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양상훈 조선일보 논설위원. ⓒ 뉴데일리
    ▲ 양상훈 조선일보 논설위원. ⓒ 뉴데일리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원칙 제1조가 북한을 절대로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미국이 인정하든 안 하든 북한은 이미 핵보유국이다. 북한이 두 번째 핵실험 때 사용한 핵장치는 첫 번째보다 더 작아졌을 것이다. 앞으로 세 번째 핵실험을 한다면 그것은 플루토늄 탄이든 우라늄 탄이든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크기의 핵탄두를 터뜨려 보는 실험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최고 무기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인 국방과학연구소장은 이미 "북한이 핵탄두 소형화가 가능해진 상태로 보인다"고 하고 있다. 그의 말이 당장은 사실이 아니라 해도 북한이 핵탄두 소형화라는 목표를 이루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북한은 이미 서울과 부산, 도쿄와 오사카, 베이징, 블라디보스토크를 핵미사일 사정권 내에 두었다. 임박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의 대륙간 탄도탄급 미사일 발사는 미국 시애틀, 샌프란시스코가 자신들의 핵 사정권 내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설사 그 발사가 실패하더라도 북한이 미국 서해안에서 나아가 뉴욕과 워싱턴까지 핵 사정권에 두게 되리라는 것 역시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북한은 지금 갖고 있는 플루토늄만으로도 20개 정도의 핵미사일을 보유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북한의 천연 우라늄 매장량은 세계 최대로 알려져 있다. 우라늄 핵폭탄은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북한이 우라늄을 본격적으로 농축하면 핵탄두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수십~수백기의 대륙간 핵 탄도탄을 가진 나라를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적 수사(修辭)는 될 수 있어도 현실 직시는 아니다. 세상은 말이 아니라 사실에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다.

    미국과 한국은 '북한에 적절한 대가만 주면 핵을 포기할 것'이란 헛된 망상으로 10년 이상의 시간을 낭비했다. 이제 미국은 북한을 막을 방법이 없다. 워싱턴에서 보니 미국이 아무런 수단 없이 말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 지금보다 몇 배 더한 유엔 결의를 해도 북한엔 소용이 없다.

    북한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중국이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 붕괴보다는 차라리 북한 핵보유가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중국이 일본의 핵무장을 두려워해 북핵을 막을 것이란 예상도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2차 대전 전범국 일본의 핵무장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핵보유국 북한과 함께 사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등장하기 전(前)의 한반도와 그 후의 한반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미국은 역사상 북한과 같은 깡패 정권으로부터 직접적인 핵 공격 위협에 노출된 적이 없었다. 북한은 민간 항공기 폭파 테러를 저지른 정권이다. 그 지도자는 "지구를 깨버리겠다"고 공언하는 사람이다.

    친미 정권이 들어서 있는 파키스탄의 핵에도 노심초사하는 미국 입장에서 이런 북의 핵 탄도탄은 비상사태를 의미한다. 미국 일본이 만드는 미사일방어시스템은 아직은 거의 무용지물이란 사실을 일본 고위 인사가 이미 실토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핵 탄도탄을 가졌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미국의 말과 행동은 지금과는 딴판이 될 것이다.

    미국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 북한과 그 이름이 무엇이 됐든 사실상의 핵 군축 회담을 벌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이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잡은 것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여기에 한국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북한이 원하는 그대로다.

    그 회담이 핵 군축만 다루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불문가지다. 북한과 미국이 우리를 빼고 주한미군을 포함해 한반도문제 전체를 논의하게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핵우산 보장을 거듭 약속할 테지만 핵우산이란 것 자체가 말장난에 가까운 것이다.

    그때 우리가 자체 핵무장을 생각도 해보지 않는다면 나라도 아니다. 기술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핵무장을 미국과 국제사회가 용납할 리가 없다. 북한과 달리 우리는 국제사회와 담쌓고 몇 달도 버티기 어렵다. 결국 미국의 핵무기를 다시 들여와야 하지만 완전히 바뀐 한반도 정세 속에서 미국이 그런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다.

    김정일의 나이로 보아 그는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공인된 후 자신의 말대로 강성대국의 대문을 연 후에 사망할 가능성이 크다. 핵보유국엔 외부의 힘이 미칠 수 없다. 따라서 흔히 생각하듯 '김정일 사망=북 붕괴'는 현실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은 김정일 사망 후에도 통일이 아니라 핵 깡패의 인질로서 미국에 기대어 살아가는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너무나 비관적인 시나리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핵문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따라서만 진행돼왔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지금 정부와 국민은 그런 자세인가. 한·미 정상회담의 날에 떠오른 어떤 불길한 생각이었다.<조선일보 6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