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월 3일 대전 현충원 경찰관 묘역에서 동의대 사태로 순직한 고 모성태 수경의 어머니 최정자씨가 모 수경의 묘비를 붙잡고 통곡하고 있다. ⓒ 뉴데일리
    ▲ 5월 3일 대전 현충원 경찰관 묘역에서 동의대 사태로 순직한 고 모성태 수경의 어머니 최정자씨가 모 수경의 묘비를 붙잡고 통곡하고 있다. ⓒ 뉴데일리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찬 흙 속이 아닌 가슴에 묻는다. 그리고 가슴에 묻은 자식은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부모 가슴을 찌르고 또 찌른다. 가슴에 묻어둔 그 아픔은 20년 세월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는다.

    살아있었으면 올해 마흔이 됐을 둘째였다. 고등학교 다니는 손자나 손녀를 안겨줬을 것이었다. 유독 활달한 성격이니 사업을 해 성공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둘째는 지금, 일흔을 넘긴 부모의 발밑에 누웠다. 어머니 최정자씨는 둘째의 비석을 닦고 또 닦는다. 그러면서 울부짖는다.

    “둘째야, 이놈아. 어서 일어나. 날 두고 너 혼자 어디로 갔니.”라고.

  • ▲ 동의대 사태로 순직한 고 모성태 수경의 아버지 모종칠씨. ⓒ 뉴데일리
    ▲ 동의대 사태로 순직한 고 모성태 수경의 아버지 모종칠씨. ⓒ 뉴데일리

    20년을 흘리고도 어머니 눈물샘엔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 있다.

    1989년 5월3일 부산경찰국 기동 3중대 모성태 수경(육군의 병장과 동일한 전투경찰 계급)은 동의대 사태 당시 출동했다가 순직했다.

    “제대를 두 달 남겼을 때였어요. 휴가 나왔을 때 제대하면 본격적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겠다고 했었는데…”

    고 모 수경의 아버지 모종철씨는 올해 73세를 맞았다. 모 수경은 3남3녀 중 둘째. 유독 성격이 밝아 가족들의 믿음과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였다.

    “그때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어쩌다보니 부산경찰청으로 발령이 났어요. 모두 성태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힘들 때는 부산 발령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전투경찰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연고지 배치가 원칙이다.

    “하지만 우리 성태가 안갔더라도 다른 누군가 희생됐을 것 아닙니까. 남을 위해 대신 저세상에 갔다고 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집니다.”

    모종철씨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살며시 내리감았다.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내게 한 이들도 아들과 같은 또래인 대학생들이었다.

    “원망했습니다. 어떻게 무고한 생명을 해칠 수 있냐고. 전쟁도 아니고 민주화투쟁도 아니고 학내분규로 생긴 일로 일곱 명이나 해칠 수 있냐고.”

    하지만 가해 학생 부모들이 찾아와 사죄하며 탄원서에 서명을 부탁했을 때 모씨는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원망을 접고 탄원서에 서명을 해줬단다.

    “용서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 아들이, 아들의 동료가 ‘민주화의 역적’이라니요?”

    2002년 동의대 학생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했다는 보도를 듣고 모씨는 기가 막혔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불길 속을 뛰어들었는데 불 질러 사람 죽인 것이 정의이고 불길에 뛰어 들어간 사람은 불의라는 얘기는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아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헌법소원이 기각되고 모씨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전여옥 의원이 민주화운동 재심의법안을 관철하겠다는 말에 조금 위안을 얻었지만 마음의 병은 차도가 없다.

    “보상을 바라지도, 국가가 뭘 해주지도 않습니다. 단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모씨는 추도식이 열릴 장소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니는 아직 묘비 옆에서 울고 있었다.[=대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