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하원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 
    ▲ 이하원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 

    지난 29일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에드워드 케네디(Kennedy) 상원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5월 초였다. 친분이 있는 6·25전쟁 참전용사의 소개로 기자와 악수를 한 케네디 의원은 선선히 인터뷰를 약속했다. 박빙(薄氷)이었던 민주당 대통령 경선의 추를 버락 오바마(Obama) 후보로 기울게 한 정치인을 만난다는 생각에 약간 흥분됐던 기억이 난다. 왜 힐러리 클린턴(Clinton) 대신 흑인인 오바마 후보 지지를 선언했는지 궁금했다. 당시 76세의 나이에도 '리버럴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이유를 탐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케네디 의원 인터뷰는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며칠 후인 5월 20일 기자는 '긴급뉴스'를 통해 그가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각 15개월이 될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케네디 의원을 다시 본 것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인 지난해 8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였다. 사망하기 꼭 1년 전인 8월 25일,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 예상을 깨고 등장한 그는 이렇게 '예언'했다. "우리 주변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있습니다. 11월 대선에서 횃불은 새로운 세대의 미국인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그의 연설대로 오바마 후보는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돼 미국의 진로를 바꾸기 위한 대작업에 착수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주춧돌을 놓은 그의 장례식은 마치 국장(國葬)처럼 치러졌다. 그의 시신이 옮겨지는 보스턴 거리에는 숱한 시민들이 성조기를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미국의 언론은 4~5일씩 그의 사망과 관련한 특집기사, 특별방송을 내보내면서 추모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의 죽음이 대다수 미 국민들의 추모를 받은 것은 그가 오바마 대통령과 가깝기 때문이 아니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가 47년 동안 의정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입법활동에 전념했다고 평가한다. 록히드 마틴 사(社)가 "케네디 의원은 모든 미국의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입법체(立法體)를 건설했다"고 애도하는 전면 광고를 신문에 게재한 것은 상징적이다.

    과연 케네디 의원은 얼마나 입법(立法)에 정열적이었을까. 그는 2500개의 법안 발의에 깊이 관여했다. 매주 1개씩 제안되는 법안에는 그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다. 이 중에서 550개의 법안이 실제로 만들어져 미국사회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뉴욕타임스의 평가다. 60년대 공공장소에서 흑백차별을 금지한 민권법과 '이중 언어 교육법'에는 진보적인 그의 신념이 투영돼 있다.

    1969년 '전(全) 국민 의료보험'이라는 개념이 생소할 때에 이를 들고 나와 건강보험 개혁의 촉매제가 됐다. 어린이 건강보험을 만들어 700만 명이 혜택을 보게 한 것도 그였다. 그가 만든 법에 의해 앞으로도 400만 명의 소년, 소녀가 무(無)보험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존 케리(Kerry) 상원 의원의 "케네디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18번째 생일이 지난 남녀가 투표를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처럼 투표연령을 낮추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법을 만들 때 민주당의 입장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낙후된 교육시스템을 개선하고 고른 교육기회를 갖게 하는 '낙오방지법(No Child left behind)'은 그가 주도해서 초당적으로 만들어진 법이다.

    한국의 전·현직 의원들이 사망하면 관례처럼 신문에 부음(訃音)이 실린다. 대부분은 "몇 대(代) 국회의원을 지냈다"는 형식이다. 다르게 얘기하면 그만큼 내세울 만한 입법실적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케네디 의원의 사망이 한국의 정치인들에게는 자신의 사망기사(obituary)가 어떻게 쓰일지에 좀 더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