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神)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올 가을 나는 계획이 참 많았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지난 9일 별세한 장영희 교수는 생후 1개월 만에 소아마비 판정을 받아 평생을 목발을 의지해야 했고 3번의 암 판정을 받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따뜻한 글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남겼다. 위 글은 장 교수가 2001년 유방암 판정을 받은 후 두 번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은 후 회복됐다가 2004년 척추에서 암이 재발한 이후 썼던 글이다.

  • ▲ 지난 2005년 3월 강단에 복귀해 제자들의 환영을 받던 모습의 장영희 서강대 교수. 장 교수는 지난 9일 별세했다. ⓒ  조선일보
    ▲ 지난 2005년 3월 강단에 복귀해 제자들의 환영을 받던 모습의 장영희 서강대 교수. 장 교수는 지난 9일 별세했다. ⓒ  조선일보

    11일 조선일보는 그동안 조선일보 칼럼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영미시 산책’, ‘아침 논단’ 등을 연재했던 장영희 교수에 대해 조명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장 교수는 두 번째 암 재발 후에도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 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힘든 투병 생활 중에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끊지 않았고 삶의 긍정적 메시지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던졌다. 다음은 지난해 12월 그가 조선일보에 투고한 ‘2008 겨울, 희망편지-비켜라, 암! 내가 간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끝이 안 보이는 항암 치료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독자에게 한 내 말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희망을 연구하고 실험하리라.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 연구년이 끝날 무렵에 멋진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면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또 조선일보는 장 교수에 대해 "장애우의 정당한 권익을 찾기 위해 실천에 나선 행동가”였다고 말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장 교수는 2001년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시절 7층짜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꼭대기 층에 살던 그는 3주 동안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장 교수는 이 아파트를 관리하던 보스턴 굴지의 부동산 회사를 상대로 싸워 사과와 함께 보상을 받아냈다. 당시 유력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는 장 교수의 스토리를 머리기사로 소개했다. NBC TV와 지역 방송들도 앞 다퉈 소개해 미국 장애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장영희 교수는 유작이 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에서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더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은 ‘기적’이기 때문” 이라고 적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10일 빈소를 찾은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투병 사실을 듣고, 장 교수에게 강의 수를 줄이라고 권유했는데 듣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장영희 교수의 유족으로는 어머니 이길자 여사와 오빠 장병우 전 LG오티스 대표, 언니 장영자씨, 여동생 영주, 영림, 순복 씨 등이 있다. 장 교수의 아버지 故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 1994년 심장마비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