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곱 번째 Lucy 이야기 ①  

     돌아왔다.
    수기를 덮은 내가 길게 숨을 뱉았다.
    1904년 11월 4일 오후 1시에 제물포항을 떠난 이승만이 1910년 10월 10일 오후 8시에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만 5년 11개월이다.

    그 5년 11개월 동안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 정치학 박사를 취득하고 돌아왔다. 나는 이승만의 미국 체류기간 5년 11개월이 한성감옥서의 5년 7개월과 비슷한 기간이라는 것에 묘한 느낌을 받는다.

    한성감옥서의 5년 7개월간 이승만은 방대한 양의 독서를 했으며 엄청난 집필을 했고 감옥서 안의 애국 동지들과 교화를 주고받았다. 이승만이 수기에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사형 당하기 직전의 동지로부터 받은 감동이 인생관 내지는 국가관으로 고착되었으리라. 포용하라. 우선 뭉쳐야 한다.

    수기를 읽은 나까지 그렇게 해야 된다는 생각이 박혀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오가는 시간을 뺀 미국유학기간이 또 5년 7개월이다. 이 외부에서의 5년 7개월간 이승만은 황제의 비공식 밀사로 루즈벨트를 만났으며 덴버에서 열린 전 미국지역 교포 대표자 회의에서 애국동지회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조선인 최초의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나는 소파에 등을 붙이고 앉아 어둠에 덮인 창밖을 보았다.
    1910년이니 1백년 전의 일이다. 한성감옥서의 5년 7개월이 내적 단련의 기간이라면 미국에서의 5년 7개월은 외적인 성취와 인정을 받는 기간이 되겠다. 그리고 미국에서 지낸 기간 동안 이승만은 강대국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회 지도층, 식자(識者)들과 부대끼며 약소국의 생존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장차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가장 중요한 원소(原素)가 되지 않았을까?

    탁자 위에 놓인 전광시계가 밤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남대문역에서 내린 이승만의 가슴은 납덩이가 든 것처럼 무거웠으리라. 미국에 보내졌던 외아들 태산은 필라델피아의 공동묘지에 떼어놓고 온 길이다. 그리고 조국은 이미 일본 총독부의 통치 하에 놓여진 식민지가 되었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으므로 나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발신자를 보았더니 모르는 번호가 떠있다. 머리를 기울였던 내가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영어로 응답했더니 상대방은 이초쯤 가만있다가 대답했다. 사내의 목소리였다.
    「아, 거기 루시 존스씨를 찾습니다만.」
    「네, 전데요.」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사내가 차분하게 말을 잇는다.
    「전 최영선이라는 사람으로 로스엔젤리스의 김동기씨한테서 루시양의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
    「아, 그러세요?」

    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김동기씨가 또 무슨일을 저질렀는가?

    그때 사내가 정확한 발음의 영어로 말했다.
    「김동기씨가 루시양을 만나보라고 해서요. 내일 시간이 나시면 연락 주시겠습니까? 참고로 저는,」

    호흡을 가누려는 듯 잠깐 말을 멈췄던 사내의 목소리가 송화구에서 이어졌다.
    「제 부친이 1947년에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비밀 요원 중의 한사람이었지요. 저는 돌아가신 부친한테서 그 내막을 소상히 들었고 증거 자료도 갖고 있습니다.」

    난데없는 일이었지만 김동기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일 것이었다.

    그때 사내의 목소리에 열기가 띄워졌다.
    「김동기씨가 루시양한테 그 증거와 함께 사건 이야기도 해 주라고 하셨거든요.」

    물론 그냥 부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