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물러날 때를 놓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과 미국의 마찰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한국에서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념적으로는
    철저한 친미주의자였다. 
       그러면서도 국가 이익이 걸린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 ▲ 6.25때 남쪽으로 밀려들어오는 피난민.
    ▲ 6.25때 남쪽으로 밀려들어오는 피난민.
   우선 이승만은 미국 원조 자금의 사용 방법을 둘러싸고 미국과 충돌했다.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에 대한 원조는 공산국가인 소련,중공,북한에 대항해 동아시아 지역을 통합하려는 전략과 연계된 것이었다. 즉, 일본을  경제 강국으로 만들고 한국을 군사 강국으로 만들어 소련과 중국의 팽창에 공동 대응케 한다는 전략이었다.
   바꾸어 말해,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면 그 돈으로 한국이 일본 공산품을 사게 되어,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모두 동맹국으로 확보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한국에게는 불리했다.
왜냐하면 한국은 군사강국이 되기는 하지만, 농업국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승만은 한국이 전쟁으로 크게 피폐해진 데 대해 일본이 6 · 25전쟁을 통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한 데 대해 크게 마음이 상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한국을 공업국(工業國)으로 만들려고 했고, 그 첫 단계로 수입품을 국산화하는 데 역점을 두려고 하였다.
그래서 미국 원조 자금은 우선적으로 수입대체(輸入代替)산업을 육성하기 설비투자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국민을 먹이고 입힐 소비재에 원조자금이 우선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 ▲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1954)
    ▲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1954)
  •    미국과의 마찰은 환율(換率) 문제를 둘러싸고도 일어났다. 
       당시 한국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고, 그 결과로 공식 환율은 암시장의 실제 환율과 비교해 3분의 1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국은 환율을 올리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미국의 원조액이 실질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이 이승만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환율을 계속 낮게 유지하려고 했다. 

       미국과의 마찰은 국내 정치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둘러싸고도 일어났다.
     
       미국은 이승만의 확고한 반공 노선을 존경하면서도 국내 문제에서 그의 독자적인 행동에는 불만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승만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장면과 같은 온건파를 내세울 마음이 있었다.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것은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와 1953년 반공포로 석방 때 세워졌다.
    그것은 ‘에버 레디 작전(Ever Ready Operation)’으로 불렸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미국은 이승만을 대신할 강력한 영도자를 찾지 못해 실천에는 옮기지 못했다.

       휴전 후에도 이승만과 미국은 국내 문제들을 둘러싸고 충돌했다.
    예를 들면, 1954년의 4사5입 개헌과 1956년의 신국가보안법 파동의 경우에 그러했다.
      그때마다 미국은 점차 인기가 떨어져가는 이승만 정부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인기 없는 정부와 손을 끊음으로써 국민의 환심을 사려는 ‘절연(絶緣) 정책’의 표현이었다. 

    대통령 중임 제한을 철폐하려는 무리한 개헌

        1956년 정-부통령 선거가 가까워 오면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자유당의 불안감은 커져 갔다.
     이승만이 3선 제한 조항에 걸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게 되면, 민주당에게 정권을 잃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당은 이승만에 한하여 출마 횟수를 제한하지 않도록 헌법을 개정하려고 했다.
    그에 따라 초대 대통령의 중임(重任) 제한 조항을 없애기 위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개헌안에는 국무총리제 폐지, 국무위원의 연대책임 폐지와 같은 내각제 요소들을 없애기 위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국민투표제의 도입과 같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내용도 있었다. 
       특히 자유기업(自由企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민간기업에 대한 통제를 줄이려는 조항이 포함된 것이 주목할만했다. 그것은 건국초기에 족쇄로 작용했던 사회민주주의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주의적인 개혁 조치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당과 정부측의 개헌안은 1954년 11월 28일 국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찬성표가 정원 198명의 3분의 2선인 136명에서 1표가 모자라는 135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자유당 지도부는 사사오입(四捨五入)의 원리를 적용해 표결 결과를 뒤집으려고 했다. 198의 3분의 2는 135.333이지만, 사람을 세는 데는 소수점이 있을 수 없으므로, 136명이 아닌 135명이 맞는다는 해석이었다. 
       자유당은 다음 날 국회를 다시 열어 최순주 부의장의 사회로 개헌안의 통과를 선언했다.
    그것에 대해 민주당과 여론은 거세게 반발했고, 정국은 극한 대치 상황에 이르렀다.  
      
  • ▲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1954)
  • 야당과 혁신계의 거센 도전   

       그러므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56년 5월 15일에 치러지게 될 제3대 대통령선거전은 전례 없이 격렬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申翼熙)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정권 교체를 호소하였다. 
       이에 맞서 자유당의 이승만(李承晩) 후보는 ‘갈아 봤자 쓸데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워 사회 안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선거를 열흘 앞둔 5월 5일 선거운동을 위해 호남지역으로 가던 신익희 후보가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에 따라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승리로 쉽게 끝이 났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 대신 민주당의 장면(張勉)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것은 자유당에게는 큰 걱정거리였다. 81세의 이승만이 대통령 재임 중에 사망하기라도 한다면, 장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되어 정권이 야당에게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유당 정부에게 부담스러웠던 또 다른 선거 결과는 대통령에 출마한 무소속의 조봉암이 총 투표수의 23.8%를 얻었다는 사실이었다. 
  • ▲ 전향한 공산주의자 조봉암.
    ▲ 전향한 공산주의자 조봉암.
  •    조봉암은 일본 통치기에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가 전향한 혁신계 정치인이었다.
     그는 초대 내각의 농림부장관이 되어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그는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피해 대중 뭉쳐라’, ‘평화 통일’과 같은 구호를 내세워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많은 표를 얻었다. 
       그러한 구호들은 얼핏 보아 북한의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에 반공 세력을 놀라게 했다.
    특히 그의 공산주의 경력이 그에 대한 불신감을 증폭시켰다.

       그 때문에 야당인 민주당은 신익희 후보가 사망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 또 다른 야당 후보인 조봉암에게 표를 주지 말도록 호소했다.
    그 대신 민주당은 ‘추모표’라는 이름으로 죽은 신익희를 찍어 무효표를 만들라고 할 정도로
    조봉암을 사상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의회정치는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1958년 5월의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이 79석을 얻어 126석을 얻은 자유당을 견제할 정도로 커졌다. 무소속도 27석으로 크게 줄어 양당체제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 ▲ 대한민국 제헌 헌법 1호.
    ▲ 대한민국 제헌 헌법 1호.
    그래도 자유민주제의 기본 틀은 허물지 않았다
      
       1950년대의 정치 현실은 이승만 대통령 혼자서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관철시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오랜 미국 생활 때문에 실제로 국내에 지지 기반이 없었고, 국회 안에서 독자적인 조직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행사할 수 있었던 힘은 주로 개인적인 명성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48년에 초대 내각을 구성할 때 그가 바라는 이윤영 목사를 국무총리에 임명하지 못했다. 다음 해에도 다시 이윤영 목사를 총리로 지명했지만, 역시 국회에서 비준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1951년에는 국회가 그에게 비판적인 민주국민당의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뽑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흔히 독재자로 불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호칭에 맞는 권력은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뒤에 나타난 대통령들의 막강한 권력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지는 것이다.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 새로 도입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모두에게 낯선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정부든 국민이든 운영에 서툴렀다. 그래서 마찰음이 더욱 더 커 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점차 골격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여당과 야당 사이에 극한적인 대립이 있었음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이 정지되거나 국회가 해산되거나 언론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봉쇄되는
     일은 없었다. 
       부정과 관권 개입에 대한 시비에도 불구하고, 12년간에 걸친 이승만의 재임기간에 선거는 예정된 해를 넘기지 않고 어김없이 실시됐다. (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