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단련 (17) 

     프린스턴 신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 나는 박사과정 공부에 전념했다.
    내가 정치학을 전공한 이유는 조선을 개혁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학을 배우는 것이 가장 이로웠다. 내 조국이 그 꼴이 되어있지 않았다면 나는 영문학이나 역사학을 전공했을 것이다.

    당시의 프린스턴대 총장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박사였다.
    존스 홉킨스대 정치학 박사 출신인 그가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아마 동양인 만학도였기 때문인 것 같다.

    윌슨 총장은 자주 나를 집으로 초대하여 동양인 유학생을 위로해 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과분했고 고맙다. 그가 프린스턴대 총장을 마지막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대통령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어느 날, 윌슨이 초대한 파티에 참석한 내가 구석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있었을 때다.
    윌슨이 장신의 사내 하나를 데리고 나에게로 다가왔다.

    「리, 인사하게. 이 사람은 뉴저지주 검찰 총장 헨슨씨인데 내 제자야.」
    그리고는 그 사내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 사람은 장차 조선국 수상이 될 이승만이야.」
    「아이구, 영광입니다.」
    하고 헨슨이 허리까지 굽히면서 손을 내미는 것이 윌슨의 말을 정말로 들은 것 같았다.

    윌슨이 웃음을 참느라고 입을 꾹 다물었지만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당황한 내가 헨슨의 손을 잡고 머리를 숙였다. 

    「잘 부탁합니다. 검찰총장님.」
    「아닙니다. 각하. 오히려 제가...」

    헨슨은 조선이 어디에 붙은 나라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때 윌슨이 헨슨의 팔을 잡아 옆쪽으로 끌면서 말했다.
    「자, 저기 마이클한테로 가지.」
    그러면서 윌슨이 나에게 한쪽 눈을 슬쩍 감았다가 떴다.

    윌슨은 내가 고학하는 걸 알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추천장을 써 주었는데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했다. 강연이나 시간제 일 하는데 윌슨 총장의 추천서만큼 비중 있는 보증서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손님들이 다 떠난 후에 윌슨과 나는 테라스에 나가 정원을 내려다 보면서 나란히 섰다.
    이제 주위는 조용했고 밤 공기는 서늘했다. 1909년 3월 중순이다.

    앞쪽을 향한 채 윌슨이 말했다.
    「리, 박사 학위를 받으면 내가 대학교수 자리를 알아봐 주겠네.」
    나는 듣기만 했고 윌슨의 말이 이어졌다.
    「일본은 조선을 쉽게 내놓지 않을 거네. 조선은 이미 기회를 다 놓친 것이지.」
    「그렇습니까?」

    머리를 든 내가 윌슨을 보았다.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이런 말을 들으면 반발하지 않는 조선인이 있겠는가?

    내가 한마디씩 힘주어 말했다.
    「기회는 옵니다. 선생님. 설령 몇 십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럴까?」
    「일본놈들은 1592년에 조선을 침략하여 7년동안이나 전국을 유린했지요. 그러나 조선은 주권을 되찾았습니다.」
    「왕은 살았나?」
    「예, 살았습니다.」

    조선 왕조였으니 당연히 윌슨은 왕의 안부를 물었겠지만 그 순간 내 가슴이 다시 미어졌다.

    당시 조선왕 선조는 부산진에 상륙한 왜군이 18일만에 한양성을 유린하자 명과의 국경인 의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는 명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걸을 했던 것이다.

    윌슨이 더 이상 묻지 않았으므로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때도 왕이 주권을 되찾은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