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연대가 최근 유엔안보리에 서한을 보내 천안함에 대해 알맹이 없는 '콩깍지' 같은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면서 많은 국민들을 경악케 했다. "도대체 그들은 어느 나라 국민인가"라는 시민들의 아우성이 천지를 진동하자, 이번에는 자신의 행동이 시민단체의 일상적 활동에 불과하다는 식의 변명거리를 내놓았다. 이러한 유형의 변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중대한 죄를 저지르고도 그 죄에 대하여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성을 굳게 믿는 '확신범'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다. 무엇이 참여연대를 뿌리없이 물에 떠다니는 '부평초(浮萍草)'처럼, 자신을 키워준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정처없이 헤매는 '국적없는 시민단체'로 만든 것인가. 실로 참담하기 그지없는 심정이다.

    이번 안보리 서한사건은 한국의 한 시민단체가 국제사회와 유엔에 정부의 공식입장과는 다르게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 심각성은 자유민주공동체에서 활동하면서도 자신의 존재의 뿌리나 정체성의 근거를 망각하고 있다는데서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는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누리며 시민단체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정작 그 자유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모르고 있는 '눈뜬장님'과 같다. 대한민국이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공동체로 자라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가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참여연대 뿐만 아니라 한국의 좌파시민단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문제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표현의 자유나 결사의 자유 및 행동의 자유를 마치 '산타클로스의 선물'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공짜'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유의 가치에 대한 심각한 무지이며, 중대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자유는 결코 '공짜로' 주어질 수 있는 상품과 같은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와 권리만 하더라도 자유와 인권이 살아 꿈틀거리는 나라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이다.

    6·25 전쟁 60주년을 맞는 이 시점이야말로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반추할 때라고 생각된다. 극좌 세력이나 종북주의자들은 맥아더장군을 '전쟁광'으로 비아냥거리고 있으나, 만일 미국이 제때에 참전하지 못해 한반도가 적화되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한공산주의자들의 탱크 앞에 아버지세대가 겁을 먹고 무릎을 꿇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나 인권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좌파단체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날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다. 자나 깨나 주체사상을 배우고 익히며 '김일성, 김정일 어록'을 외우는 등, '현대판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 반인권적 억압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자유주의사회에서나 허용될 수 있는 좌파의 활동이나 시민단체의 활동이 가능했을까. 또 어떻게 유엔 안보리에 자유롭게 이메일로 소통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만일 그랬다면, 즉각 '죽음의 수용소'로 추방되어 짐승처럼 살아가며 죽음을 기다리는 운명밖에 없었을 터이다.

    좌파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보며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어떻게, 어떤 근거로 가능했는지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없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의 뿌리가 북한이라는 호전적 집단에 맞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켜낸 헌신과 희생에 있음을 모른다면, 그러한 무지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안보 무임승차자'의 무지가 아니겠는가.

    이번 참여연대의 안보리 서한 발송행위는 단순한 시민단체의 일탈행위를 넘어 국가공동체의 분열과 해체를 조장하는 '반역행위'라고 할 수 있다. 국가공동체는 개인이나 집단마다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도 한배를 타고 있다는 의식을 공유해야 가능하다. 같은 배를 타고 있어도 '오월동주(吳越同舟)'처럼 딴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연대의식이 가능할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참여연대는 '시민단체'라는 의식은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국가공동체의식'은 없다. 그토록 이명박 정부가 미웠고 한나라당이 혐오스러운가. 물론 다원주의 민주사회에서 특정 정권을 미워할 수도, 특정 정당을 비판할 수도 있다. 그것이야말로 역동적인 다원주의 사회의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기본적 터전인 국가공동체를 미워하거나 파괴하려고 하는 것은 죄악이다. 자신들이 밤낮으로 호흡하고 살아가는 국가공동체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공동체에 대한 '반역'이 아니겠는가. 반역은 왕조시대에만 일어나는 것도, 왕에 대한 음모를 꾸몄을 때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시민들이 평등한 민주사회에도 '반역'은 있다. 그것은 특정정권이나 특정정당에 대한 반대를 넘어 우리 모두 삶을 영위하고 있는 국가공동체에 심각한 상처를 줄만큼 미워했을 때 성립된다.

    민주사회에서 '반역'이란 한마디로 말해 우리가 밤낮으로 다함께 마시는 샘물에 침을 뱉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다 같이 마시는 샘물이라면, 항상 그 샘을 깨끗이 하고 혹시 외부의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그 샘물에 독약을 타는지 혹은 다른 이물질을 던져 넣는지 감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밤에 몰래 와서 우리 샘물에 구멍을 내고 이물질을 넣어 46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을 죽였고, 그 증거도 2개월간, 국제전문인력도 참여했을 만큼 확실한데, 인터넷 괴담수준의 이야기들을 근거로 그것이 불확실하며 조작되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니, 어떻게 우리샘물에 침을 뱉는 행위와 다르단 말인가.

    이제 참여연대는 자신의 행위를 '궤변론자'처럼 변명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왜 수많은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지 엄숙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북한의 호전적 집단을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외눈박이 친북시민단체'가 아니라 자신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를 제공한 공동체에 대해 최소한의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대한민국 시민단체'로 태어나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용서를 비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