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주의자들이 선거로 집권했다가 쫓겨난 경우 
      
     칠레 군부는 아옌데가 과격한 체제변혁을 시도하자
    체제수호를 위하여 全軍 차원의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조갑제닷컴   
     
     공산주의자들(사회주의자들, 종북주의자들)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뒤 과격한 變革을 시도하다가 內戰的 사태를 유발, 군부 등 체제파의 반격을 부른 대표적 사례는 1970년대의 칠레이다. 한국에 他山之石(타산지석)이 될 만한 사례이다. 아래는 월간조선 裵振永 기자가 쓴 기사이다.
     
     계급투쟁설에 입각한 체제변혁 기도는 반드시 체제의 저항을 부른다. 이는 국가 생존 투쟁의 차원이므로 流血사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회주의 집단은 私有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폐쇄적 정책을 쓰므로 경제가 망가져 물가폭등, 실업사태, 성장의 중단 등 경제공황을 부른다. 예컨대 종북정권이 들어서서 물가가 年20%대, 실업률이 10%대, 청년실업률 20%대를 기록하게 될 때, 여기에다가 從北정책으로 反共자유민주 체제를 허물려고 할 때 국군과 국민이 가만 있을 수 있을까? 칠레사태를 연구하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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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칠레 역시 건국 이래 少數의 기득권층에게 富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소수의 大지주들이 전체 농지의 5분의 4를 차지하고, 자신의 농지 안에서는 중세 봉건 영주 못지않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자기 땅을 갖지 못한 농민들은 도시로 흘러들어 빈민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칠레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는 硝石(초석) 생산으로, 그 후에는 구리 생산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이들 자원을 개발한 것은 영국과 미국의 자본이었다.
      1920년대 아르투르 알렉산드리 이후 역대 정권은 노동자들의 권리보장, 사회보장제도의 확충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1964년 개혁적 右派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민주당의 에두아르도 프레이(1994년부터 2000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에두아르도 프레이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자유 속의 혁명」을 내걸고 광범위한 사회·경제 개혁들을 추진했다.
      그는 칠레에 진출한 銅鑛(동광) 회사의 주식 51%를 정부가 사들이고, 농지 개혁을 단행했다. 이러한 개혁 정책들은 당시 칠레로서는 필요한 것이었지만,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매년 물가상승률은 35%에 달한 반면, 경제성장률은 2.3%에 그쳤다.
      全국민의 40%가 여전히 영양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한번 변화의 가능성을 맛본 민중들은 더 큰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 욕구에 힘입어 아옌데는 1970년 9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아옌데는 젊은 시절 의사로 일하면서 貧富(빈부) 격차 등 칠레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들을 목격했고, 이 경험은 그를 정치가의 길로 이끌었다.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
     
      1952년 처음 大權에 도전한 이래 네 번째 출마한 1970년 大選에서 아옌데는 자신의 사회당과 공산당 등 左派 정당들을 망라한 「인민전선」의 후보로 나서 국민당(右派)의 호르헤 알렉산드리, 기독교 민주당(중도파)의 라도미르 토믹과 대결, 辛勝(신승)했다. 그는 전체 투표자의 36.6%의 지지를 얻어, 35.3%의 지지를 얻은 알렉산드리를 불과 3만9000표 차이로 눌렀다.
      칠레 헌법은 후보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전체 투표자의 과반수를 얻지 못했을 경우, 上下 兩院(양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 당선자를 결정짓도록 되어 있었다. 政派(정파)들 간의 막후 조정에 따라서는 최고 득표자가 아닌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 칠레 의회는 전통적으로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 최고 득표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왔고, 1970년 당시 諸정파들도 그러한 전통에 충실했다. 당시 기독교 민주당 사무총장 벤하민 프라도는 『아옌데의 대통령 취임을 거부하는 것은 36%의 유권자들에게 「당신들은 투표에 참가할 권리는 있지만 승리할 권리는 없고 언제나 2등이나 3등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아옌데가 당선되자 미국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軍部와 右翼 정당·단체들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사주하는가 하면, 憲政 질서에 충성하는 참모총장 슈나이더 장군을 암살하도록 조종하기까지 했다. 이런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 아옌데는 체 게바라와 胡志明의 사진을 흔들면서 열광하는 군중들 앞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제국주의적 착취를 타도하고, 독점을 없애며, 진정하고 충분한 농지개혁을 실행할 것이며, 은행 등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할 것』을 약속했다.
     
      아옌데, 민중들의 욕구분출 통제 못해
     
      아옌데 취임 후 1년 반 사이에 최저 임금은 35%가 오르고, 물가는 동결되었다. 빈민층을 위한 각종 복지·의료 제도가 확충되었고, 빈민들에게 우유와 의약품이 무료로 제공되었다. 농업노동자 조합 결성,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 농지개혁 등이 추진되었다. 공업생산은 14.6%로 증가한 반면, 실업률과 인플레율은 떨어졌다.
      그러나 칠레의 기층 민중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옌데가 집권하자 「혁명의 滿潮期(만조기)」가 도래한 것으로 착각했다.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極左(극좌)단체인 MIR(혁명좌파운동)의 지도 아래 地主들의 땅을 무단 점유하기 시작한 도시빈민들의 행동은 아옌데 집권 후 더욱 고조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점유한 지역 내에 자치 행정기구와 인민재판소·무장 민병대를 설치하고 공권력에 맞섰다. 수도 산티아고 인근 공장지대의 노동자들도 MIR 등 극좌단체들의 지원을 받는 무장 민병대를 만들었다 (1973년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는 이들 무장 민병대의 훈련에 쿠바·북한 요원들이 간여했다고 주장했다).
      度를 넘어선 기층 민중들의 행위에 대해 아옌데 정권은 일관성 있게 대응하지 못했다. 어떤 경우에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私有 재산을 침탈하는 행위를 단속하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들 기층 민중들의 공동체를 인정하고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들의 요구는 끝이 없었다. 정부가 학교건설을 위해 벽돌을 지원하면 더 질 좋은 벽돌을 요구했고, 교사들을 파견하면 부모 스스로 자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겠다며 어깃장을 놓았다.
      1971년 12월 산티아고에서 대대적인 反아옌데 시위가 벌어졌다. 「빈 냄비들의 행진」으로 알려진 이 시위에는 약 5000명의 중산층 주부들이 빈 냄비를 두드리면서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로 야기된 물자부족 사태에 대해 항의했다.
      1972년 봄에는 광산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10월에는 개인트럭 운수사업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발단은 정부의 새로운 국영운송회사 창설 계획 때문이었다.
      이 조치는 아옌데가 「트럭운수업은 國有化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뒤집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트럭운수업자들의 파업으로 칠레의 物流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 파업은 이례적으로 「가진 자들의 파업」이었는데, 그 배후에는 美 CIA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파업과 상인들의 買占賣惜(매점매석)으로 물자부족 사태가 심화되자 기층 민중들은 규찰대를 조직해 物流 창고들을 접수, 물자들을 배급하는 것으로 맞섰다.
     
      軍部, 아옌데에게 충성하는 참모총장 불신임
     
      가톨릭 대학 학생들과 「조국과 자유」 등 右翼 청년단체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아옌데 정권을 비판하면, 노동자들도 몰려나와 『아옌데! 아옌데! 우리가 그대를 지켜주리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를 누볐다. 아옌데 역시 이러한 집회·시위장에 얼굴을 내밀고 「중단 없는 혁명」을 외쳐대곤 했다.
      반면 의사·변호사·금융인 등 전문직 종사자들은 아옌데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정권으로부터 마음이 떠나가는 右翼·중도층을 달래기 위해 아옌데는 프라츠 장군 등 현역 장성 세 명을 각료로 기용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경제면에서 아옌데는 사회주의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집권 후 2년 남짓한 기간 중 산업시설의 35%, 농지의 40%가 국유화되었다. 銅鑛(동광) 회사들은 「이미 칠레에서 과도한 富를 수탈해 갔다」는 이유로 보상 없이 지분을 몰수당했다. 이러한 「혁명적」 조치는 아옌데로서는 합리적인 것일지 몰라도 시장경제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자, 국제법상으로도 불법적인 것이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칠레에 제공되는 세계은행 차관 등을 차단했고, 이는 칠레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경제·사회 혼란이 계속됨에 따라 1972년 말부터 경제 지표들이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는 것으로 보이던 칠레 경제는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칠레 총 수출액의 80%를 차지하는 구리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진 것도 경제 위기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1972년 말 인플레는 160%였고, 1973년 전반기에만 300%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반면, 아옌데는 쿠바·중국과의 관계를 증진시켰다. 1971년 카스트로가 칠레를 방문, 아옌데와 함께 反帝 투쟁과 사회주의의 승리를 외쳤다. 중국과 정치적·경제적 관계도 증진되었다. 중국 수상 周恩來(주은래)는 아옌데에게 서신을 통해 「혁명을 서두르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로 동지적 유대를 보여 줬다.
      1973년 6월29일 산티아고 제2기갑연대 병력 100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대통령관저를 포위했다. 이 쿠데타는 3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이때 40여 일 후 쿠데타의 주역이 되는 피노체트 장군은 현장에 나가 진압군을 지휘한 장군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해 8월22일 300여 명의 장교 부인들이 국방장관 겸 참모총장 프라츠 장군의 집 주변으로 몰려가 아옌데에게 충성하는 프라츠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는 軍部가 프라츠, 더 나아가 아옌데를 불신임한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다음날 프라츠는 사임했고, 아옌데는 후임 참모총장에 피노체트 장군을 임명했다.
      위기가 계속 심화되자 1973년 9월 초 아옌데는 자신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 그 결과에 따라 국회를 해산하고 總選을 실시함으로써 정국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軍部가 행동을 결심한 다음이었다. 피노체트 육군참모총장, 구스타보 레이그 공군참모총장, 호세 토리비오 메리노 발파라이소 해군기지 사령관 등은『칠레에서 공산주의의 癌(암)을 일소』하기로 결의했다. 軍部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실패한 대통령의 최후
     
      9월11일 새벽 발파라이소 주둔 해군병력들이 발파라이소市의 左翼 인사 3000여 명을 체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행동을 개시한 칠레 軍部는 순식간에 칠레 전역을 장악했다. 아옌데는 쿠데타軍의 해외망명 종용을 묵살하고,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宮으로 달려갔다. 여기서 그는 對국민 고별연설을 남겼다.
      『이것이 내가 국민 여러분들에게 연설하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이 순간 나는 인민에 대한 충성을 목숨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칠레의 군인으로서 맹세를 배반한 자들에게는 도덕적 형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들은 힘이 있고 나를 부술 수도 있지만, 사회의 전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본인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누군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 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좀더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 여러분들과 함께 믿습니다. 칠레여, 영원하라!』
      방송연설을 마친 아옌데는 카스트로가 선물한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쿠데타軍에 저항했다. 쿠데타軍의 전폭기가 모네다宮을 폭격했다. 정오가 조금 지나 쿠데타軍이 모네다宮에 진입했을 때 아옌데는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옌데를 지지하는 무장 민병대들이 간헐적으로 쿠데타軍에 저항했지만, 곧 분쇄되었다.
      칠레의 右派 정치인들은 과거 1930년대 초 칠레 軍部가 그랬던 것처럼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위기 극복을 위한 軍部의 일시적인 출동으로 이해하고, 쿠데타를 환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군사정권의 정치적 후견인 내지 자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짧은 기간 동안의 軍政 뒤에는 자신들이 정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빗나갔다. 軍部는 左翼 세력뿐 아니라 右翼 정파들도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 이후 16년간 鐵拳(철권) 통치와 자유주의 경제를 접목시킨 독재정치를 펴나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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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례의 쿠데타는 박정희식으로 軍의 일부가 정권을 잡기 위하여 나선 게 아니라 全軍이 체제 수호를 위하여 출동한 게 특징이다. 한국에서 박정희식 쿠데타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헌법5조에 의하여 국가안전보장의 최종 수호자로 지명된 국군은 공산혁명세력에 의하여 자유민주체제가 뒤집혀진다는 판단을 할 때 救國차원의 合憲的 출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