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박이 지난 해 성탄 전날 북한으로 건너가고 해가 바뀌었으나 놀랄 만한 침묵이 흐르고 있다. 무관심일 수도 있으나, 누구든 딱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까닭도 있다고 본다. 그야말로 누구에게든 그렇다고 본다.
     
    북한 입장에서 내국민(內國民)에 관해서라면 이 사건은 죽음을 면치 못할 ‘1호’ 범죄다. 이른바 ‘상부’(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모독으로 분류될 만하다. 성경을 반입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만으로도 정치범수용소(관리소) 행을 면치 못할 범죄에 해당한다. 외국인인 로버트 박의 경우 수령절대주의의 정전(正典)인 ‘유일사상10대원칙’에 의거한 1호 범죄자로 분류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로버트 박이 언론을 통해 선언한 내용은 북한으로서는 결코 가볍지 않고, 무엇보다 이는 선례가 없는 유형의 사건이다.
     
    미국 입장에서 로버트 박 사건은 우선 중범죄(felony) 사건이 아니다. 허가 없이 외국의 영토를 넘어간 것은 사실이나 그 의도가 악하다고 할 수 없어 경범죄(misdemeanor)로 다룰 정도의 사건일 뿐 아니라, 적어도 미국 국내법적 입장에서 로버트 박의 발언에 범죄적 요소를 찾을 수는 없어 처리를 북한에만 맡겨둘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로버트 박이 자신의 석방을 위해 애쓰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국민 보호의 헌법적 의무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며, 더구나 한미동맹상 적성국에 해당하는 북한에 억류된 자국민에 대해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 입장에서 ‘로버트 박’은 누구인가? 법적 차원을 넘는 무거운 주제를 제시한다. 북한에 관한 민간의 인도적(人道的) 이니셔티브를 갖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기독교계는, 요컨대 ‘무조건적’ 사랑이 ‘무분별한’ 사랑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로버트 박의 메시지를 가볍게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의 기독교 박해의 은유(隱喩)라고 할 수 있는 ‘정치범수용소’에 대해 그 동안 시원하게 말 한 마디 못하고 참으로 너그럽게 베풀어왔다. 어둠을 덮어주는 사랑이 아니라 어둠에 빛을 비춰주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정부와 정치계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회에 의석 한 자리 만들어내지 못할 ‘북한사람들’에게도 생명과 자유에 대한 권리가 있고, 책임은 북한 정권에만 있지 않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는 필자 개인에게도 로버트 박의 존재는 무겁다. 외투를 벗어 놓고 연약한 육신으로 북한으로 들어간 그는 감당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실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무거운 주제라면 로버트 박 처리 문제는 어쩌면 간단할 수 있다. 그가 목숨을 담보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들어있는 ‘평화의 원리’를 문제 해결의 지표로 삼으면 된다고 본다. 그는 강을 건너기 전, 우리 민족이 원치 않았던 분단의 책임을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이 함께 져야 한다고 말했고, 마찬가지로 북한 정권이 해체하지 못하고 있는 정치범수용소 해체와 주민 복지의 책임 또한 한국을 포함한 이들 나라가 같이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북한은 자신들이 미국에 대해 원하는 것이 ‘전쟁’ 아니라 ‘평화’임을 표명했다. 만일 현재의 현상유지(Status Quo) 상태를 계속 끌고 가기에 북한도 미국도 중국도 한국도 버겁고, 그 비용이  클 뿐 아니라, 북한주민들이 당하는 희생이 묵과하기에는 너무 큰 인도적 위기여서 세계의 양심에도 상처를 낼 지경에 이르렀다면, 새로운 종류의 현상 타파를 모색해야 할 시기임을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현상 타파의 방법은 이라크, 아프간 식의 ‘전쟁’과 ‘분쟁’, ‘테러’에만 있지 않고, 반성과 용서, 사랑과 자기 희생에도 있음을 로버트 박이 말해주고 있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이 한반도에서 상처도 증오도 없는 새로운 종류의 평화적 레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박이  보여준 이토록 전면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만으로도 북한이 그를 사면할 이유가 되며, 미국이 반드시 그를 구해낼 이유가 된다고 본다. 로버트 박을 통해 한반도 진정한 평화의 서막이 열리고 있음을 가늠한다.

    그가 동상에 걸리지 않고 고문 당하지 않기를, 꼭 살아 돌아와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