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기구에 파견돼 있는 한 재야법조인을 만났다. “세상에,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함께 사는 사람들 중에 그렇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읍니다” 그 인사는 얼굴을 고통스럽게 찡그리며 거의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일종의 비명 같은 것이었다.

  • ▲ 류근일 한양대 대우교수 ⓒ 뉴데일리
    ▲ 류근일 한양대 대우교수 ⓒ 뉴데일리

    북한의 인권유린을 아젠다로 다루자고 하니까 “북에 인권 유린이 있다는 확증이 있습니까?”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 인사는 너무나 뜻밖의 반응이라 “네?” 하고 입을 딱 벌릴 수 밖 없었다. 북한에 극악한 인권 유린이 있다는 것을 상식처럼 알아왔던 그 인사-그는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중대한 문제를 논의도 하지 말자는 겁니까?”하고 물으니까 “투표로 결정합시다”하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매사 토론이나 절충 아닌 표결을 주장했다. 그들 패거리가 다수였기 때문이다. 국회에서는 자기들이 열세니까 국회를 버리고 시청 앞으로 나오는 자들이.

    그러면서 그 인사는 말을 이었다. “그들도 다 미국 유학도 다녀오고, 자기 자녀를 미국에 보내고 하바드 대학 이야기도 하고 이 사회의 혜택이란 혜택은 다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글쎄 북한 인권 유린이 확증이 없어 논의할 수 없다니...기가 막힙니다”

    그 인사는 중년이 된 후에 아마 그런 문제에 접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나처럼 1960년대부터 이미 운동권 내부에 있었던 그런 ‘먹통 좌파’ ‘위선 좌파’ ‘짝퉁 진보’를 봐왔던 사람으로서는 그게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20000 명에 육박하는 탈북자들을 모조리 거짓말쟁이 쯤으로 취급한다. 자기들 구미에 맞는 것만 ‘존재’로 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無)존재’로 치는 자들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좌니 우니 이전에, 양식(良識)과 먹통의 대립, 진실과 위선의 대립, 정직과 부정직의 대립이 우리네 갈등구조의 원초적인 모습인 것이다. 그 인사도 바로 그 점 때문에 기가 막혀 했던 것이리라. “세상에, 1+1=2가 통하지 않다니?!” 하는…

    소통 소통 하지만, 소통은 가치를 공유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북한에 인권 유린이 있다고 보는 사람하고, 북한에 인권유린이 있다는 확증이 없으니 논의조차 하지 말자는 사람하고 대체 무슨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 질문 있읍니다, 귀(貴) ‘중도 실용주의’ 동네에서는 이런 먹통을 과연 어떻게 ‘중도 실용적’으로 푸는지요?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