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끼고 주님을 소유하려는 사람들]


  • ▲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전주교구 신부들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님을 선언"하면서
    그의 사퇴를 주장하고 나섰다.
     "불법·부정선거 당선범(犯) 박근혜, 귀태(鬼胎)니까 셀프 사퇴!"
     "NLL에서 한·미 군사훈련 계속하면 북한에서 쏴야지"
     "천안함도 북한이 어뢰를 쐈다는 게 이해가 되느냐"는 말도 나왔다.
    종교 집회인지 정치 집회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이 구분은 안 해도 그뿐이다.

    본인들이 그것을 종교 집회라 하면 그뿐이고,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정치 집회라 하면 그 역시 그뿐이다.
    합칠 수 없는 걸 합치려고 굳이 애쓸 필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정치화된 신부들(politicized priests)'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치화된 신부'는 옛날부터 있었다.
1095년 로마교황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 종교회의에서 전(全) 유럽이 십자군전쟁에 총궐기할 것을 요구했다. 셀주크 터키가 장악한 예루살렘 성지(聖地)를 뺏어오라는 선전포고였다.
 수많은 농민과 부랑민이 '민중십자군(people's crusade)'에 열광적으로 가담했다.
소년 소녀 아줌마도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은둔자 베드로(Peter the Hermit)' 신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신발을 신지 않는 카리스마의 인물이었다.
민중은 그가 탄 당나귀의 꼬리 한 오라기라도 뽑아서 지니면 축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이 오합지졸 1만5000명은 유럽을 횡단해 콘스탄티노플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들은 쾰른에 도착해선 약탈자로 변모해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했다.
상당수는 발칸반도에서 지역민에게 맞아 죽고 굶어 죽고 노예로 잡혀갔다.
나머지 7000명은 베드로 신부가 동로마 제국 알렉시우스 황제에게 지원을 호소하러 간 사이
터키 정예군에게 도륙을 당했다.
당나귀 꼬리엔 영광이었을지 몰라도 민중에겐 헛되고 헛된 삶과 죽음이었다.

'은둔자 베드로' 신부는 그 당시의 '정치화된 신부'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호칭을 수긍했을 리 없다. 예루살렘 '성(聖) 무덤 성당'을 찾았을 때 그는 예수님의 신탁(神託)을 받았다고 자임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유럽으로 돌아가 이교도의 횡포를 널리 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정치화된 신부'가 아니라, 주님의 명(命)을 따르는 종일 뿐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그렇더라도
객관적으로는 그는 민중을 도구화한 프로페셔널 정치 선동가였다.

'정치화된 신부들'은 오늘에 와서도 세계적으로 민감한 쟁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복음성서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전주교구 '정구사' 집회도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稅吏)처럼 여겨라"고 했다. 자신들의 말을 곧 교회의 말씀, 성경 말씀이라고 친 것이다.
 그래서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당연히 교회의 진리를 거역하는 이방인, 세리, 바리새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엔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목소리가 없을 리 없다.

2010년, 가나의 아남브라 주지사 선거 때 일부 신부는 특정 후보를 찍으라고 선동했다.
그러자 에보 소크라테스라는 평신도가 교회 매체에 이렇게 썼다.
"교회는 영성적이고 보편적(catholic)이어야 한다. 독단적이고 분열적인 신조로 파당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
미국에서도 레베카 해밀턴이란 평신도가 '정치화된 신부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자신들의 세속 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복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님의 이름을 끼고 다니며 주님을 소유하려는 그들의 행위가 개탄스럽다."

"귀태니까 셀프 사퇴" "NLL에서 훈련하면 북이 쏴야지" "북이 어뢰를 쐈다는 게 이해가 되나?" 하는 말들은 그러면 복음적일까, 복음을 왜곡한 것일까? '댓글'과 '트윗'을 야단칠 순 있다.
검찰도 야단치고 있다. 재판부도 엄정할 것이다.
그러나 '천안함'과 '연평도'를 그렇게 거꾸로 매달 순 없다.
 그것은 영령들을 거꾸로 매다는 것이고, 영령을 기리는 국민을 거꾸로 매다는 것이고,
그들의 정의를 거꾸로 매다는 것이다. '정구사'엔 이게 정의이고 복음적인가?

서울대교구 염수정 대주교는 "성직자는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고만 말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구사식 정의'에 대한 본질적 판단 문제다.
교회 당국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금까지 이걸 쟁점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평신도들이라도 본격 논쟁을 일으켜야 한다.
언제까지 덮고 뭉갤 수만은 없다. (조선일보 2013.11.26, 류근일 칼럼 전재)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