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식민지(植民地) ⑳  

     다음날 아침, 눈을 뜬 나는 침대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지난밤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금방 드러났다. 서순영의 체취가 아직 진하게 남겨져 있었고 베개의 눌린 자욱까지 생생했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벽시계가 오전 6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서순영까지 만주 땅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김일국과 박무익 그리고 완이의 얼굴까지 차례로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서 서순영의 뜨거운 몸도 다시 떠올랐다. 거친 호흡과 신음도 뒤에 울리는 것 같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머릿속에 가득 갈등과 고뇌를 담고 있을 때도 먹고, 자고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인간은 그렇게 행동 할 수밖에 없다.

    서순영의 아버지가 헌병대 보조원이라니. 놀랍지는 않다.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행태를 보면서 서순영의 반발심은 더 솟았을 테니까. 가족이 친일 반일로 나뉘어 일하면서 서로 협조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가족만 무사하면 되지 않겠는가?

    씻고 회관의 식당으로 나왔을 때는 오전 8시쯤 되었다.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평양 YMCA의 책임자 오구현 목사가 나에게 말했다.
    「서순영씨가 집에 다녀온다면서 아침에 나갔습니다.」

    오목사가 탁자위에 놓인 가방을 집어 내 앞에 놓았다.
    「이 가방을 선생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가방을 받은 내가 뚜껑을 열었다. 예상했던대로 YMCA에 반납할 물건과 편지 봉투도 넣어져 있다. 겉봉에 사직서라고 씌어진 글자를 본 내가 서둘러 다시 넣고는 뚜껑을 닫았다.

    「경성에 일이 생겨서 오늘 돌아가야될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더니 오구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추운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랬을까요?」
    건성으로 대답한 내가 마친 날라져온 밥그릇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꿈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과연 절반이라도 실현이 될 것인가?

    그때 오구현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은 일본놈들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지만 절대로 일본화는 되지 않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나는 밥을 떠 입에 넣었다.

    모두 그런다. 경성에서 모인 애국 동지들도 격론을 벌이다가 맨 나중에는 그렇게 말하고 자위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쪽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일본이, 총독부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것인가? 친일 분자들이 그 말을 들으면 웃을지도 모른다.

    식사를 마친 나는 평양역으로 나와 기차를 탔다. 올적에는 서순영과 둘이었는데 갈적에는 혼자가 되었다.

    「다음에 오실 때는 학생들이 더 모일 것입니다. 이번 강연이 소문이 났을 테니까요.」
    역으로 배웅 나온 오구현이 말했으므로 나는 역 위쪽의 하늘을 보았다. 1912년 정월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랐지만 매섭게 추운 날씨였다.

    「목사님께 잘 부탁드리고 갑니다.」
    내가 동문서답으로 대답했지만 40대 중반의 오구현이 정색하고 말을 받는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경성에 다시 검거 바람이 분다니 선생님께서 몸을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열차가 떠난다는 기적이 울렸으므로 나는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는 오구현에게 머리를 숙여보이고는 열차에 올랐다. 문득 서순영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으므로 나는 어금니를 물었다.

    서순영도 곧 이곳에서 열차를 탈 것이다. 북행 열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