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국이념보급회>가 주최하는
    [제31회 이승만포럼]이
    <김용삼(전 월간조선 편집장)>이 발표자로 나서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 주제로 
    12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진행됐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다시 본다


    김용삼(전 월간조선 편집장)

    지난 7월 27일을 전후로 정전 60주년과 관련한 각종 행사들이 이어졌고,6.25 때 참전했던 외국인 노병들이 군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 모습을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이란 카드를 동원해가며 미국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카드를 받아냈다.
    오늘날의 한미동맹은 이승만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준 값진 선물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덕분에 우리는 국가를 지켜왔고, 국방에 적은 비용의 투자를 하면서 경제개발에 전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한반도의 분단된 남쪽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구상에 북한공산주의자들과 남한의 좌파는 물론 중도파, 우익진영의 김구를 비롯한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도 반대했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승만의 거의 독자적인 리더십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35달러, 문맹률은 78%였다. 경제형편은 아프리카 가나와 비슷했고, 국민 10명 중 8명은 한글조차 읽고 쓸 줄 몰랐다. 남북한을 통틀어 중등교육 이상을 이수한 사람은 2만 6,000여 명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부터 좌익과 공산 게릴라들이 신생 정부를 뒤엎고 공산통일을 이루기 위한 공세가 펼쳐졌다. 당시 지리산, 오대산, 소백산 등 전국 곳곳을 좌익 무장세력과, 북에서 고도의 훈련을 받고 침투한 공산 게릴라들이 점령하고 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최근에 밝혀진 구 소련의 비밀해제 자료에 의하면 1946년의 대구 폭동을 비롯해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벌어진 여수 순천 반란사건도 소련의 지령과 자금지원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무장 투쟁이 실패하자 김일성이 소련을 끌어들여 남침을 한 것이 6.25다.

    이승만은 훈련되고 숙련된 인재, 경험과 능력을 갖춘 리더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정부를 수립하고 국가 구성에 나섰다. 이승만 시대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이승만이 일제 치하에서 조금도 때가 묻지 않은 사람들로만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하여 운영할 수 만 있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공산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해 일제하에서 경찰과 군인, 관료로 근무했던, 국가운영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 중등교육을 이수한 사람이 2만 6,000여 명에 불과했으니 옥석을 가리면 뭐가 남았겠는가. 현실적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 이승만과 우리 민족사의 비극이었다.

    1965년 애들만과 모리스라는 경제학자는 한국의 제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후 한국의 국민소득은 94개 개도국 중 60등인 데 비해 사회문화개발 발전 복합지수는 14등이라고 발표했다. 이대근(성균관대 명예교수)은 1960년대 이후의 개발연대에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기반이 이미 1950년대에 높은 수준으로 구축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이승만의 정치 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연구가 유영익 등도 박정희 시절에 압축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승만 연구가 유영익 등도 박정희 시절에 압축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승만 시대부터 그에 필요한 경험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승만의 업적이란 과연 무엇일까.

    첫째, 이승만은 6.25 휴전을 담보로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국군 전력증강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받아 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대한미국은 미군의 지원을 받아 안보를 지켜낼 수 있었고, 단국개국 이래 최대 최강의 군사력인 70만 대군을 보유한 아시아의 군사 강군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됐다.

    둘째, 교육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해 문맹을 퇴치하고 산업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대량 배출하는 토대를 다졌다. 또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수만명의 젊은이들이 해외유학을 다녀왔다. 이승만이 고급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낸 덕분에 1950년대 후반에는 대학 진학률이 영국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셋째, 이승만의 농지개혁으로 전 농지의 92%가 자작농화 했다. 농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이 소멸되어 한방의 계급 구분이 사라졌고,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무너졌다. 전 국민이 차별없는 시대가 열리고 기회의 균등이 실현됨으로써 ‘캔 두 스피릿(Can Do Spirit)’이라는 의욕과 참여 동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넷째, 이승만을 통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만나게 된 점이다. 이승만은 청년 시절 배재학당에서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이라는 존재에 눈을 뜨게 된다.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체험했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건국과 더불어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나갈 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대원칙을 설정했고, 그 원칙은 60년이 흐른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져왔다.

    이승만 시대는 이른바 국가 건설 시기에 해당한다. 2차 대전 이후 140여 개가 넘는 나라들이 식미지로부터 독립했다. 신생 독립국이 제대로 된 국가로 작동하려면 안보와 치안이 담보되어야하고, 일반 국민이 세금을 내서 국가를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어야한다. 통치 질서를 명문화한 헌법이 제정되어야하고, 마지막으로는 국가를 운영하는 주체로서의 국민이 존재해야 한다.

    강대국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신생국가들은 여러 가지 제약조건이나 제한된 자원과 경험부족 등으로 국가안보, 경제발전(산업화), 정치발전(민주화)이라는 국가건설의 3대 과업을 동시에 달성하기는 불가능했다. 한국의 역대 지도자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에는 국가 안보에 전력투구했고,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에는 근대화와 경제발전 과업에 매진했으며, 노태우에서 이명박에 이르는 시기에 민주화와 선진화라는 국가건설의 3대 과업을 분업을 통해 해결해냈다. 2차 대전 이후 탄생한 140여 개의 신생 독립국 중 국가안보, 경제발전, 정치발전 등 3대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이승만의 건국 시기에 우리는 목숨 걸고 공산주의와 싸워 안보를 담보해냈다. 그러나 경제적 기반과 국민형성이 제대로 안 돼 성숙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는 절대선(善)이라면서 그 시기에 민주주의를 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을 비하, 격하, 폄하하는 조직적인 흐름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

    그는 3.15 부정선거라는 무리수를 두다가 시민혁명으로 하야함으로써 독재자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농지개혁, 의무교육, 징병제 등을 통해 한국을 명실상부한 사민평등 사회로 탈바꿈시켰다. 또 고등교육의 확대로 양질의 노동력이 풍부하게 배출되는 토대를 마련하여 1960년대 이후 세계 경제사상 유례없는 압축형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큰 공로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공산 침략으로부터 지켜냄으로써 공산 치하에서 살게 됐을 지도 모르는 국민들의 고난을 면제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승만에게 이 점을 늘 고맙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