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단련 ⑲  

     나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서부의 대동보국회는 공립협회와 적대관계였다가 스티븐스 암살사건에 협동함으로써 협조관계가 되었다. 장인환은 대동보국회, 전명운은 공립협회 소속이었던 것이다.

    스티븐스를 실제 사살한 장인환은 1909년 1월 캘리포니아 고등법원에서 2급 살인죄로 25년형을 받았지만 전명운은 곧 풀려났다.

    나는 덴버의 애국동지 대표자회의에서 회장이 되었으나 조직을 만들지는 않았다. 학업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나는 박용만에게 애국동지회에 참가했던 각 지역 대표자들 앞으로 일일이 편지를 써 건넸다.
    회장 이름으로 발행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편지가 되었다. 현지 내용은 모든 조선인 단체는 하나로 뭉쳐야 더욱 큰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각 지역 대표자들은 모두 조선인 단체의 장(長)이거나 간부들이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가능한 일이다.

    박용만이 떠난 며칠 후에 나는 필라델피아 공동묘지에 매장되어있는 태산의 묘를 찾았다.
    이역땅에 외롭게 묻혀있는 내 아들의 묘를 찾을 때마다 나는 만감(萬感)에 젖는다.

    태산의 묘비에는 「TAISANAH」라고 적혀져 있는데 내가 「태산아」하고 불렀기 때문에 머피 부인이 그렇게 석공들에게 일러주었던 것이다. 늦은 오후여서 공동묘지에는 참배인이 서너명 뿐이었다.

    묘비 앞에 선 내가 가져온 꽃을 내려놓고 시든 꽃을 집어 버렸다. 내가 지난달에 가져왔던 장미다.

    「태산아 어느덧 네가 간지 3년이 되었구나.」
    태산의 얼굴을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네가 살아 있다면 열한살, 너는 앞으로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갈거야.」

    이렇게 태산과 이야기하는 순간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죄책감도 옅어지면서 태산이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또한 태산의 묘 앞을 회개의 장소, 결의를 다지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열심히 말을 잇는다.
    「네 어머니는 만나 보았느냐? 너를 그렇게 아끼던 할아버지는?」

    태산의 맑은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네 할아버지한테 지난 2월에 네가 죽었다는 말씀을 드렸구나. 3년 동안을 속였다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편지를 보냈단다. 그랬더니,」

    말을 멈춘 내가 주머니에서 접혀진 편지를 꺼내 펼쳤다.
    「네 할아버지가 네 묘 앞에서 읽으라고 보내주신 편지다. 네 할아버지 말씀이니 들어라. 태산아.」

    숨을 고른 내가 편지를 읽었다.
    「태산아, 듣느냐? 네 애비가 읽지만 할애비 말이다. 할애비 얼굴을 떠올리고 듣거라.」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내렸으므로 나는 어깨를 올려 눈을 닦고 다시 읽는다.

    「천명(天命)이어서 인간 목숨은 하늘이 주었고 언젠가는 죽는 것이다. 그러니 태산아. 네가 일찍 떠난 것이 아쉽지만 우리도 곧 뒤따라 갈테니 기다려다오. 이 할애비의 끈질긴 목숨이 부끄럽구나.」
     
    태산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잠자코 듣는 모습이다.

    「태산아, 네 아비를 부르다가 떠났느냐? 그 말을 들은 네 아비가 오죽 가슴이 아팠겠느냐? 살아있는 자의 그 고통은 먼저 떠난 네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란다. 태산아, 네 못다한 명을 네 아비한테 넘겨주거라. 그래서 오래오래 네 아비 가슴에 박혀 있거라.」

    나는 다시 눈물 범벅이 되어있는 얼굴을 들었다.

    아버지의 이 편지는 태산과 함께 살아있는 나도 들으라는 것이었다.
    태산을 생각하고 굳세게 견디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