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단련 ⑳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일본인 유학생을 가끔 만났지만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래서 웨스트(Andrew. F .West) 대학원장을 만나러 갔다가 소개받은 시바다는 내가 이야기를 나눈 유일한 일본인 유학생이 되겠다.

    시바다는 아예 「시드니」라는 미국명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도쿄 출신으로 31세였으니 나이도 꽤 들었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으로 웨스트의 총애를 받는 것 같다.

    그 날 대학원장실을 나온 우리가 건물 로비에 놓인 의자에 앉았을 때 시바다가 물었다.
    「이형은 언제 귀국하십니까?」

    시바다의 영어는 유창했다. 옷차림도 깔끔했고 세련되어서 한눈에도 돈 많은 유학생 표시가 난다.

    내가 시바다의 머리 뒤쪽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글쎄, 돌아갈 조국이 없는 몸이라 기약 할 수가 없군요.」
    「내가 조선에 계신 숙부한테서 들었는데 조선 의병이 도처에서 출몰한다고 하더군요.」

    나는 시선만 주었고 시바다의 말이 이어졌다.
    「내 숙부는 전라도지역 헌병 책임자지요. 작년에는 1백회 이상 전투를 치뤘다고 합니다.」

    1905년의 을사늑약 후로 1907년에 군대가 해산되자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 병사들이 의병에 주도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조선 땅의 의병활동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쓴웃음을 지은 내가 헌병 책임자의 조카를 물끄러미 보았다.
    「시바다, 당신 숙부는 뭐라고 합디까? 일본이 조선을 속국화 시킬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디까?」
    「이미 동체(同体)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뻔한 일을 왜 묻느냐는 표정을 짓고 시바다가 나를 보았다.
    「조선인의 의병 무리는 곧 진압될 것이라고 합니다. 숙부는 의병 활동이 통치 강화에 명분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명분을 주었다고 말이오?」
    「그렇습니다. 조선은 이제 일본과 동체요. 3백년 전의 조선 정벌과 다릅니다.」

    시바다는 지금 임진왜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표정을 본 시바다가 빙그레 웃었다. 대담하고 당돌한 자였다.
    조선인 앞에서 대놓고 이런 말을 하는 일본인은 처음 보았다. 죽은 아카마스와는 전혀 다른 유형이다.

    시바다가 말을 잇는다.
    「당시의 조선 왕은 무능했어도 조선 백성이 왕실을 중심으로 뭉쳤지요. 극히 소수만 제외하고 일본군을 타도하자고 나섰지만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시바다가 이제는 정색하고 나를 보았다.
    「지금은 일본군이 조선 전국을 점령한데다 조선 통감부에서 통치를 시작한지 벌써 4년이요. 조선 대신들은 보호조약에 서명을 했고 군대는 해산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불쌍하게 여기겠지만 3백년 전처럼 뭉치지는 못합니다. 지도층이 썩고 분열 되었거든요.」

    나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맞다.
    그리고 이 일본 역사학도는 아마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리라. 윌슨 총장의 총애를 받는 조선인 만학도 이승만에 대해서는 프린스턴 대학생은 물론 하버드에까지 알려져 있다고 들었다.

    시바다는 내 기세를 꺾을 작정을 하고 도전하고 있다. 내가 조선인 애국동지회 회장이라는 것도 알 것이다.

    「시바다. 부디 오래 사시오. 그래서 조선이 다시 독립하는 것을 봐 주시오.」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시바다가 다시 빙그레 웃었다.
    「이형, 내가 아카마스공처럼 일찍 죽지는 않습니다. 오래 살아서 일본과 조선의 합체가 더욱 굳어진 것을 볼 겁니다.」

    이자는 나와 아카마스의 관계도 아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