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류근일 한양대 대우교수 
    ▲ 류근일 한양대 대우교수 

    쌍용차 사태가 종결되기 직전에 ‘쌍용 자동차를 사랑하는 아내들의 모임’ 소속 부인들이 강기갑 등 민노당 당원들이 뻐뜨리고 앉은 자리에 나가 고개 숙여 읍소했다. “제발 국회로 돌아가 주세요” 그러나 그 간절한 소망을 들어 줄 민노당원들일 리가 만무했다. 그야말로 삶은 호박에 도래송곳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 만큼이나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쌍용차 직원 한 사람이 부인들에게 말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니 그만 일어나 가시지요.” 바로 이거다. 우리 사회에서 ‘소통’이 안 되는 이유.

    일부 언론들이 ‘소통’을 주제로 다투어 특집을 꾸미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너무 추상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답은 간단한 것인데도, 학자라는 사람들이 주무르면 매사가 더 어려워지고 아리송해진다. 

    ‘소통’은 되는 것이 당연한 경우가 있고, 안 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경우가 있다. 되는 것이 당연한 경우-그것은 양측 사이에 공유하는 가치가 있는 경우다. 동그라미 두 개를 서로 겹치게 그릴 때 그 중간에 오버랩(overlap)된 부분이 바로 공유하는 가치다. ‘소통’은 이럴 때 가능하다. 

    반면에 동그라미 두 개를 따로 따로 떨어져 있게 그릴 때는 그 사이에 중첩된 부분이 없고, 따라서 공유하는 가치가 없다. 이 경우엔 ‘소통’이 가능하지 않고, 가능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이런 경우엔 ‘소통’을 왜 안 하느냐고 묻는 것이 더 웃기는 이야기가 된다. 

    예컨대, 민주적 보수주의자-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사이엔 공유하는 가치가 있어서 그 양자간에는 당연히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 양자는 국가에 대한 애정과 존중, 민주헌정, 의회민주주의, 복수정당 제도, 법치주의...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공유 가치’를 나누어 갖는다. 

    반면에, 이상의 민주 진영과 1당 독재 주의자-파시스트, 나치스, 볼세비키-사이에는 공유하는 가치가 없기 때문에 ‘소통’이 없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 히틀러와 그에 반대하다가 살해된 본회퍼 목사 사이, 네오 스탈린주의자(브레즈네프 등)과 사하로프 박사 사이, 그리고 스탈린과 독일 사회민주당 사이에 무슨 ‘소통’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주권과 헌법체제를 존중하는 우파와 좌파 사이엔 ‘소통’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우파와 주사파 사이, 親대한민국적 민족주의와 非대한민국적 민족주의 사이, 사회민주주의자와 김정일 세력 사이에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건국, 대한민국 61년사, 대한민국 헌법 체제를 긍정하는 사람들끼리는 정책적으로 다소 우경이든 다소 좌경이든 공존, 대화, 소통, 경쟁, 친교, 토론, 타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61년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보는 사람들을 상대로 ‘소통’을 아무리 하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얼마나 있겠는가? 공연히 입만 아프지.

    이 둘 사이에도 물론 전쟁은 없도록 최대의 노력과 슬기는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쇠파이프, 죽창, 화염병, 새총으로 공권력을 부정하고 다른 편을 反민족, 反민중, 反민주 매국노라고 규정하는 한, 그런 노력과 슬기가 먹힐지는 극히 회의적이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니 그만 일어나 가시지요” 신문과 방송에 나와 이야기한 그 많은 ‘소통’ 전문가들을 무색하게 만든 卓見 중 卓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