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에 생각 한다
     6‧25를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맥 놓고 있는 대한민국을 예고 없이 급습한 김일성의 만행으로 비롯된 것이고 그 당시로서는 응전조차 힘에 겨워 절망적이었던 대한민국을 미국을 비롯한 우방 국가들이 달려와서 도와준 까닭에 겨우 살아남았다면 그게 무슨 전쟁인가, ‘6‧25 동란’ 정도가 타당한 명칭이 될 것이라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어쨌건 그 ‘동란’을 겪으면서 우리는 “공산주의란 인류의 적이다”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은 다 죽고 지금은 없지만 도대체 인류를 위해 잘한 일이 뭔가 따져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오늘의 러시아, 오늘의 중국, 오늘의 북한을 만들었다면, 그 나라들의 인민이 얼마나 행복하게 사느냐를 논하기에 앞서 그 독재자들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 피 흘린 사람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들의 주체하기 어려운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6‧25 동란이 터진 것이고 우리들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 흉악한 공산주의는 일단 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 미련을 가지고 그 시대를 동경하는 얼간망둥이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북을 치고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은 진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이 날을 맞아,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많은 순국용사들에게 살아남은 우리는 그리고 그 후손들은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재일학도 의용군 동지회의 황무영 상임고문이 6‧25 61주년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습니다.

    <재일한국동포학생들의 조국사랑>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의 후원 하에 무력 남침하였다. 절체절명 존망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재일한국인 학생 약 1500여명이 집결하여 참전을 결의하였다. 그중 642명이 주일 미국 육군 제8군 (당시 8군사형부는 도쿄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한국전선 확대로 인해 서울로 이동)에 7월 자원입대하여 약 2개월간의 훈련 후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9월 28일 수도 서울 수복작전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악전고투하는 미군에게 한국어, 영어, 일본어에 능통했던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은 한국전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들은 다른 주요 전투에서도 용맹하게 싸워 52명 전사, 83명 실종, 그리고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 당시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은 어떠한 보장이나 보상도 없이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위해 참전하여 그들의 청춘을 바쳤다. 이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의 역할이 현재 카투사(KATUSA)제도의 시작이 되었다.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의 조국 사랑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올해 한국전쟁 발발 61주년을 맞이하여 6월 25일을 기해 조국 한국을 위해 피 흘린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재일동포 학도의용군 기념비는 인천시내 수봉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