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前대통령은 탁월한 애국계몽·독립운동가”교과서엔 중추원 의관 역임사실 및 매일·제국신문 창간 빠져
  • 최근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임에도 불구, 4.19를 계기로 부패한 독재자로 낙인이 찍힌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 ▲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은 30일 1차 학술대회를 열어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쟁점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은 30일 1차 학술대회를 열어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쟁점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은 30일 ‘이승만 연구의 흐름과 쟁점’을 주제로 한 1차 학술회의를 개최했는데, 기조강연에 나선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건국대 이주영 명예교수는 “현행 고교 교과서 기술을 위주로 분석적인 연구와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또 “이승만은 90년의 생애동안 수많은 사건에 연루돼있고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며 “청년기엔 애국계몽운동가, 중년기·노년기엔 구미위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고 독촉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가로서 역사적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이에 반해 좌편향 논란을 빚고 있는 현행 고교 교과서는 대부분 이승만을 단독정부 수립 제안자로서 분단의 책임을 거론하거나 1948년 건국과정의 의미를 왜곡-축소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이 교수는 만민공동회에 적극 참여한 것에 대한 서술이나 중추원 최연소 의관으로 활동한 내용은 없고, 최초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이나 순 한글신문으로 유명한 제국신문을 창간한 이종일은 언급하면서도 그 사업 파트너인 이승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조선왕조의 쇠망을 경고한 최초의 신체시 ‘고목가’를 쓴 사실을 언급한 교과서는 전무하다는 것이 고교 한국사 교과서 6종 및 한국근현대사 7종을 분석한 이 교수의 설명이다.

    아울러 그는 교과서들이 독립운동으로 보는 것이 주로 무장투쟁이기 때문에 외교독립론에 따른 활동과 역할을 주목하지 않고, 서술 역시 빈약하고 편파적인 홀대를 받는다고 밝혔다.

    다만 고종황제가 을사조약 무효화를 위해 미국에 지원을 호소한 것을 간단히 언급하거나 이승만과 헐버트를 미국에 보낸 사실과 헐버트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점, 1949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한 헐버트가 사망했다며 헐버트 사진과 함께 게재한 사례는 있었다.

    일부 교과서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까지 거론하면서도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멸망에 대한 미국 책임을 계속 추궁한 이승만에 대한 기술내용은 전혀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이승만이 윤병구 목사와 함께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면담한 사실을 게재한 교과서도 없으며 3.1운동과의 관계 역시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의 활약상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신 독립운동가로서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 선출된 뒤 곧이어 상해의 통합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에 선임된 사실은 기술돼있으나, 교과서에는 주로 백범 김구의 활동에만 착목하고 있다는 것이 지적됐다.

    이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다거나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탄핵을 받았다는 사실 등이 부정적으로 서술돼있고,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의회에 한국독립안이 제출되고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인으로 오인되는 한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한인 신분증을 발급받도록 했던 노력은 무시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한인 학살사진을 미국에 알린 것과 임시정부와 미국 OSS(美육군 전략처)가 협의해서 한반도 진공작전을 추진하려던 계획의 입안자가 바로 이승만이란 내용은 없는 것으로 분석됐다.

    해방이후 건국운동가로서 업적에 대해서는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한 기술이 간혹 나타날 뿐 ‘정읍발언’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제안, 분단책임자인 것처럼 촛점이 맞춰져있기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학계에선 1946년 6월3일 정읍발언이 나오기 1년 전인 1945년 9월20일에 스탈린이 한반도 단독정부 수립을 지시한 전문을 보낸 사실에 대해 현행 교과서는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와 관련, 이주영 교수는 “이승만과 그를 도운 건국세력의 역할에 대한 서술이 빈약하다보니 대한민국이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뤄졌다거나 1948년에는 단지 정부만 수립됐다는 소위 ‘1919년 건국설’이 끼어들 여지를 남기고 있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이 교수는 민족주의·민중주의 명분, 중국을 위주로 한 대륙문명권에 집착하는 ‘위정척사론’의 풍토가 강한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개화파 전통과 자유주의적인 인물이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한편 그는 우리사회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된 이승만의 건국준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1948년 건국과정에 대한 역할 및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세력의 활동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