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를 시작하면서

     8월은 우리 민족사에 뜻 깊은 달이다. 해방과 망국(亡國)이 8월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방의 날을 늘 기리고 있다. 그러나 망국의 날은 기억조차 잘 못하고 있다. 지난날의 아픔을 다시 들추어내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잊어버린 것일까? 

    서양제국주의의 물결이 동아시아로 밀려오던 19세기 중엽,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를 재빨리 간파했다. 그리고 이 제국주의의 파도를 타기 위하여 위로부터 체제개혁을 단행하고, 부강개명(富强開明)이라는 국가목표를 향하여 국론을 한 방향으로 모아나갔다. 체제가 안정되면서 메이지(明治) 일본은 서양제국주의를 모방하여 이웃을 향한 팽창을 시작했다. 그 첫 대상이 조선이었다.

    당시 조선은 어땠나? 조선을 처음으로 서양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소개한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은 조선을 ‘잠자고 있는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조선은 “다른 세계 역시 자신들과 같은 환경에서 잠자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안심하고 깊이 잠들어버렸다.....그곳에서는 변화란 의미 없는 것이며 시간은 정지”해 있었다.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들기 위하여 변화를 추구한 일본, ‘은자의 나라’이기를 고집하며 잠들어있는 조선. 두 나라의 운명이 갈라지는 시발점이다.

      지금부터 99년 전인 1910년 8월부터 한민족은 나라를 잃고 일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종살이를 36년 동안 해야만 했다. 다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역사이지만 왜 우리는 나라 잃은 망국의 국민으로 전락하게 됐나를 되새겨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일그러진 자화상일지라도 정면으로 대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망국의 역사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고서는 해방과 독립의 참 뜻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재되는 이 글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한국병탄을 위한 일본의 치밀한 계획과 간교한 책략을 추적하면서,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망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의 무력함과 어리석음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는 어느 한쪽을 비판하고, 어리석음을 탄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보다는 지난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성찰함으로서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그 위에서 새로운 선린의 한일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이다.

  • ▲ <strong><span style=<순종실록>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맺은 '병합조약' 전문과 순종황제의 조칙(담화)내용을 기록한 <순종실록>. 위 페이지 오른쪽은 순종의 '담화'내용이고 아래쪽 조약전문 뒤에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이름과 일본통감 데라우찌 마사다케 이름이 적혀있다. " title="▲ <순종실록>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맺은 '병합조약' 전문과 순종황제의 조칙(담화)내용을 기록한 <순종실록>. 위 페이지 오른쪽은 순종의 '담화'내용이고 아래쪽 조약전문 뒤에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이름과 일본통감 데라우찌 마사다케 이름이 적혀있다. ">
    <순종실록>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맺은 '병합조약' 전문과 순종황제의 조칙(담화)내용을 기록한 <순종실록>. 위 페이지 오른쪽은 순종의 '담화'내용이고 아래쪽 조약전문 뒤에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이름과 일본통감 데라우찌 마사다케 이름이 적혀있다. 

     

     ‘합방’인가 ‘병합’인가 ‘병탄’인가?

      1년 후인 2010년 8월이면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찬탈하고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로 복속시킨 지 꼭 100년이 된다. 한일 두 나라의 학계나 문화·언론계에서는 ‘이 사건’을 되돌아보고 재조명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학술 심포지엄이나 특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100년 전의 ‘이 사건’을 우리가 매일 접하는 언론매체는 물론, 학술논문, 역사책, 역사교과서 등에서 여전히 한일 ‘합방’ 또는 ‘병합(합병)’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 정부나 역사가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는 있는 식민지 사관의 잔재(殘在)가 아닌가 생각된다.

  • ▲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의 한국주재 통감부는 '한국병합 전말서'를 만들었다.
    ▲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의 한국주재 통감부는 '한국병합 전말서'를 만들었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 의하면, ‘합방(合邦)’은 “둘 이상의 나라를 병합하여 한 나라를 만드는 일”이고, 병합(倂合)은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와 결합하여 한 개의 나라를 구성하는 일(합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둘 이상을 하나로 만드는 이 ‘일’은 강제나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의와 합의를 바탕으로 한 “계약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복속시킨 것이 ‘합의에 근거한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강제와 폭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일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합의를 바탕으로 한 계약의 역사로 만들고 싶었다. ‘합방’이나 ‘병합’은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합방’이라는 표현의 사용은 주권찬탈에 앞장섰던 민간 활동가나 또는 그들이 중심이었던 단체들이 주도해서 보편화 시켰다. ‘합방’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들이 의도한 것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하나로 합친 것은 일본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한국이나 일본에 유익

  • ▲ 순종황제가 마지막 어전회의서 '한일병합'을 선언한 날, 일본천황이 '병합을 승낙'한다고 발표한 조서내용. <br />
    ▲ 순종황제가 마지막 어전회의서 '한일병합'을 선언한 날, 일본천황이 '병합을 승낙'한다고 발표한 조서내용. 

    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양국 ‘지사’들의 의기투합의 결과라는 것이다. 강압적이거나 일방적이 아니라 자주적이고 평등한 바탕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합방’운동에 교본으로 사용됐고, 또한 “일한양국의 민간유지에게 일한합동의 근본이념을 준 역사적 명저”라는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형제관계”에 있기 때문에 “가족의 정[一家一族의 情]을 발휘”하여 “하나의 나라[一邦]을 이룬 것”이 곧 한국과 일본의 ‘합방’이다. 여기에는 강제성이나 어느 한쪽의 이불리(利不利)가 있을 수 없다. 오직 한일 두 민족은 형제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여 번영을 누리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자는 데 뜻을 같이하는 ‘지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8월29일은 일본이 공식발표한 날

    일본의 외교문서를 위시한 대부분의 공문서나 또는 학술적 성격의 서적에서는 ‘병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한국이 일본에게 ‘병합’을 요구하고, 일본이 이 ‘요구’를 받아 들였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물론 이 단어가 시사하고 있는 ‘병합요구’는 한국 정부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최고통치권자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하고, “일본국 황제폐하는 양여를 수락하고 병합을 승낙”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즉 1910년 일본이 한반도에 지배권을 확립한 것은 한국 민중의 복리증진과 공공의 안녕유지, 그리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일본의 최고통치자에게 ‘적극적’으로 병합을 간청했고, 일본이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내비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강제성은 없다. 다만 한국의 요구를 일본이 받아들였을 뿐이다.

    1905년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장악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한 원칙의 하나는 일본의 한국 ‘병합’은 일본이 주도한 것도 아니고, 강압적인인 것은 더더욱 아닌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여 ‘병합’은 어디까지나 ‘한국인의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일본이 일진회를 위시한 친일단체를 동원하여 ‘합방청원서’를 한국과 일본 요로에 제출케 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1910년 이후 일본의 모든 외교문서, 공문서, 역사책 등에 기록한 ‘병합’은 ‘한국인의 요구와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우리도 그것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

     1910년의 사건은 ‘합방’도 아니고 ‘병합’도 아니다. 그것은 강제적이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병탄’이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주권 상실 100년을 맞이하는 이제라도 식민사관의 산물인 ‘합방’이나 ‘병합’이라는 단어는 ‘병탄’으로 정리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