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국회 열리고 건국 선포된 곳, 6·25 때 서울 수복 태극기가 올라갔던 곳 중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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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중앙청을 부숴버린 金泳三의 역사관

    단테가 「신곡」에서 말했듯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고 하지 않던가.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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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泳三 대통령은 중앙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옛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자리에서
    『누가 그런 정신 빠진 일을 했는지, 국립박물관을 어떻게 총독부 건물 안에다 갖다 놓느냐 말이야』라고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립박물관이 들어설 땐 그 건물은 총독부가 아니라 중앙청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제헌국회가 열리고 건국이 선포된 곳,
    6·25 때 서울 수복의 태극기가 올라갔던 곳,
    그리고 한국인들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던
    國政(국정)의 주요 결정과 조치가 이루어지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 건물을 철거하면 민족정기가 바로 선다는 보장은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국 현대사의 榮辱(영욕)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역사의 현장」과 「역사의 추억」도
    日帝의 기억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는 것.
    이런 고민이 있었기에 역대 대통령들은 철거를 미루었던 것이지
    「정신 빠진」 때문은 아니었다.
    철거엔 고민이 따르지 않지만 보존엔 고뇌가 있는 것이다.   

     김정남(金正男) 교육·문화담당 수석비서관은 『金대통령은 중앙청 건물에서 이루어진
    한국의 현대사가 정부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에 그 건물에 대해 크게 애착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의 그런 역사관은 청와대 안에 있던 역대 대통령 집무실 건물을 철거하는 데서도
    잘 나타났다. 이 건물은 총독관저로 지은 것이지만 더 긴 세월 동안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과 살림집으로 쓰여 그야말로 현대사의 진로를 좌우한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다.

    일반인들의 視野(시야)로부터는 가려져 있어 일제의 치욕을 떠올리게 할 일도 없다.
    철거업자가 이 건물을 옮겨서 보존하도록 해달라는 건의를 하자 金대통령은 그 말을 전해 듣고는 『아직 친일파가 있는 모양이지…. 벽돌 한 장까지도 깨어 없애버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전해졌다. 개혁에 반대하면 수구세력, 옛 중앙청의 철거에 반대하면 친일파라는 수사관 식 어법(語法)은 정부에 반대하면 불순분자라고 몰던 시대의 말투를 연상시켰다.
      
       세계적 금자탑을 「역사 후퇴」라고
      
       한국 현대사와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金대통령의 부정적 시각은 취임 100일 기념 기자 회견
    때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 일본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金대통령은
    『5·16은 우리의 역사를 후퇴시킨 큰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이 말도 과학적이지 못하다.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1965∼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연(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盧泰愚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3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00달러로서
    말레이시아(271달러) 필리핀(169달러) 태국(115달러)보다 못했다. 

    金泳三 대통령은 이렇게 답변했어야 했다.
       『5·16은 정치적인 면에서 나라를 후퇴시켰으나 경제적인 면에선 나라를 발전시키는
    시작이 되었다. 따라서 종합적이고 정확한 판단은 후세의 역사평가에 맡기자.』

       역사는 지도자와 국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총체적 축적이다.
    그 시대의 지도자가 밉다고 역사마저 부정하면 그 역사의 건설자들 전체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신중하고 섬세한 용어 선택을 해야 한다.
      
       대통령의 역사관은 왜 중요한가
      
       역사가 뿌리라면 국가와 민족은 줄기이고 이념은 거기에 매달린 나뭇잎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에서 파생된 산물이 국가요 민족이며 이념이다.
    따라서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자세는 국가관과 인간관과 이념체계와 직접 관련된다.
    더구나 대통령의 경우엔 역사관이 바로 國政의 방향잡기와 직결된다.
    인간으로서는 더 오를 데가 없는, 대통령이란 頂上에 선 사람은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그의 국정운영은 역사를 의식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바로 역사와 바둑을 두는 사람이다.
    대통령은, 그가 혁명으로 집권하지 않았다면, 본질적으로 역사의 계승자가 될 수밖에 없다.
    왕이 사직의 수호자였던 것처럼, 종손이 가문의 계승자인 것처럼.
    역사의 계승자란 의미는 국기(國基)를 수호하고 역대 정권과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역대 대통령의 맥을 잇는다는 뜻이다.

       지나간 역사를 총론적으로는 긍정하되 각론적으로는 비판적·선별적 계승을 해 가는 자세이다. 한국의 정통성은 독립운동―반공―건국―6·25 동란―경제개발―민주화로 이어진다.
    金泳三 대통령은 역대정권과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반면
    자신의 문민정부가 3·1운동―4·19의거―5·18광주사태―6월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했다.
    국가건설이 아닌 반대의 노선에 정부의 정통성을 귀착시키고 있는 듯한 말이었다.

    이런 시각은 야당 지도자나 재야 지도자일 때는 무리가 적을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정부의 정통성을 그런 좁은 기반 위에 둔다면
    대통령도 정권도 불안해진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스스로 축소시켰다.
    국정의 흐름에 있어서 반대하는 편만을 대통령이 대변한다면 역사건설에의 참여파는 배제되거나 소외되거나 불만세력으로 남게 된다.

      옛 중앙청·옛 대통령관저 철거에서 보듯이 金대통령은 역사의 처녀성을 보존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좋은 일이라고 믿는 것 같다. 이런 역사관이 청교도적 인간관과 결합하여 최근에 「도덕국가」란 비전으로 나타난 것 같다. 인간이란 존재는 능력 면에선 개인차가 크지만
    (예컨대 한 시즌에 홈런을 다섯 개 치는 타자와 그 열 배를 치는 타자가 있다)
    도덕면에선 비슷하다(보통 사람보다 열 배나 성스러운 인간이 있는가).
    그런 세상에서 순결·도덕·정의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필연적으로 독선과 위선이 된다.

    단테가 「신곡」에서 말했듯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도덕성을 내세우고 남에게 도덕성을 강요해서 지상에서 도덕국가를 만들려다가
    결과적으로는 지옥을 만든 사례가 역사엔 너무나 자주 등장한다.
    도덕성 강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덕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다.
      
       毛澤東을 보호한 鄧小平의 계산
      
       우리 모두의 기억에 생생하고 직접 오늘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사를
    평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있다.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그것이다.
    1981년 6월27일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모택동(毛澤東)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역사적 평가 문헌이다.
    이 문헌의 기초사업은 鄧小平과 호요방(胡耀邦)이 주재하였다.
    毛澤東이 일으킨 10년간의 대재난―문화대혁명이 남긴 악몽에서 깨어난 중국의 진로를
    개방쪽으로 선회함에 있어서, 중국의 정치지배 엘리트들이 과거의 문제를 어떻게 정리한 뒤
    새 출발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담긴 문헌이다.
    이 문헌(사계절 출판사에서 1990년에 「정통 중국현대사」란 제목으로 전문번역 출판)을
    읽어본 기자는 숙연한 느낌을 받았다.

       역사의 피해자(鄧小平)가 그 가해자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쓴 흔적,
    그 가해자(毛澤東)와 그가 주도한 한 시대의 역사를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한 덩어리로 파악함으로써 긍정적인 평가를 도출하고 그리하여
    피해자와 가해자가 다 같이 승리자가 되는 결론을 내려가는 역사관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毛澤東에 의하여 두 번이나 숙청당함으로써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던 鄧小平은
    이 결의문의 초안에 대한 의견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 동지가 만년에 이론과 실천면에서 범한 오류를 언급하려면
    객관적이고 절절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주된 내용은 올바른 것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역사에 부합됩니다.
    모택동 동지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거할 때까지 줄곧 우리 당의 영수였습니다.

    모택동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 도가 지나치게 써서는 안됩니다.
    도를 넘게 되면 모택동 동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당과 우리나라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납니다.」


       이 결의문은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당과 국가와 인민에게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맛보게 한」 재난이라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면서도 鄧小平은 「우리도 일부 책임을 져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조건 아래서는 사실상 반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피하지 말고 책임을 져도 나쁠 것이 없고 오히려 좋은 점이 있습니다.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와 진운 동지는 정치국 상무위원이었으므로
    적어도 우리 두 사람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대통령 주도의 역사 평가

      
       鄧小平 식의 역사관에 따르면
    5·16이 군사쿠데타라면 그것을 막지 못한 책임의 일단을 당시의 현역 정치인 金泳三씨도
    져야 한다(군사쿠데타를 부른 가장 큰 원인은 민주당 신구파 싸움에 의한 정권불안이었다).
    유신시대에 약 3년간 야당 당수로서 朴대통령의 정치적 상대자였던 金泳三씨는
    만약 그 역사가 후퇴한 역사라면 그 후퇴에 대해서 일부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自責을 전제로 한 역사평가일 때만 피해자의 한풀이가 아닌,
    새 출발의 동력자원이 되는 생산적인 역사평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金泳三 개인에 의해서 즉흥적으로 주도되는 역사평가는
    우리 시대가 딛고 있는 뿌리를 잘라냄으로써,
    또 우리가 기대고 있는 역사의 언덕을 무너뜨림으로써
    북한 金日成 정권의 정통성만 상대적으로 강화해주는 自害행위,
    그리고 소모적인 國論의 분열로 연결될 위험이 있었다.

       지나간 현대사를 대통령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려면 그것은
    깊은 고뇌와 실증적인 연구가 뒷받침되는 정정당당한 정면승부여야 한다.
    그러나 金泳三 정부하의 역사논쟁은 우발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황인성(黃寅性)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12·12사건에 대해서 애매한 발언을 하지 않았더라면
    청와대에서 「쿠데타적 사건」이란 해석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5·16에 대한 평가도 일본 기자의 질문이 없었더라면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깊은 생각 없이 툭툭 던진 말 몇 마디를
    언론과 지식인들이 받아서 확대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과거사 논쟁, 현대사 격하 쪽으로 가버린 것이다.
      
        金泳三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전(前)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의 연장선상에서
    국민들을 상대로 「내부의 적」 「기득권층」 「조직적 반대세력」 「수구세력」 「반 개혁세력」이란 대결적, 갈등 촉진적, 분열적 이미지의 말들을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돈 없는 사람이 부끄러웠던 시대가 가고 오히려 돈 많은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말을 했던 金대통령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세법을 개정하겠다』는 말도 했다.

       국민에게 고통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정하는 대통령?
    북한의 악마적 정권을 향해서는 동반자라고 부르면서
    국민을 향해서 「내부의 적」이라니, 적은 전투와 제거의 대상이다.
    「내부의 적」은 혁명정부나 전체주의 국가가 쓰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의 뒤에는 계급적, 反역사적, 그리고 反자본주의적 논리가 스며 있다.

       金대통령의 반공적 의식구조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게 모르게 어떤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는 보장도 없다.
    (북한의 영향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의 기본 원리인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와 배치되는
    생각을 가진 이들의 영향을 가리킨다).

    취임사에 나온 문제의 구절―「어떤 동맹국·사상·이념보다도 민족이 중요하다」는 말은
    북한의 對南통일전략에 있어서 기축이 되는 논리였다.
    그가 좌파숙주 역할을 하면서 김대중 집권의 길을 연 것은
    이런 이상한 역사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