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동예술극장이 부활하고 남산의 드라마센터 일부가 남산예술센터라는 이름으로 8일 문을 열었다.

    충무로를 사이에 두고 반경 1 Km 안에 두 곳의 공연장이 새로 가동하면서 상가들이 밀집한 서울 도심에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문화벨트가 형성된 것이다. 명동예술극장이 다시 문을 열자 명동 상인들이 가장 반겼고, 유명 국밥집 주인은 배우들에게 무료서비스를 했다.

    60~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명동예술극장과 남산 드라마센터는 아랫동네, 윗동네로 불릴 만큼 개성이 다르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인 관계였다. 명동예술극장에서는 국립극단을 비롯한 전통 있는 단체들이 극작 위주의 중후한 작품을 공연한 반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는 안민수 유덕형 오태석 등이 주축을 이뤄 연출 중심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무대에 올려 조화를 이룬 것이다.

  • ▲ 1962년 극작가 유치진이 건립한 드라마센터. 현재 유치진극장의 모습
    ▲ 1962년 극작가 유치진이 건립한 드라마센터. 현재 유치진극장의 모습

    일제시대인 1934년 완공되어 영화관 겸 공연장 명치좌(明治座)로 불렸다가 광복 후 시공관(市公館), 국립극장으로 사용되던 명동예술극장은 1949년 ‘햄릿’을 초연하는 등 1975년까지 한국 공연예술의 중심 역할을 했다.

    드라마센터는 1962년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동랑 유치진이 미국 록펠러재단의 일부 지원을 받아 건립한 현대식 실험극장이다. 이곳에서 ‘초분’ ‘태’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등 한국연극의 지평을 넓힌 문제작들이 창작됐으며, 연극교육을 통해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배출됐다. 드라마센터는 학교법인 동랑예술원이 설립자 유치진을 기리기 위해 지난 해 말 ‘유치진극장’으로 개명했다.  

    새롭게 가동되는 두 공간이 반갑고 소중한 것은 이처럼 전통과 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예전의 전통과 명성을 되살려 두 공연장이 차별화되면서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공연예술의 메카가 되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기대가 초장부터 빗나가고 있다. 유치진극장(옛 드라마센터)을 임차한 서울시가 이 극장이 지닌 역사적 가치나 전통을 무시하고 일개 부속 공연장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유치진극장에서 남산예술센터 개관식을 가진 서울시는 극장 외벽에 붙인 유치진극장 간판 위에 개관식 현수막을 덮어 씌웠다. 그뿐 아니라 서울시 창작 공간 비전을 선포한 오세훈 시장은 축사에서 이 극장의 연극사적 의의나 정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유치진의 존재와 극장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시는 지난해 학교법인 동랑예술원과 3년간 임대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서에 명기된 유치진극장 명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남산예술센터를 운영할 서울문화재단 역시 월간 ‘한국연극’에 보도될 때만 해도 유치진극장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더니 개관식을 앞두고 유치진극장 대신 남산예술센터 공연장이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동랑예술원이 개최하려던 유치진극장 개명식도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무산시켰다. 이에 대해 서울시 측은 임차인이 사업 목적의 간판을 달고 극장이름을 바꾸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주장하고 있다.

    임차인이 빌린 영역에 자신의 간판을 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시가 창작 공간 조성사업의 하나로 임대공간에 ‘남산예술센터’라는 간판을 다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하지만 유치진극장은 47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예술 공간이자 60~70년대 한국 연극을 중흥시킨 현대 연극의 산실이었다. 서울시가 이 같은 문화 명소를 시민 세금으로 임차해 공연예술 창작과 시민들의 예술 교육장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은 문화적인 발상이며 시민들로서도 반길 정책이다. 한국 연극의 역사와 정신이 깃들어 있고, 실험적인 공연들이 펼쳐졌던 유서 깊은 공간에서 예술-도시-삶이 만나는 예술센터가 운영된다는 것은 서울의 경쟁력을 높이고 문화 복지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본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컬처노믹스를 발표하고 도시 디자인을 활성화하는 등 서울의 이미지와 경쟁력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 왔다.

  • ▲ 정중헌 서울예술대 교수 
    ▲ 정중헌 서울예술대 교수 

    이처럼 문화시장이기를 자임했던 오세훈 시장과 서울시 공무원, 그 일을 수행하는 서울문화재단이 근현대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할 유치진극장의 간판을 현수막으로 덮고 일개 공연장으로 끌어내린 저의를 문화예술 현장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

    유치진이라는 이름을 쓰기 싫으면 유치진극장을 임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굳이 이 극장을 임대한 후 계약서 조문까지 위배하며 남산예술센터 공연장이란 궁색한 이름을 붙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극작가 겸 연출가, 교육자이자 문화예술계 선각자인 동랑 유치진의 존재를 부각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볼 여지가 농후하다. 시장과 문화재단 대표 까지 유치진극장이란 명칭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연유가 무엇일까.

    문화계 일각에서는 일제 치하에서 행한 유치진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고 있고, 록펠러재단의 지원으로 건립한 드라마센터의 소유권을 시비하고 있다. ‘소’ ‘토막’ 등 일제 수탈에 억눌려 사는 조선 민족의 울분을 희곡으로 쓰고 연출했던 유치진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국민연극운동을 벌인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유치진은 이 땅에 신극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앞장섰고, 광복 후에는 문화운동가로 또 교육자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드라마센터는 록펠러재단으로부터 개인적인 지원(총건축비의 6% 미만)을 받은 것이고, 공사비기 부족해 사재를 털어야 했고 완공 후에도 경영난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음이 자서전 곳곳에 드러나 있다.

    유치진의 공과는 유관기관이나 학자들, 예술인들이 평가할 몫이라고 본다. 서울시가 창의(創意) 문화를 내세우고 시민들의 문화 복지를 실현하겠다면 공간 확충이나 거창한 청사진이 아니라 성숙한 문화의식 부터 갖춰야 한다. 그런 인식조차 없이 공간을 늘리는 것은 문화와 예술을 앞세운 전시행정일 뿐이다.

    유치진극장 간판을 현수막으로 덮고 명칭 자체를 부정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처사는 그의 역사 인식과 문화 의식 자체를 의심케 하는 소아병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정중헌 객원논설위원(서울 예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