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숙 ⓒ 뉴데일리
    ▲ 김숙 ⓒ 뉴데일리

    선진국 길목에서 정체한지 10여년.
    2010년은 이른바 선진국의 지표인 경제협력 개발기구(OECD)에 한국이 가입한지 14년 째 되는 해이다. OECD 가입 후 근 10년 간 우리의 덩치는 많이 커졌다. 1996년 총 GDP 460조원에서 2008년 약 1023조원에 다다랐으며, 세계 무역량 12위에 랭크됐으며, 2010년 선진국 G20이 모이는 회의의 의장국으로 지명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괄목한 성장을 뒤로하고 한국을 선진국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에 대한 답은 아직, 쾌도난마와 같은 명쾌함이 없다.

    OECD에 가입한지 14년이 되는 한국은 왜 아직도 선진국의 문턱에서 정체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23일 명동 은행회관에서는 한국선진화포럼의 주재로, 한국이 선진국의 문턱에서 정체하고 있는 현상의 이유를 국민의식의 선진화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고, 그 해결방안에 대한 토론을 가졌다.
    첫째, 국가정통성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며, 둘째 시장경제의 논리에 대한 인식이 잘못 되어있고, 셋째 올바른 법치질서의 확립이 부재한 것을 원인으로 국민의식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선진국!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부터 해결되어야.

    결과적으로 이 세 가지 방면의 문제제기는 의식의 방향성에 대해 한국 사회가 혼란을 겪고 있다는 점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
    의식의 방향성을 바르게 제시할 수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정통성이라는 문제도 결국 과거 역사 재인식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구심점 및 출발점 역할을 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지금까지 이어져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기댈 경제체제인 시장경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촉구는 한국경제의 올바른 방향성의 확립을 위한 노력이며 마지막으로 객관적인 합의의 법적근거인 법치질서의 확립을 도구로 한국 사회의 선진화를 위한 기본질서를 세운다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논의의 자체는 선진국 한국의 방향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확신을 통해 국민의식의 선진화를 도모하고 이를 통해 선진국한국을 이루기 위한 경제성장과의 타임래그(time lag)를 줄이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의식의 방향성 부재-진보 보수 개념 자체의 혼란.

    선진국 한국을 향한 의식적 노력은 결국 방향에 대한 확신이자, 국민들간의 그 공감영역의 확대를 목표로 한다.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예측가능한 안정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일은 방향을 제시함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 방향성의 논란 속에 아직도 매몰되어 있는 것이 문제다.

    현재 한국사회에서의 어떤 사회현안을 둘러싼 방향성의 행보에 대한 논란은, 찬반의 양론 대립에서 진보냐 보수냐의 이념대립으로 빨갱이냐, 수구 꼴통이냐의 적나라한 저질적 논란에 그치고 만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 사회의 보수 진보의 개념조차 명확한 정립이 되지 않았던 점이다. 본디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은 역사적 전통성을 근거로 한 것으로 단순히 의견의 차이를 보수와 진보로 구별하는 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보수냐 진보냐에 대한 국가 존망의 방향성자체의 문제를 놓고 의미있는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 보수에 대한 역사적 전통의 근거 없이 정의 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의견의 차이로 구분짓고 있다.   
     
    우리나라의 보수 진보의 개념자체의 정립이 부재한 예로 대외개방을 둘러싼 보수진보간의 대립을 150년의 시간차를 두고 설명할 수 있다.

    조선말 1860년대, 당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조선은 대외개방을 놓고 거센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성리학적 유풍을 기반으로 한 위정척사파가 나라 문호의 개방을 반대했으며 그의 대립항으로 당시 서역이나, 일본에 눈을 뜨던 실리적인 기풍의 개화파가 대외개방을 찬성했다. 그 시기 보수세력은 나라문을 굳게 하자는 쪽에, 진보세력은 개방하자는 주장을 한 셈이다.

    해를 거듭하고, 2007년의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갑론을박의 역사적인 홍역을 치렀다.
    한미FTA의 협상 찬반이 그 사안이었다. 대국민적인 촛불시위 및 대통령의 하야 촉구를 주장하는 불길로 까지 번져 나간 큰 홍역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150여년 전의 역사의 복고와는 전혀 다른 이념적 지향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발전적 보수를 표방하는 여당을 기반으로 보수 세력은 찬성의 측면을 주장했다. 반대세력은 대표 야당의 몫이었다. 현재 이시기의 보수는 나라문을 열자는 쪽에, 진보는 나라문을 닫자는 보수와 진보의 뒤바뀐 이념색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보수진보 또는 진보 보수의 이념적 구분이 얼마나 정통성이 없는 방향성인지 알려 주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는 응당 어떠한 색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이나라의 보수 진보라는 방향성 자체가 그 뜻조차 유구하게 이어지지 못한 채 이념싸움으로 번지는 것이 가슴 아프다.

    근 150년의 세월의 흐름 앞에 과거의 보수는 대외개방의 반대에서 찬성으로, 진보는 찬성에서 반대로 정치 이념이 무엇인지와는 관계없이 진보 보수 자체가 정확한 개념 정립이 안 되어 있는 사회가 한국사회인 것이다. 방향성에 대한 거창한 그림보다 더욱 구체적인 사회 현안의 문제를 둘러싸고 모여 있는 정당의 이념이 그 기준을 역사적 안정성위에 이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현실이다. 선진국을 향한 방향성의 제시는커녕 뿌리 없는 진보 보수 싸움에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세태다.

    이에 비해 우리가 추구하는 선진국은 그 양상이 확연하게 다르게 나타난다.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역사적 전통성을 갖고 이념을 둘러싼 진보 보수의 구분이 명확하다.
    이는 단지 이념대립의 싸움 골을 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현안에 대해서 이념을 중심으로 한 보다 합리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양당제 국가인 미국은 공화당 민주당 이라는 각각의 보수 진보 세력을 명확히 하기에, 따라서 정책에 대해 이념적인 논란이 충분히 의미 있는 사회이다. 정책의 대한 입법 및 집행의 여부를 과감히 국민의 투표를 통해 심판할 수 있는 이념적 정통성이 공고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다당제 국가인 유럽 독일의 경우 기독교 민주당(기민당)및 사회당 녹색당 등은 기독교보수주의 사회주의 환경등은 정당의 정책이 이념의 발현이라고 할 정도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으며 정책에 대한 보수 진보의 차원을 넘어선 이념적 대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개념자체가 모호하다.
    국회의석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당 한나라당은 ‘발전적 보수’를 지향하고 있으며 최대 야당 민주당은 민주사회를 외치면서도 중도 우파적인 모호한 기준을 내세우고 있다.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의 경우 정당의 정강을 보면 진보를 명시적 기치로 내걸고 복지를 내걸고 있으나, 결과적으로 18대 국회의원 294명의 총 명수 중 6명 밖에 미치지 못하는 소수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총선 및 대선을 둘러싸고 정당의 이합집산은 심화되며 이윽고 나타나는 누가 진짜 보수인지 경쟁하는 구도는 선진국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진보 보수의 기능을 이미 상실한지 오래다.

    각 정당의 정강을 통해 보수를 지향하는 정당의 의석수의 총합과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의 의석수를 총합해보았다.
    18대 국회의원의 의석수를 근거로 보수로 분류되는 한나라당 169석, 자유선진당 17석, 미래희망연대(전 친박연대) 5석, 창조한국당 2석 총 193석이 보수파 정당 의석수 였으며, 진보에 해당하는 민주당 86석, 민노당 5석, 진보신당 1석 총 92석, 무소속 9석으로 나누었을 때, 각각 보수 66% 진보 31% 무소속 9%의 비율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사실상 정확한 의미가 없다는 데에 그 문제의식이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정당은 보수냐 진보냐 할정도의 명확한 정책의 분별점을 이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선진국의 사례와는 다르게 매번 선거를 위한 잠시 동안의 정당 이합집산 과정은 의식의 방향성을 이끌어 줄 선구자적인 정당의 기능을 의심케한다.

    비단 정당의 기능 뿐만이 아니라 우리사회는 진보다 보수다 할 만한 가치있는 이데올로기를 갖는 것 자체를 함구하는 사회다.
    당신의 성향은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의 질문에 국민들 60%가 중도이거나 모른다고 답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보수 진보라는 이데올로기의 자체는 선진국 한국이 어떤 방향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떠한 사회 현상이든 그 해결책이나 방안을 강구할 때, 어떤 흐름의 방안을 사용할 것인지 큰 그림을 그리는 이념적 전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념적 전통을 기반으로 실제적 정책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정당의 가장 주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누가 진짜 보수냐 누가 진짜 보수냐 라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자원을 낭비하고 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조차 소모적인 논쟁으로 치부하는 한국사회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선진국으로 향하는 목표지점에서 도움닫기만을 반복하며 제자리 뛰기만 한지 10년 째 되는 한국, 방향성에 대한 확실한 제시 없이는 위 아래로 준비운동만 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