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⑯

     누군들 사연이야 없겠는가?
    그러나 작년 말(1903, 11)에 하와이로 이민을 온 김옥심의 사연도 기구했다.

    전라도 정읍에서 소작농으로 입에 겨우 풀칠을 하던 남편 박동수와 함께 김옥심은 이민선을 탔다.
    그러나 올해 2월에 박동수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몸을 뒤틀더니 병원에 실려 갔지만 이틀 만에 죽어버렸다. 급성 장염이라고 했다.

    그 때부터 김옥심의 인생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남편 대신 일을 나갔지만 농장 관리인에게 겁탈을 당한 후에 숨겨진 정부가 되었다. 그러나 두달도 안 되어서 본처에게 발각되어 봉변을 당하고 쫓겨났다. 

    오갈 데가 없어진 김옥심은 호놀루루의 백인 집 가정부로 들어갔다가 열흘도 안되어서 도망쳐 나왔다. 이번에는 백인 주인이 찝쩍거렸기 때문에 제 발로 그만 둔 것이다.

    마침내 김옥심은 항구에서 선원을 상대로 몸을 팔았는데 넉달간 모은 돈을 단골로 찾아오던 청국놈이 훔쳐 달아나 버렸다. 자포자기 상태가 된 김옥심을 꼬여낸 인간이 바로 뚜쟁이 노릇을 한 조기상이다.

    본토에 가면 잘 살수 있다는 꼬임에 빠져 김옥심은 조기상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온 것이다. 그리고는 두달째 이 짓을 하고 있다. 호놀루루에서 몸을 팔던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손님은 많지만 수입이 적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기상이 절반을 떼어가기 때문인데 편리한 점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이렇게 방에서 다리만 벌리면 된다는 것이다.

    나와 이중혁은 거의 대꾸도 하지 않은채 김옥심의 사연을 들었다.
    남의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때로는 웃음까지 떠올리며 말하는 김옥심이 오히려 더 안쓰럽게 느껴졌는데 이중혁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이윽고 김옥심이 입을 다물었을 때 내가 말했다.
    「우린 곧 이곳을 떠날 걸세. 그리고 언젠가는 조선 땅으로 돌아가겠지. 우리한테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가?」

    그러자 김옥심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웃었다. 웃음이 서글프게 보였다.
    「전라도 정읍의 제 친정에 10살, 8살짜리 제 자식들이 있습니다. 큰 애는 박병구라는 남자 애고 작은애는 박순희라는 기집애지요.」

    내가 주머니에서 만년필과 수첩을 꺼내 적었더니 김옥심의 목소리가 더 분명해졌다.
    「우리 부부가 하와이에서 자리를 잡으면 부르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지금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겠지요.」

    그 순간 김옥심의 크게 뜬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김옥심은 말을 잇는다.
    「그 두 자식을 제가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이 소원이올시다. 그래서 이렇게 살면서도 죽지 못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것이지요.」
    「장하네.」
    내가 겨우 한마디 했더니 이중혁이 헛기침을 하고 묻는다.
    「우리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는가?」

    이중혁도 김옥심의 사연에 빨려든 것 같다. 그러자 김옥심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낡은 벽장을 열고 부시럭거리다가 뭔가를 꺼내왔다. 손에는 종이쪽지를 들었다.

    「이것이 제 친정 주소올시다.」
    쪽지를 받아 편 나는 언문으로 쓴 주소를 보았다.

    그때 김옥심이 말했다.
    「제 자식들에게 3년만 기다리면 어머니가 데려갈 것이라고...이 말만 전해 주신다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김옥심이 어느덧 충혈 된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애들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시지요. 그걸 알게 된다면 애들이 어미 걱정을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