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나중에는 이순신 장군이 힘들게 건설해 놓은 조선 수군을 칠천도에서 속된 말로 ‘말아먹은’ 원균. 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절대 비길만한 그릇이 못 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옛 자료를 뒤적이다 원균에 대한 주변인사들의 다소 괜찮은(?) 평가들을 발견했다그 내용들을 살펴 보았다.

    1. 병조참의 조인득의 평가

    함경도 종성에서 원균을 만나봤사온데, 그는 비록 적군이 만 명이 넘는다 해도 앞에서 가로질러 돌진하는 용장이었습니다.

    2. 우의정 이원익의 평가

    원균은 성질이 몹시 억세어 윗사람이 공문을 보내어 지휘하면 반드시 다투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쟁에 임해서는 쓸만한 장수 입니다. 그에게는 군사를 미리 주지 말고 전쟁에 임해서 군사를 주어 돌진케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선조 29 10 5)

    3. 영의정 유성룡의 평가

    예로부터 육장은 해전을 못하고 수장은 육전을 못하나, 원균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워 그 모두에 능합니다. 그러나 피로한 군졸을 잘 어루만지지는 못합니다. (선조29 11 7)

    4. 지충추 정탁의 평가

    해전은 원균의 장점입니다. 이제 그의 단점들을 버리고 장점을 취해 쓰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선조 29 11 7)

     5. 이덕형의 평가

    원균이 경상 우수사로 있을 적에 돌격할 때 머뭇거리는 병사가 있으면 가차없이 칼로 내리쳤습니다. 이 때문에 원수사가 미쳤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선조 34 1 17)

     6. 의병장 조경남의 평가

    원균이 가진 배의 수는 적었지만 돌격은 잘합니다. (난중 잡록)

     
    이 내용들을 보면 어떤 사람은 "어? 원균도 유능한 장수였나?"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원균에 대한 좋은 기록은 위에 열거한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쁜 기록은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들, 평가를 보면 대부분 자신이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누가누가 그랬다더라'는 식의 소위 '카더라' 통신이다

    역사기록을 살펴볼때 원균이 충무공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덩치가 좋았다는 것과, 정치적 연줄이 좋았다(서인의 영수 윤두수 계열이었다고 한다.)는 정도일 것이다. 원균이 종성부사, 경상우수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거친 것은 능력보다도 정치적 연줄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실록 어디에도 원균이 북방에서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시전부락 전투에 참가한 여러 장수 중에 원균의 이름이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전투를 총지휘한 것도 아니었다또한 임진왜란 직전 조정에 유능한 무장들의 명단이 올라오는데, 그 명단에도 원균의 이름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직에 기용된 것은 정치적 배경 외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가 활동한 시대의 행적이나 평가를 보았을 때, 원균은 용력은 있으되 머리는 부족한 장수로 추측된다. 게다가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장수로 보인다. 기록들에도 원균은 성질이 억세다고 적혀 있으니, 부하들의 신망을 얻은 장수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공을 세운 것도 없고 부하들의 신망도 받지 못하는 원균이 중용된 것은 사실 당시 조선왕조의 능력이 딱 그 수준밖에 안 된다는 반증일 것이다. 원균도 문제지만, 그보다 적절한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배치하고 그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하는‘국가 리더십의 부재’가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국가 리더십에 문제가 있으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 질 수 있다는 걸 역사는 증명한 셈이다. 조선왕조가 엉뚱한 사람을 중용하는 사이, 수 많은 백성들의 고통은 높아지고 국가는 피폐해 졌다.

    지도자들의 현명한 눈과 실력 중심의 인재등용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사활적 문제라는 것.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만고 불변의 원칙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