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韓民國의 ‘建國’을 되찾는 일을
    청소년 세대에 기대해 본다


    李東馥    
  •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대다수는 매년 8월15일을 오직 ‘해방(解放)’의 날, 즉 ‘광복절(光復節)’로만 기억한다. 초/중/고등학교의 교단(敎壇)을 석권(席卷)한 종북(從北) 성향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학생들에게 심어 주기 위하여 그렇게 교육하는 것을 대한민국 정부가 방치한 데서 초래된 무서운 결과다. 그러나, 사실은, 8월15일은  수천년 민족역사를 통하여 가장 자랑스러운 나라로서의 위상을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이 독립을 이룩한 ‘독립기념일(獨立記念日)’, 즉 ‘건국절(建國節)’이기도 하다. 이 같은 역사의 진실을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인식할 때라야 대한민국은 바르게 설 수 있다. 다음은 필자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광복 68주년. 건국 65주년이 되는 2013년8월호 월간 <북한지(北韓誌)>에 기고(寄稿)한 졸고(拙稿)다. 뜻 있는 분들이 읽어보고 젊은이들에게 읽혀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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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韓民國의 자랑스러운 ‘建國’을 되찾는 일을 청소년 세대에 기대해 본다

    李東馥 (15대 국회의원/전 남북고위급회담 대표/신아세아연구소 수석연구위원)

    I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8월15일이 갖는 의미는 이중적(二重的)이다.
    북한에 거주하는 2천4백만 동포들과 해외에 거주하는 7백여만 교포를 포함한 8천만 한민족이 공유(共有)하는 8월15일의 역사적 의미는 ‘광복(光復)’, 즉 ‘해방(解放)’의 날이라는 것이다. 한반도를 생존의 터전으로 하는 한민족은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제국(日本帝國)에 의해 강제 ‘합방(合邦)’되어 일본에 의한 식민지 생활을 강요당해야만 했었다. 그러한 한민족은 1945년8월15일 나치 독일 및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추축동맹(Axis)을 형성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했던 일본제국이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일본제국에 의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로써, 8월15일은 전체 한민족에게 ‘해방’, 곧 ‘광복’의 날이 되었다. 금년(2013) 8월15일 우리는 제68회 ‘광복절(光復節)’을 기념한다.

    우리 민족이 1910년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합방’하기 5년 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강제 체결을 통하여 이미 사실상 국권(國權)을 늑탈(勒奪)했을 때부터 한반도의 안과 밖에서 일본에 의한 국권 찬탈(簒奪)에 항거하는 독립 투쟁을 끈덕지게 전개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독립지사(獨立志士)들은 국내에서 1919년3월1일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된 ‘3,1 만세 운동’을 이어 받아 같은 해 4월23일 중국 땅 샹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1945년8월15일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샹하이에서 진장(鎭江), 장샤(長沙), 광조우(廣州), 충칭(重慶)으로 전전(輾轉)하면서 해외에서의 항일독립 투쟁을 지도하는 역할을 계속했다.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건너 만주(滿洲) 땅에서는 한 동안 수없이 많은 항일 단체들이 명멸(明滅)하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규모의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홍범도(洪範圖)의 ‘봉오동 전투’(1920년6월)와 김좌진(金佐鎭)의 ‘청산리 전투’(1920년10월)다. 이와 함께 일본 정계(政界) 요인(要人)들과 친일(親日) 도배(徒輩)들을 테러의 방법으로 응징함으로써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려는 독립지사들의 의거(義擧)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에 의한 친일 미국인 더함 스티븐스 저격(狙擊) 살해, 1910년 서울에서 있었던 이재명(李在明)에 의한 이완용(李完用) 척살(刺殺) 미수, 1909년 만주 하르빈 역에서의 안중근(安重根)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살해, 1919년 서울에서 발생한 강우규(姜宇奎)의 사이토 미노루(薺藤實) 저격 미수, 1932년 일본 수도 토쿄(東京)에서의 이봉창(李奉昌)에 의한 일본천황 탑승 마차에 대한 폭탄 투척, 그리고 같은 해 윤봉길(尹奉吉)에 의한 중국 샹하이 천장절(天長節▪일본 천황 생일) 경축식장 단상(壇上)을 향한 폭탄 투척(投擲) 등이 그 주요한 사례들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샹하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이 조직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통한 외교적 노력에 의한 독립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고 만주에서는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소속 김일성(金日成)과 그 일당이 소규모의 항일 무장 빨찌산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强占)으로부터의 해방은 한반도의 이들의 힘에 의하여 자력(自力)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일본을 패망시킨 전승국(戰勝國)들의 ‘전후처리(戰後處理)’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한국인들이 전개한 국내외에서의 독립투쟁은 그 규모가 너무나 미미(微微)하여 일본의 패망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공세에 ‘청야작전(淸野作戰)’으로 맞선 중국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자리를 옮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쟝제스(蔣介石)의 중국 국민당 정부를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 다른 나라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했고 1941년의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또한 이불 속 활개 짓에 불과했다.

    전승국들 사이에서 일본 패망 후 한반도 처리 문제가 최초로 논의된 것은 1943년11월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열린 미(프랑클린 루스벨트)▪영(윈스턴 처칠)▪중(쟝제스) 정상회담 때였다. 이 자리에서 세 나라 정상은 “한국인들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앞으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로운 독립국가로 만들기로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 같은 카이로 회담의 합의 사항은 1043년11월말의 테헤란 정상회담(미▪영▪소), 1945년2월11일의 얄타 정상회담(미▪영▪소), 그리고 독일 패망(1945년5월8일) 이후에 열린 포츠담 정상회담(미▪영▪소)에서 원칙적으로 거듭 확인되었으나 그 같은 ‘한국의 독립’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아무런 합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1945년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군사적으로 양분되었다. 미국군과 소련군이 일본의 항복 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에 분할 진주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각기 담당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반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문제는 1945년12월16일부터 25일 사이에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3개국(미▪영▪소) 외상회담에서 다루어졌다. 이 회담에서 이들 3개국은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보류”하고 “5년간 4대국(미▪영▪중▪소)이 공동으로 실시하는 신탁통치(信託統治)를 시행”하며 “그 동안 한반도 전역을 관할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되 이 “‘임시정부’의 수립방안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반도의 ‘민주적 정당▪단체’들과 협의하여 마련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이 같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 내용에 대해서는 소련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공산당을 제외한 전체 한국인들이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반대하고 나서서 한반도 전역이 ‘찬탁(贊託)▪반탁(反託)’의 격렬한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38선 남과 북의 미▪소 점령군은 1946년과 1947년 서울 시내 덕수궁(德壽宮)에서 두 차례에 걸쳐 공동위원회를 개최했지만 위원회는 ‘임시정부’ 구성 방안을 놓고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사항의 이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947년9월17일 “한국의 독립 문제”(Independence of Korea)라는 제목의 의안(議案)을 유엔총회에 상정했다.

    II.

    이로써 한반도의 독립 문제를 논의, 해결하는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의 차원을 벗어나서 유엔의 해결과제가 되었다. 이를 통하여 8월15일은 한민족의 차원이 아니라 이번에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차원에서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8월15일은 단순히 전체 한민족의 차원에서 ‘해방’의 날, 즉 ‘광복’의 날일 뿐 아니라 38선 이남의 ‘대한민국 국민’의 차원에서 ‘독립’의 날, 즉 ‘건국’의 날로서 자리 매김이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7년11월14일 유엔총회는 “한국의 독립”이라는 제목으로 된 ‘유엔총회 결의 제112(ii)호’를 채택했다. 이 결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오스트랄리아, 캐나다, 중국, 엘살바돌,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 리아, 우크라이나 등 9개국 대표들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하 ‘임시위원단’으로 약칭)을 구성한다.

    ► ‘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한반도 전역에서 지역별 인구비례에 입각한 의석 배정 원칙에 입각하여 1948년3월31일 이전에 성인 유권자들이 참가하는 비밀투표로 실시되는 선거를 통하여 국회 를 구성하여 전국을 관할하는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이 같은 유엔총회 결의 제112(ii)호는 그대로 이행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북한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소련이 유엔총회의 결의에 불복(不服)하여 ‘임시위원단’의 북한 지역 출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임시위원단’으로부터 이 같은 상황을 보고받은 유엔은 1948년2월26일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열린 소총회(Interim Committee)에서 “한반도 전역에서의 유엔감시 하의 선거 실시가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는 보류하고, 우선 가능한 지역에서 유엔감시 하의 선거를 실시하여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수립할 것”을 ‘임시위원단’에 지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1948년5월10일 총유권자의 75%가 참가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국회’를 구성했다. 이때 실시된 ‘제헌국회’ 선거는 뒷날 북한지역에서 보류된 유엔감시 하의 선거실시를 위하여 1백석의 의석을 ‘공석’으로 남겨두고 198명의 의원만을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신생국가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는 내용의 헌법을 제정하여 7월17일 공포했으며 이에 의거하여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이시영(李始榮)을 부통령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여 1948년8월15일 이를 내외에 선포함으로써 이 날짜로 대한민국의 건국이 이루어졌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렇게 되자, 38선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9월9일 평양을 ‘임시 수도’로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그들만의 ‘국가’를 따로 수립했다는 사실을 선포했다. 아로써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2개의 ‘분단국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남북의 두 ‘국가’들 사이에 ‘정통성’ 시비가 불가피하게 제기되게 되었다. 어느 쪽이 ‘진짜’고 어느 쪽이 ‘가짜’냐 하는 것을 판별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이를 가리는 일은 불가피하게 유엔의 몫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유엔은 총회결의 제112(ii)호를 통하여 “한국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의 산파(産婆) 역할을 떠맡았기 때문이었다. 유엔은 1948년12월12일자로 채택한 총회결의 제195(iii)호를 통하여 바로 이 역할을 수행했다. 이 결의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 총회는 “한반도에서 ‘임시위원단’이 감시하고 협의하는 것이 가능 했고 전체 한국인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을 유효하게 지배하 고 관할하는 하나의 합법정부(대한민국)가 수립”되었고 “이 정부 는 ‘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해당 한반도 지역 유권자들의 자유 의지가 정당하게 표현된 선거를 통하여 수립되었기 때문”에 “한 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그러한 정부라고 선언”한다. (제2항)

    ► 1948년11월14일자 총회결의 제112(ii)호에 제시된 목표들의 이 행을 완수하기 위하여 오스트랄리아,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과 시리아로 구성되는 ‘한국위원회’를 설치하여 ‘임 시위원단’의 임무를 계승할 뿐 아니라 다음 사항에 유념하여 이 총회 결의에 포함된 모든 사항들을 이행하도록 한다. (제4항)

    - 총회 결의 제112(ii)호에 명시된 원칙에 따라 한반도의 통일을 성취할 것

    - 점령군의 실질적 철수를 감시할 것

    ► 회원국들과 그 밖의 나라들이 앞으로 대한민국과 관계를 수립할 때는 본 총회 결의 제2항에 명시된 사실(“대한민국 정부만이 한 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제9항)

    이 같은 유엔총회 결의 제195(iii)호는 1948년 한반도에 출현한 2개의 ‘분단국가’ 가운데 오직 대한민국만이 ‘유일한 합법국가’라는 사실을 명시함으로써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법적 지위를 ‘불법국가’로 격하시켜 놓았다. 그 동안, 대한민국 정부 안팎에서는 문제의 총회 결의 제195(iii)호 제2항이 대한민국을 가리켜 “전 한반도를 대표하는 유일 합법국가”로 선언한 것이라는 그릇된 해석이 통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결의 제2항의 영어(英語) 원문(原文)을 오역(誤譯)한 것이다. 문제의 유엔총회 결의 제195(iii)호는, 실제로는, 남북의 2개 ‘국가’ 가운데 남의 대한민국만을 ‘합법국가’로 인정함으로써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적 지위를 ‘비합법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대한민국에게만 ‘정통성’과 ‘합법성’을 부여는 조항이었다.

    III.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독립”의 산파역인 유엔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실현시켜 주었다. 유엔총회 결의 제195(iii)호는 대한민국의 ‘독립’이 한반도의 ‘통일’을 숙제로 남겨둔 ‘미완성 독립’임을 분명하게 하면서도 향후의 ‘통일’을 총회 결의 제112(ii)호의 이행을 통하여 대한민국 주도 하에 실현시키는 것과 함께 향후 다른 국가들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수립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1948년8월15일의 정부 수립을 통하여 대한민국이 ‘독립국가’의 지위를 확보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산파역을 통한 ‘독립’ 달성 후 65년이 경과한 오늘에 이르도록 대한민국에서는 ‘독립기념일’ 곧 ‘건국절(建國節)’이 실종(失踪)된 채 방치되어 있는 역사적 모순이 지속되고 있다. 그 이유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해방공간(解放空間)’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제휴, 야합하여 ‘통일 지상주의’를 명분으로 삼아서 대한민국의 ‘건국’에 반대했던 ‘좌우합작’ 세력의 잔존(殘存) 세력들이 이 나라의 ‘친북(親北)▪종북(從北)’ 세력과 제휴, 연대하여 1945년8월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수용할 것을 집요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유엔의 산파역을 통하여 수립된 1945년8월15일이 아니라 1919년의 3.1 운동을 ‘계승’하여 샹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된 날인 1919년4월23일이 ‘건국절’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 같은 주장은 법률적으로나 정치학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억지이다. 현대 국가이론에서 하나의 ‘국가’가 실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요소를 구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학계의 정설(定說)이다. 즉 ① 국토와 ② 국민 및 ③ 주권(主權)으로 특히 이 가운데 ‘주권’은 ‘국제적 인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땅에서 전전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도 구비하지 못했던 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따라서, 1919년4월23일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선포는 결연한 ‘독립 의지’의 천명이었을 뿐 ‘국가의 존재’를 실현시킨 것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이 나라의 ‘독립’은 1945년8월15일 대한민국이 유엔의 산파역을 통하여 ① 국토와 ② 국민 및 ③ 국제적으로 인정된 ‘주권’을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그 실체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1945년8월15일이 대한민국의 ‘독립기념일’이자 ‘건국절’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독립국가’의 지위를 놓고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경합하고 있는 것도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8년12월12일자 유엔총회 결의 제195(iii)호에 의거하여, 태생(胎生)의 차원에서, 존재가 부정된 ‘비합법적 존재’임이 명백하다는 엄연한 사실은 이미 위에서 논증(論證)된 바와 같다. 더구나, 1948년 정치적 분단의 시점에서 남과 북은 근본적으로 상반된 체제선택을 단행했었다. 남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적으로 개방과 경쟁에 바탕을 둔 국제화였다. 반면, 북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전근대적(前近代的)인 ‘세습 수령개인독재’로 변질된 공산주의독재, 경제적으로 사회주의 계획경제 그리고 폐쇄와 명령에 기반을 둔 고립화였다. 해방 당시 남북의 경제력은 모든 산업자원이 북에 편재(偏在)한 가운데 압도적으로 북에 유리한 남농북공(南農北工)▪남경북중(南輕北重)의 구조였던 것 역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적 분단 후 65년이 지난 오늘 남북의 두 체제는 이미 비교의 의미를 상실했을 정도로 경쟁의 성패가 판가름 나 있다. 남의 대한민국은 지금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서 신흥 선진국의 하나로 국제평화와 번영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미 자력회생(自力回生) 능력을 상실한 파산국가가 되어 세계의 모든 평가기관들이 200여개 세계 국가 가운데서 말석(末席)에 자리 매김하는 가운데 금단(禁斷)의 열매인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로 국제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불량국가(不良國家)’의 표본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식을 상실한 채 도덕적 해이(解弛)의 늪에 함몰(陷沒)된 이 나라의 정부▪여당은 당장 눈앞에 어른거리는 표(票) 사냥에 넋을 빼앗긴 나머지 ‘친북▪종북’ 세력과 연대, 제휴한 소위 ‘좌우합작’ 세력의 잔재(殘滓)들이 학계와 언론계 및 정부 안팎에 깊고 넓게 포진(布陣)하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독립기념일’과 ‘건국절’을 정당하게 지정하여 기념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을 사실상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독립’ 후 회갑(回甲)을 5년이나 넘기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이제는 내일의 대한민국의 주역(主役)이 되어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와 성취의 토대 위에서 조국통일의 대업(大業)을 넘겨받게 되어 있는 이 나라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의 바탕 위에서 무기력한 기성세대를 밀어내고 대한민국의 ‘건국절’을 올바르게 챙기는 이적(異蹟)의 주역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