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남해로 침투한 북한 수송선 특공대 600명을 수장
  • [태평로] 백두산함(艦)은 증언한다

    문갑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윤숙이,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돼요. 뉴욕의 존 스태거씨에게 꼭 전해야 합네다."
    문서를 건네주는 노(老)대통령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걸 받아든 이는 시인 모윤숙(毛允淑)이었다.
    1949년 어느날 경무대(景武臺:대통령관저)에서 있었던 장면이다.

    '진해를 미군에게 맡길 테니 군사원조를 해달라!' 이런 민감한 내용의 친서를 외교관 아닌 젊은 여성에게 맡긴 사연이 있었다. 한 달 전 같은 일을 공직자에게 시켰더니 일본 하코네(箱根)온천에서 기생 끼고 농탕치다 편지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60년 전 우리 수준은 그랬다. 인적자원이 이 지경에, 팔아먹을 천연자원도 없었다. 그래서 일제가 만든 군항(軍港)에 미군을 끌어들여 안보도 다지고 달러를 받아 맨주먹뿐인 군대까지 무장시키자는 일석이조의 꾀를 낸 것이다.

  • ▲ 대한민국 건국기 주요한 국제활동을 맡았던 여류시인 모윤숙씨.
    ▲ 대한민국 건국기 주요한 국제활동을 맡았던 여류시인 모윤숙씨.

    트루먼이 무시하는데도 자존심 센 이승만이 끝내 매달린 이유가 있었다. 독립운동 시절 진주만기지에서 본 미국 함대와 해군 때문이었다. 그때 받은 감명이 하도 깊어 그는 항상 '육해공(陸海空)'을 '해육공(海陸空)'으로 바꿔 불렀다.

    당시 우리에겐 함정이 36척 있었지만, 미국제 소해정(掃海艇) 몇 척 빼면 어선이나 다를 바 없었다. 번듯한 전함(戰艦)은 이승만의 염원이자 해군의 바람이었다. 그 비원(悲願)으로 1949년 6월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가 발족했다. 해군이 봉급에서 성금을 떼자 아내들은 천막에서 작업복을 지어 팔았다. 이렇게 석 달간 1만5,000달러를 모았다. 딱 중고 전함 한 척 값이었다.

  • ▲ 6·25전쟁 당시 '부산 대첩'(대한해협 해전)에 사용됐던 백두산함 모습. /조선일보 DB
    ▲ 6·25전쟁 당시 '부산 대첩'(대한해협 해전)에 사용됐던 백두산함 모습. /조선일보 DB

  • ▲ 이승만대통령
    ▲ 이승만대통령

    전함구매단이 미국에 가서 1만8,000달러를 주고 산 게 무게 450t짜리 구잠함(驅潛艦)이었다. 퇴역해 벌겋게 녹슨 배를 되살리려 구매단은 수리공·페인트공이 됐고 그해 12월 26일 오전 10시 명명식이 열렸다.

    백두산함(艦)은 가는 곳마다 동포를 울렸다. 마스트에 태극기가 처음 걸릴 때는 군인이, 포·레이더를 구하러 간 하와이에선 사탕수수밭 노동자가, 포탄 사러 간 괌에선 징용갔다 미처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들이 울었다. 처음엔 배가 너무 초라해, 나중엔 그래도 조국의 첫 전함이라는 뿌듯함이 눈물샘을 건드렸다.

    백두산함은 진해에 도착한 한 달 반 뒤 6·25전쟁이 터지자 진가를 발휘했다. 부산항으로 접근하던 소련제 수송선을 대한해협에 수장(水葬)시킨 것이다. 거기엔 북한특공대 600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남한 항구 중 접안(接岸)시설은 부산에만 있었다. 백두산함이 없어서 부산이 함락됐다면 한국에 온 100만 병력과 물자는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남쪽으로 밀리던 국군은 뒤통수를 맞고 전멸하고 그와 함께 대한민국도 사라졌을 것이다. 해군과 군항은 이렇게 운명을 가른다.

    문제는 우리 해군의 발전에도 상황은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위에는 북한, 왼쪽엔 중국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한국 해군을 반나절 안에 궤멸시킨다는 전력의 일본이 있다. 이 중 누구라도 제주 남방해로를 1주일만 틀어막아도 한국은 고사(枯死)한다. 원유·곡물·원자재가 그곳을 지나기 때문이다. 그런 요충이기에 군을 그렇게 싫어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제주해군기지건설에 반대하지 않았다.

    거기서 종북(從北) 얼간이들이 날뛰고 겁쟁이 정권은 끌려 다녔다. 백두산함의 넋이 살아있다면 몇줌 안 되는 김정일 추종세력에 앞서 그들을 겁내 국민의 생명줄조차 못 지키는 비겁한 정권을 향해 분노의 포신(砲身)을 돌렸을 것이다. (조선일보. 201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