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한글학자)이 권총반입...이승만 금방 붙잡혀잔혹한 고문...아버지는 시체 찾으러 감옥 찾아가선교사들 구명운동, 사형 면한 이승만 종신죄수로
  • 중죄수 복장으로 오라줄에 묶인 이승만.
    ▲ 중죄수 복장으로 오라줄에 묶인 이승만.




    이승만은 탈옥을 결심했다.

    독립협회도 민권운동도 국회의원도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린 24세 운동가는
    [
    감옥 밖에서 지도자를 찾는 민중들의 외침소리]를 들으며 하루도 견딜 수 없었다.

    이승만이 수감된 감옥은 서소문 안에 있었다.
    당시 판결문과 <고종실록>에는 이승만의 수감생활과 탈옥 경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이승만은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간성군수 서상대와 독립협회의 동지 최정식과
    같은 감방에서 울적한 나날을 보냈다
    .
    노래를 잘 한 최정식은 <
    백구(白鷗)타령>을 곧잘 불렀다.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마라...” 구성지게 목청을 뽑던 그는 어느날 [탈옥하자]는 권유를
    이승만에게 먼저 꺼냈다고 한다
    .

    당신과 나는 민회(民會)의 이름있는 사림인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려 하오?”


    한시 바삐 뛰쳐나가 민중운동을 재개하고 싶었던 이승만은 즉시 호응하여
    다시 만민공동회를 모아 독립협회를 부흥하자며 탈옥을 굳게 맹세하였고,
    즉시 주상호(周商鎬)에게 권총을 부탁했다.
    주상호는 뒷날 국어학자로 유명한 주시경(周時經)이다

    .

  • 이승만 후배 주시경.
    ▲ 이승만 후배 주시경.



    이승만과 고향(황해도 봉산)이 같고 한 살 아래인 주시경은
    배재학당과 독립협회, 독립신문 활동을 함께 한 평생동지다
    .
    탈옥을 모의한 주시경은 이승만이 탈옥 후 진행할 대중집회도 준비하면서
    권총 두 자루를 몰래 감방에 들여보냈다
    .

    이승만, 최정식, 서상대 세명은 1899130일 저녁때 감옥문을 뛰쳐나가 서소문쪽으로 달렸다. 최정식은 추격하는 순검들과 간수들에게 권총을 쏘며 배재학당 담을 넘어 도망쳤다.
    감옥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뒤쳐진 이승만은 병사에게 잡히고 말았다.

    최정식과 서상대는 양장한 여자로 변장하고 서울을 빠져나갔다.

    칼을 뽑아든 병정들에게 끌려간 이승만은 한성감옥서로 이감되어
    즉시 무시무시한 고문을 받기 시작했다
    .
    한성감옥은 종로네거리 포도청(捕盜廳) 건너편에 있던 것으로 현재 영풍문고 빌딩 근처다.

    3개월후 최정식도 체포되었다.
    평안도 진남포로 도피하여 일본으로 밀항하려던
    그는 여관 주인의 밀고로 잡혀서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
    이승만이 갇힌 방은 흙바닥의 중죄수 감방이었다.
    그의 목에는 큰 칼이 씌워지고 손은 뒤로 묶이고 발에 차꼬가 채워졌다.
    날마다 계속되는 고문은 잔혹했다.
    무릎과 발목을 묶고 두 다리 사이에 주릿대를 끼워
    두 사람이 주리를 틀고 손가락사이엔 세모난 대나무를 끼워 살점이 떨어지도록 비틀었고
    ,
    이승만을 엎드려 놓고 대나무 몽둥이로 피가 철철 흐르도록 때렸다.

    이때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훗날 이승만은 손가락을 후후 부는 버릇이 생겼다.

    그들은 나를 캄캄한 방에 쳐넣었는데 다음 날 아침까지 기절하여
    아무 일도 알지 못했다
    . 나는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적의에 찬 성난 짐승들 같았다. 족쇄, 수갑, 형틀...”
       - 청년 이승만 자서전; Autobiography of Dr. Syngman Rhee, 이정식


    그는 자신이 사형당하리라 단정했다.

    재판소에 끌려다니며 황토마루에서 광화문 관아거리를 보면서
    “십아문(十衙門을 마지막 보는구나. 어느 날에나 죽이는고” 중얼거리곤 했다.

    이승만은 아버지에게 남기는 유서를 세 번 썼고,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옹은 아들의 시체를 거둬 가려고
    몇차례나 감옥서 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

    이승만이 열여섯살 때 결혼한 본처 박 씨는 고종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가지고
    인화문 앞에 엎드려 남편을 살려달라고 사흘 밤낮이나 통곡했다
    .

    아펜젤러, 알렌등 미국 선교사들과 한규설 등 대신들도
    이승만이 사형되지 않도록 구명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
    궁내부 특진관이던 한규설이 당시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가 열 통 남아있다.

    이때 한양 거리는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오랜기간 이승만과 민권운동을 벌였던
    급진과격파 독립협회 잔존세력과 민중들이 폭력투쟁을 벌인 것이었다
    .
    수구파 대신들과 변절자들의 집들은 이들이 던진 폭탄에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들의 투쟁도 이승만의 재판에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탈옥을 주도했던 이승만은 종범(從犯)이 되고 최정식이 주범(主犯)으로 판결이 났다.
    조사결과 최정식의 총탄은 간수의 다리를 맞혔지만
    이승만의 권총은 발사한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사형장 교수대로 끌려가는 최정식이 마지막 말을 던졌다.

    이승만 씨, 잘 있으시오. 당신은 살아서 우리가 같이 했던 일을 끝맺으시오.”


    사형을 면한 이승만은 태형
    (笞刑)을 받고 종신 징역살이를 시작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석방되기까지 장장 57개월의 감방생활은
    이승만이
    [기독교적 신앙]과 자유민주적 [지도자의 국가철학]을 완성하는 운명적 시기가 된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