권까지 움직이고 있다"며 "반 총장은 인터넷 공간에서도 찬성과 반대가 극명하게 쏟아질 정도로 이제는 '현실 정치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라고 말했다.

    현 정부 청와대에 근무하는 한 관계자도 "반기문 총장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며 "반 총장이 움직이는 보폭이 국내 정치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많아 더 이목이 쏠리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29일 오후 안동 하회마을을 찾아 류왕근 하회마을 보존회장(왼쪽 네번째)으로 부터 마을유래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반총장 왼쪽 옆은 김관용 경북도지사.ⓒ경북도 제공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29일 오후 안동 하회마을을 찾아 류왕근 하회마을 보존회장(왼쪽 네번째)으로 부터 마을유래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반총장 왼쪽 옆은 김관용 경북도지사.ⓒ경북도 제공
    반 총장 행보의 특징은 '한 쪽을 때려, 반대쪽을 움직인다'는 매우 수준 높은 '정치 9단'의 내공이 담겨 있다.

    일각에서는 '전형적인 외교관식 행태'로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기문 총장의 행보는 'DJ의 정치'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YS를 때려 昌을 누르고, 호남을 이용해 충청을 품에 안는' 행보로 대권을 거머쥔 독특하고 깊은 정치 내공을 보여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친박을 때려 친노를 놀래키다

    반기문 총장이 사실상 대권도전을 선언한 지난 5월 25일. 총선 패배 후 유력한 대권 후보가 절실했던 새누리당이었지만, 반기문 총장이 여당 대선후보 출마선언을 하는 것이 그리 달가운 시점이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떠나 국내를 비운데다, 친박-비박 계파 갈등이 극에 달한 당 상황은 어지러웠다. 여기에 '친박색(色)'이 강한 반 총장의 돌발 행동은 비박계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반 총장은 굳이 그 시점을 노렸다. 제주포럼에서 북한을 향해 규탄했고, 관훈토론에서는 "귀국하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하겠다"고 했다. "이런 뜻을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알렸다"고도 했다.

    왜 그랬을까? 의도야 어쨌든 결과는 뚜렸했다. 

    좋든싫든 친박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부리나케 제주로 달려가 반 총장과 '귓속말' 한번 하고 의기양양하게 서울로 돌아왔다. 안동·경주 방문에는 친박계가 줄줄이 따라가 의전을 자처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반기문 총장의 돌발행동의 목표는 야권 흔들기였다.

    1. 반기문 대망론이 부상하면서 야권은 '문재인으로 과연 정권 교체가 가능한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2. 문재인으로 어렵다는 판단이 나오자 야권 잠룡들이 너도나도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안희정 충남지사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대표적이다.

    3. 반기문 대권행보는 안철수도 뛰게 만들었다. 어영부영 제3당 대선 후보로 가면 되겠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급기야 손학규 영입론까지 당 안팎에 번졌다.

    그런 반 총장이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말은 "확대 해석은 자제해 달라" 였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후에는 미련없이 물러나는, 그리고 다음을 준비하는. 철저히 '맺고 끊음'이 분명한 외교관式 정치행보였다.


  •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무소속 이해찬 의원이 8일 유엔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에서 회동한다. 사진은 지난 2012년 내한해 국회를 방문한 반기문 총장이 이해찬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뉴시스 사진DB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무소속 이해찬 의원이 8일 유엔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에서 회동한다. 사진은 지난 2012년 내한해 국회를 방문한 반기문 총장이 이해찬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뉴시스 사진DB
    ▶ 친노를 움직여 친박을 긴장케 하다

    반기문 총장의 돌발행동에 놀란 국내 정치권이 정신을 차릴 즈음. 반 총장은 친노 최고 원로 이해찬 전 총리에게 '티타임'을 제안했다.

    친박 대권 후보라는 딱지가 슬며시 붙었고, '니편내편'을 가리는데 혈안이 된 국내 정치권에서 반기문에 대한 찬반이 나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반 총장과 이번 총선으로 7선의 반열에 오른 이해찬과의 회동은 실제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느냐에 관계없이, 만난 사실 그 자체만으로 정치적 의미가 작지않다.

    여기에 이해찬 전 총리는 김종인-친문 세력의 합작품인 총선 공천에서 제거됐다 살아돌아온 인물이다. 반 총장의 충청대망론과 부합하는 지역적 기반도 가지고 있다.

    또 이 전 총리와는 노무현 정부 당시 국무총리와 외교부장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이 전 총리는 반 총장이 UN 수장이 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반기문 총장은 이해찬 전 총리를 움직이는데 '친노'를 이용했다. 이 전 총리가 이사장으로 있는 노무현재단에 회동을 제안한 것이다.

    당장 친노는 떨떠름한 표정이다. 하지만 반 총장의 회동 제안에 이 전 총리를 못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해찬 전 총리는 반 총장과의 회동에 앞서 뉴욕 현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외교관은 (대선출마 하면) 안된다"는 등 견제구를 날렸지만, 그리 싫은 표정은 아니다.

    제3당이 성공했고, 제4지역까지 거론되는 춘추전국시대인 현 정치상황에서 '킹메이커'를 꿈꾸는 이해찬 전 총리에게 반기문과의 인연은 스펙트럼을 넓히는 실보다 득이 많은 지점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무소속 이해찬 의원이 8일 유엔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에서 회동한다. 사진은 지난 2012년 내한해 국회를 방문한 반기문 총장이 이해찬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뉴시스 사진DB
    반 총장의 '이해찬 티타임' 한 수(手)에 정작 긴장하는 쪽은 친박계 쪽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친박 후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한 반 총장의 고육책'이라고 평가하지만, 친박계 표정을 보면 실상은 다르다.

    반기문 대망론 최일선에 서있는 친박 홍문종 의원은 "반 총장이 국내 정치 상황에 관심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고, 이해찬 의원이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오래했기 때문에 의견을 들어보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홍 의원은 또 "이해찬 의원 입장에서는 반 총장이 새누리당의 대권 후보가 되는 것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고도 했다.

    반기문-이해찬 회동의 의미를 축소하고, 회동 자체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이다.

    이처럼 반기문 총장의 친노를 향한 '손짓'은 막연히 '우리 대선후보'로 생각했던 친박계를 긴장케 하고 있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예상치 못한 대권 도전 선언과 이해찬 전 총리와의 회동이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다"며 "반 총장을 등에 업고 정권을 가져가려는 정치꾼들의 전략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절묘한 정치적 행보"라고 평가했다.

    또다른 여권 관계자도 "총선 이후 시작된 일련의 행보로 대선가도에 접어든 반 총장과 여당과의 관계과 완전히 뒤바뀐 것"이라며 "이제 칼자루는 반 총장이 쥐게 됐으며, 좋든싫든 친박과 여권은 반 총장의 대선 레이스 진입을 도울 수 밖에 없게 됐다"고 내다봤다.

    이를 두고 '친노가 이용당한다'는 평가가 나오자 급기야 이해찬 전 총리 측은 8일(현지시간) 반기문 총장과의 회동을 취소했다. 누가 먼저 회동을 제안했느냐를 두고 서로 말이 맞지 않은 것이 회동 불발로 이어진 원인으로 보인다.

    유엔주재 한국대표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 전 총리 측은 '면담을 완전 비공개'를 요구했다가 이후 '면담 취소'를 통보했다. 당초 면담 초반부를 공개하기로 한 것이 친노 입장에서는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총리와 미국 일정을 동행한 노무현 재단 관계자는 "면담 일정이 언론에 공개되고 면담 내용도 공개키로 한 것은 당초 논의한 만남의 성격이 변화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