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만대장경을 지킨 ‘빨간 마후라’ 이야기가 널리 보도되었다.
     <지난 14일 오전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서는 6.25동란 중 미군의 해인사 공습 명령을 거부하고 팔만대장경을 지킨 고 김영환 공군 준장을 기리는 호국추모재가 열렸다>는 식이었다.
     
      한 신문의 칼럼은 당시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전하였다.
     <먼저 출동한 미 공군 정찰기가 해인사 마당에 연막탄을 떨어뜨렸다. 그걸 표적 삼아 폭탄을 투하하라는 신호였다. 김영환 편대장의 훈령은 달랐다. "각 기는 내 지시 없이 폭탄을 사용하지 말라." 대원들은 사찰 주변 능선을 향해 기관총 공격만 해댔다. 미군 정찰기에서 독촉이 빗발쳤다. "해인사를 네이팜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뭐하고 있나." 김영환은 못 들은 척 다시 지시했다. "각 기는 폭탄 공격하지 말라." 대원들은 해인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인민군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날 저녁 정찰기 조종사 미군 소령과 김영환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연막탄의 흰 연기를 보았는가?" "봤다." "왜 엉뚱한 곳을 공격했는가." "거긴 사찰 아닌가." "국가보다 사찰이 중요하단 말인가?" "사찰이 국가보다 중요할 리는 없다. 그러나 공비보다는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팔만대장경이라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있다. 공비 몇백 죽였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미군이 해인사를 폭격하도록 명령하였다는 이야기는 김영환 대령의 용기를 설명하는 데 자주 이용되는데 이런 주장의 출처는 당시 공군 전투비행단의 작전참모였고 뒤에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장지량씨가 근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에서 장지량 전 총장은 미군의 명령에 항명하여 폭격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자신이 주된 역할을 하였고, 미군이 李承晩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李 대통령이 자신을 명령불복종으로 포살하라고 명령하였는데, 공군참모총장 김정렬(김영환의 형)이 잘 이야기하여 무사하였다고 썼다.
     
     <장지량 전 총장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경남 사천에서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를 맡고 있었다. 그는 미국비행고문단으로부터 갑작스런 명령을 받았다. "인민군 1개 대대가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으니 그곳을 폭격하라"는 것이었다. 해인사가 어떤 곳인지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아찔했다. 팔만대장경이 몽땅 한 줌 재로 변할 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식량 탈취가 목적이니 며칠 지난 뒤 빠져나오면 그때 폭격해도 늦지 않다. 2차대전 때 프랑스의 파리 방위사령관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 무조건 항복한 일도 있었는데….' 장 전 총장은 고민 끝에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시간을 계속 끌어 날이 어두워지자 자연스레 출격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며칠 뒤 인민군이 철수해 산 속으로 이동한 뒤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격노한 미군측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해 그는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의 해명으로 가까스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천년 고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지켜진 것은 그의 공이었다.>(조선닷컴)
      장지량씨는 영웅이 되고 미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국보를 우습게 여기는 無道한 인간으로 그려졌다.
     
      장지량씨의 회고록이 이런 식으로 언론에 보도되자 퇴역 공군 장교들이 들고 일어났다. 尹應烈 전 공군작전사령관은 장지량씨의 주장을 반박하는 보고서를 냈다. 요지는 해인사 작전은 미군의 명령 없이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우리 공군은 1951년 8월17일부터 9월18일에 걸쳐 지리산지구 공비 토벌 경찰부대 공중지원 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경찰이 공비 토벌을 담당했고, 지리산지구 최치환 전투경찰부대장이 사천기지를 방문해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51년 7월23일 진주경찰서에서 군·경(軍警) 관계관이 협의해 공비 토벌 공중지원작전이 단행됐다.
      문제의 그날도 전투경찰대의 지원 요청을 받은 우리 공군은 김영환 장군을 편대장으로, 무장한 4대의 F-51 편대가 즉격 출격했다. 목표 상공에서 전투경찰대와 정찰기로부터 공격목표를 지정받았는데 그것이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는 해인사임을 확인한 김 장군이 해인사를 공격하지 않고 다른 목표를 찾아 공격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우리 공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이 작전은 美 공군의 작전명령서로 정확한 목표를 지정받고 출격한 것이 아니라, 전투경찰대가 요청한 지역 상공에서 경찰대와 우리 정찰기가 제시한 목표를 공격하는 것이다. 고문단의 작전명령이나 출격명령은 있을 수도 없었고, 출격 전에 목표가 해인사라고 정해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몇 년 전 필자는 당시 장지량 장군이 폭격을 거부하면서 승강이를 했다는 문제의 윌슨 대령을 만날 기회가 있어 ‘해인사 작전’에 대해 물어보았다. 의외로 그는 우리 공군이 해인사를 공격했는지 안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과연 언쟁으로 격앙된 상황에서 멱살을 잡히고 그 자신 또한 우리 대통령에게 보고해 ‘출격명령을 거부하면 너희 목을 날려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윌슨 대령에 따르면 그가 상대했던 한국 측 인사들은 김정렬 총장과 장덕창 단장, C-47을 같이 조종한 장성환 장군이었고 작전협의나 한국 조종사들의 출격은 영어가 능통한 김영환 장군이 맡았으며, 한·미 간 연락장교 역할은 항공군의관 계원철 소령이 담당했다고 말하면서 그 외에는 누구와도 공식 접촉이나 협의를 한 바가 없다고 했다.>
     
     
      윤응렬 장군은 “왜 작전과 아무 관계 없는 미군을 끌어들여 마치 미군이 문화재를 폭격하도록 시킨 것처럼 누명을 씌우는가”라고 흥분하였다. 김영환씨의 조카인 김태자씨(전 국방장관 김정렬씨의 딸)도 월간중앙과 한 인터뷰에서 미군의 관련성을 부인하였다.
     
      <-당시 해인사 폭격명령과 미군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죠?
     
     “앞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미군 명령이 아니라 진주 경찰에서 우리 공군에 연락이 온 것입니다. 지리산에 공비들이 너무 많으니 공비토벌작전을 지원해 달라고요. 순전히 우리 쪽 요청에 의해서였어요.”
     
     -그런데 왜 일부 언론매체나 문화재청이 그런 사실을 확인 없이 썼을까요?
     
     “보통사람들이 생각할 때 6·25 때니 당연히 미군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당시 계셨던 분들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하시거든요. 미군이 들어와 우리를 도와줬으니 ‘미군한테 명령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김영환 장군 모르게 윌슨 대령과 장 장군이 승강이를 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닙니까?
     
     “윤응렬 장군 보고서에도 나오지만, 당시 작전참모가 미군 상부층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만약 이야기를 했다면 저희 아버지(김정렬)나 편대장이셨던 작은아버지(김영환) 정도였겠죠. 또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당시 어느 지역을 공격하려면 먼저 정찰기를 띄운답니다.>
     
      당시 공비토벌은 미군의 명령을 받는 작전이 아니었다는 것이 참전 공군 장교들의 거의 일치된 견해이다. 언론이 장지량씨나 김영환씨를 영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미군을 惡役으로 설정한 것은 재미를 더해주었을지는 모르지만 근거 없이 反美감정을 부추기는 惡行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문화재청이 발간한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란 책도 장지량씨의 주장을 그대로 옮겼다. 장씨는 문화재청 주최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눌와 刊)의 출간기념회에 참석해 감사장을 받았다. 문화재청은 국가기관이다. 다른 국가기관인 공군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