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식민지(植民地) ⑧  

     「우리 힘으로 독립을 찾지 못하면 식민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더니 이상재는 머리를 끄덕였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 속을 내가 모르겠는가? 이를 악물었던 나는 문득 이틀 전 오산 교외에서 총살당한 그 독립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심정도 지금의 나와 비슷했으리라. 오죽 답답했으면 잠자코 구경만 하는 백성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겠는가?

    생각을 떨구려는 듯 머리를 저은 내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 민중 교화도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대한제국 시절보다 몇백배나 더 상황이 나쁩니다.」
    「그렇다고 이 불쌍한 백성을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불쑥 말을 뱉은 이상재가 외면을 했으므로 나는 옆에 앉은 박무익을 보았다.

    깊은 밤이다. 오늘은 YMCA 서적실에서 이상재와 함께 박무익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이상재가 외면한 채 말을 잇는다.
    「일본놈들은 수십년에 걸쳐서 조선 상황을 제 손금 보듯이 파악했어. 지금은 임진년 왜란때하고도 다르네. 사지가 꽁꽁 묶인 데다 머리마저 없어진 판국이라네. 백성들은 이제 순한 소처럼 일본놈에 끌려 밭일을 하다가 잡아먹히겠지.」

    그때 박무익이 헛기침을 했다.
    「대감, 우리가 일찌감치 임금을 처단하고 새 세상을 만들었다면 이 꼴이 안되었습니다.」

    나는 숨을 멈췄고 이상재도 놀란 듯 박무익을 보았다.
    이상재의 주름진 눈이 번들거리고 있는 것은 분명 분노 때문이리라.
    나도 놀랐다. 박무익은 6년 전만 해도 임금을 위한 의병장이었다.

    우리 둘의 시선을 받은 박무익이 말을 이었다.
    「임금을 없애고 대감이나 또는 여기 계신 이공을 지도자로 모셨다면 이런 세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보게 박공.」
    하고 이상재가 말을 막았지만 박무익은 머리까지 저으며 말을 잇는다.

    「소인이 밖에서 보았더니 조선 사정이 더 잘 보였습니다. 이씨 왕조가 제 왕권 보존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런 신세가 된 것이오. 이제 왕이 허수아비가 되었으니 우린 새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일본과 싸워야 합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이제는 이상재도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 그런데 누가 새 지도자가 되겠는가?
    나에게는 그것이 꿈같은 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박무익이 말한 그 순간까지 새 지도자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때 박무익이 길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소인은 내일 다시 만주 땅으로 갑니다.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과 쫓고 쫓기면서 단련이 될 것입니다.」

    박무익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독립군 군세가 3백에서 5백, 1천, 1만명으로 늘어나 만주벌판을 장악하게 되면 빼앗긴 강산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순간 박무익을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어린 학생들 앞에서 미국의 문명을 이야기 해주는 자신의 모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졌다.

    엊그제 오산에서 그 독립군은 바로 나한테 대고 그 말을 쏟아낸 것이나 같다.
    만주벌판에서 싸우다가 이름모를 일본군 병사가 쏜 총탄에 맞아 죽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애국이다.

    그때 대답을 이상재가 했다.
    「나는 이제 늙었으니 우남이 박공의 짝이 되어야지. 그래서 새 조선을 일으켜야지.」

    이상재의 목소리는 떨렸다. 새 조선이란 말이 걸렸지만 나는 가만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