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끝없는 논쟁을 제공할 이 이야기에 한 인간이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맡긴다. 그리고 'This is the moment'(지금 이 순간)을 외친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주인공 팬텀 역을 2300여 차례나 소화한 정상급 뮤지컬 배우 브래드리틀의 출연으로 기대를 모았던 '지킬 앤 하이드'가 내한 공연했다. 190의 장신, 그 거구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성량은 무대를 넘어 세종문화회관 전체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지킬'과 '하이드'라는 선과 악을 오가는 연기를 펼치는 그에게선 역시 프로라는 말을 나오게 한다.

  • ▲ <span style=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프레스콜에서 배우 브래드리틀이 지킬에서 하이드로 둔갑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 title="▲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프레스콜에서 배우 브래드리틀이 지킬에서 하이드로 둔갑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프레스콜에서 배우 브래드리틀이 지킬에서 하이드로 둔갑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킬은 젠틀한 신사이고 유능한 과학자며 젊은 의사다. 상처입은 술집여자 루시를 간호해주고 그에게 호의를 베푼다. 반면, 하이드는 그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어찌 보면 인간 본성 그것과 너무나 닮은 포악한 잔인함 그 자체다. 이 두 인격체가 한 인간 안에 공존해있다.

    이렇게 난해한 캐릭터를 브래드리틀이라는 배우는 능수능란하게 넘나들며 연기했다. 1965년생 우리나이로 45세. 그동안 지킬을 맡은 배우의 평균연령을 훌쩍 넘는 이 배우는 나이만큼 원숙한 연기와 정확한 발성으로 관객의 탄성을 자아내 역대 최고의 지킬로 불릴만하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최초 내한공연에 객석점유율 95%를 기록하며 고공행진 중이다. 

    선량한 이미지에 진중함까지 묻어나는 지킬을 연기할 때와 하이드로 분할 때 바뀌는 그야말로 '다중이'를 표현하는 그의 연기력은 놀랍기만 하다. 선량한 지킬일 때의 상냥하고 젠틀한 목소리며 행동은 간 데 없고 야수로 변한 하이드의 모습만이 존재한다. 목소리도 확확 바뀌는데 같은 인물인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젠틀하고 이성의 유혹에도 점잔을 빼던 모습에서 하이드로 둔갑하자 머리를 풀어헤치며 '야수'그 자체의 모습으로 포효한다. 

    리틀은 'This is the moment' 열창 후 쏟아지는 관객 박수 소리에 잠시 몸을 멈추는 쇼맨십도 발휘한다. 관객에게 순간을 만끽하라는 배우의 배려에서였다.

    작품은 실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는 성자에 가까운 지킬을 조금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각색했다. 기존 지킬이 젠틀하고 어딘가 성스럽게까지 느껴졌던 인물이었다면 브래드리틀의 지킬은 친구 어터슨에게 총각파티를 열어달라며 술집으로 데려가는 좀 더 가볍고 인간적인, 그래서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표현됐다.

    지킬의 연인 엠마(루시몬더)가 힘들어 하는 연인을 위해 부른 'once upon a dream'(언젠가 꿈속에서)은 이 작품의 백미다. 이 노래는 지킬이 하이드로 바뀐 것을 알면서도 그를 놓지 않는 엠마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표현한 노래다.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을 통해 불러진 이 노래는 작품에서 청아한 여주인공의 목소리로 9월의 가을밤 정취를 자아낸다.

    화려한 무대도 빼놓을 수 없다. 지킬의 지하연구실과 2층 벽돌 통로 계단 등은 웅장함과 현실감을 물씬 느끼게 해준다. 빨간 파마머리를 한 술집여자 루시가 공중그네를 타고 요염하게 등장하며 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관능미를 느끼게 한다. 무대 안 실험실에 불을 지르는 퍼포먼스도 등장한다. 또 런던거리 근처를 붉은 석양의 이미지로 표현해 전체적으로 음습하지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다.

  • ▲ <span style=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프레스콜에서 배우 브래드 리틀(왼쪽)과 루시 몬더(오른쪽)가 열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title="▲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프레스콜에서 배우 브래드 리틀(왼쪽)과 루시 몬더(오른쪽)가 열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프레스콜에서 배우 브래드 리틀(왼쪽)과 루시 몬더(오른쪽)가 열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각적 전율도 놓칠 수 없는 감각만족 중 하나다. 하이드와 지킬의 분열과 대립을 보여준 'Confrontation'(대면)을 통해 리틀은 한 육체 안에서 싸움을 벌이는 두 자아의 혼돈을 지킬과 하이드가 주고받는 노래로 발성까지 달리하며 소름끼치게 격정적으로 표현한다.

    두 여배우, 엠마와 루시가 각자 그들이 사랑하는 한 남자를 향한 깊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노래한 'in his eyes'(그의 눈에서)도 명곡이다. 두 여주인공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킬의 피앙새 엠마가 귀족여성답게 청아한 하이톤으로 길게 빼는 감성적인 목소리가 장점이라면, 술집무희 루시는 강렬하고 폭풍같은 보이스를 선사한다. 특히, 루시(벨리다 월스톤)의 'Someone like you'(당신과 같은 사람)은  '당신과 같은 사람이 나를 원한다면 기꺼이 삶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내용으로 사랑에 빠진 여인을 잘 묘사한 곡이다.

    작품은 오버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와 음침한 영국날씨를 표현하는 빨간 석양과 푸르스름한 배경을 바탕으로 눈 앞에 런던시내를 가져다놓은 느낌을 풍기는데 내한공연의 묘미를 한껏 고조시켜 자막의 불편함마저도 이해해줄 수 있을 정도다.

    뮤지컬은 영국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각색해 1997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인간의 양면성과 이중성에 대해 다룬 이야기다. 주인공 헨리 지킬은 인간은 본래 선하며 치료를 통해 후천적으로 발생한 악을 뽑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연구에 매진한 지킬은 병원 측의 허락을 요구하지만 번번이 기각당한 후 결국 자신에게 직접 약을 투약하는데 그 결과 지킬 안의 또 다른 인격체인 에드워드 하이드가 만들어진다.

  • ▲ <span style=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프레스콜에서 연기를 펼쳐보이는 배우 브래드리틀 ⓒ연합뉴스" title="▲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프레스콜에서 연기를 펼쳐보이는 배우 브래드리틀 ⓒ연합뉴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프레스콜에서 연기를 펼쳐보이는 배우 브래드리틀 ⓒ연합뉴스

    작품은 내 몸 안에서 숨 쉬고 살아있는 두 가지 인격체인 선과 악. 가장 근본적인 모순의 대립을 잘 표현했다. 선과 악의 공존이라는 근원적 물음 속에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 내용에 엠마와 루시라는 여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로맨스를 가미했다. 엠마는 부잣집 딸에 지킬만을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착한여자의 전형. 반면, 루시는 술집클럽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던 중 자신을 인간답게 대해준 지킬에게 사랑에 빠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지킬의 또 다른 내면인 하이드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이밖에 지킬의 절친한 친구 역으로 나오는 존어터슨(완 잭슨)과 엠마의 부친 댄버스 커루(베리 랑리쉬)가 명연기를 펼친다.

    점점 하이드에 의해  내면을 잠식당한 지킬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작품을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 하지만 본능과 본능의 제어라는 측면으로 볼 수 있을 듯도 하다. 점잖은 신사였던 지킬은 이성으로 자신을 제어했던 반면, 그의 본능인 하이드가 죽인 사람들은 신사 지킬이 복수심을 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지킬은 정숙한 여인 엠마를 사랑하지만 포효하는 하이드로 둔갑했을 때는 관능적인 루시와의 사랑을 나눈다. 그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한 지에 따라 지킬과 하이드로 나뉠 뿐이다. 그 물음과 가치판단은 관객 몫이다.

    180분의 공연과 15분의 인터미션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공연이 끝난 후 관객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에 호응하듯 명배우 리틀이 머리를 다시 한번 풀어헤치는 센스있는 애드리브로 화답한다. 2만2000∼14만원. 오는 2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