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번째 Lucy 이야기 ① 

     「뿌리를 잊고 살았다.」
    수기를 읽고 났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뿌리가 있다.
    이승만의 수기에 등장한 수많은 인물들의 후손은 과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신의 뿌리, 즉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나 있을 것인가?
    그 하나의 예가 바로 테드, 한국명 김태수의 경우이다.

    김태수는 이승만이 남북 분단의 원흉이며 독재자, 미국의 앞잡이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고조부가 이승만의 경호원이었다는 것을 알았어도 그럴까?
    또한 증조부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에서 헌병대장을 지내다가 어떤 영문인지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경찰서장이 되었다. 전범(戰犯)으로 처리 되어야 할 텐데 과거를 숨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내 조상은 이승만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인가?

    주위는 조용하다.
    탁상용 정광시계는 오전 9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때 탁자위에 놓인 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전화기를 귀에 붙인 내가 응답했더니 생소한 사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루시양이십니까?」
    「네, 접니다.」
    「전 고지훈이라고 합니다. 고영훈씨의 사촌동생이 되는데요.」
    「아, 그러세요?」
    「지금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한국 시장 조사를 위임한 고영훈에게 한국의 정치와 역사, 사회상을 알려줄 사람을 부탁했더니 국문학 교수를 한다는 사촌동생을 소개시켜 준 것이다.

    테드는 내일로 다가온 전(前) 대통령의 국민장 관계로 눈코 뜰 사이가 없이 바쁘다.
    어제 오후부터 전 대통령의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전화도 받지 않는다.

    잠시 후에 노크 소리가 들렸으므로 나는 문으로 다가갔다.
    나는 서울에 올 때까지 내 뿌리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아일랜드 이민자 후손인 혼혈인 것이다.
    오직 어머니 이신옥의 반쪽 유전자만이 내 몸에 박혀있을 뿐이다.

    문을 연 나는 앞에 서있는 사내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는 표현이 맞다.

    「처음 뵙습니다. 루시양.」
    하면서 사내가 빙긋 웃었는데 내 심장이 덜컹덜컹 크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낀 감동이다. 테드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10년도 더 지난 것 같다. 그땐 괜찮은 남자를 만나면 일 년에 서너 번쯤 이랬으니까. 

    「어서오세요.」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옆으로 비껴서면서 말했다.
    사무적인 표정을 짓느라고 얼굴에 약간 웃음기도 떠올렸다.
    방으로 들어선 고지훈이 두어 걸음 발을 떼고나서 머리를 돌려 나를 보았다.

    「방이 꽤 크네요.」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옅게 웃음 띤 입술을 보면 여유가 있다.

    「그런가요? 자, 앉으세요.」
    내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신에 후줄근한 양복 차림이었고 머리는 덥수룩했지만 다 어울렸다.
    손에 쥔 낡은 가죽 가방도 그렇다. 자리에 앉은 고지훈이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보았다.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다구요? 정말 고마운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자 나는 장난기가 치솟았다.

    「그럼 공짜로 가르쳐 주실건가요?」
    「아니죠.」
    고지훈이 웃음 띤 얼굴이었지만 크게 머리를 저었다.

    「댓가는 받습니다. 난 좀 비싸거든요.」
    또 마음에 든다. 난 이런 사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