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이저리그를 대표할 수 있는 선수, 첫 번째를 꼽으라면 바로 베이스 루스(사진)일 것이다.

    본명은 조지 허만 루스(George Herman Ruth)로 '스포팅 뉴스'는 야구의 위대한 100인중 1위, 미국을 대표하는 20세기의 선수 2위로 선정했다.(1위는 마이클 조던, 3위는 무하마드 알리)

    타격의 제왕(The Sultan Of Swat)으로 불리며 최고의 장타력을 보여준 루스는 처음부터 타자를 했던 선수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 루스는 세인트메리 직업 학교에서 4~5살 위의 형들과 게임을 소화할 정도로 체격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매우 월등했다.

    루스는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지만 주로 포수를 맡았는데 그러던 어느날 코치는 루스의 빠른 볼을 그냥 두기 아깝다고 생각해 투수로 본격적으로 던지기를 권유했고 메이저리그에서 역시 투수로 데뷔하게 된다. 유명 통계 학자 빌 제임스가 1915~1919년 가장 위력적인 패스트볼을 던진 투수 순위에 루스를 10위에 올려놓기도 할 만큼 위력있는 패스트볼과 커브를 앞세우며 당대 최고 투수인 월터 존슨, 피트 알렉산더 못지 않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훌륭했던 투수 실력을 보여줬던 루스지만 워낙 뛰어났던 타격에 밀려 현재까지 과소 평가를 받고 있다.(Espn의 칼럼니스트 제이슨 스탁은 좌완 투수중 가장 과소 평가를 받았던 투수로 단연 루스를 선택했다.)

    어쨌든 타자로 변신한 루스는 네드 윌리엄슨의 한 시즌 최다 홈런(27개)과 로저 코너의 통산 최다 홈런(138개)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홈런에 대한 가치와 야구의 인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게 된다. 이는 '라이브볼 시대'라는 주위의 환경 만큼이나 루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타력이 함께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20년대, 30년대로 대표되는 라이브볼 시대는 18%였던 주전 선수 중 3할 타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46%까지 올릴 정도로 타고 투저 현상이 심했던 시대였다. 이 중 1930년은 내셔널리그 평균 타율이 .303에 이를 정도로 극심했다. 타자로서의 캐리어 대부분을 이 시대에 보낸 루스의 .342의 통산 타율이 다소 폄하될지는 모르겠으나 13년 연속으로 장타율 1위를 차지하며 보여준 독보적인 장타력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Espn은 루스의 1920년, 1921년 시즌과 배리 본즈의 2001년, 2002년 시즌을 야구 역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활약을 보여준 해로 선정했다.

    뛰어난 실력 만큼이나 사람을 대할 때도 호탕하고 친절하고 사교적으로 대해 인기가 많았던 루스지만 무절제한 생활로 팀에 피해를 주기도 하고 훈련을 게을리하는 선수가 높은 급료를 요구한다는 이야기마저 나오며 트레이드를 당하는 빌미를 주기도 했다.

    루 게릭에 비해 리더십이나 직업 의식 또한 부족했다는 평마저 들었지만 그래도 팬들은 루스를 사랑했다. 이는 60홈런을 기록했던 1927년에서 34년이 지난 1961년 로저 매리스가 기록 도전을 할 때도 역시 어김없이 나타났다. 과거 루스의 대필 작가였던 포드 프릭 커미셔너가 경기수를 들며 홈런 기록을 인정하지 않은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1935년 은퇴 후 13년이 지난 1948년, 2년간 암과 싸웠지만 53세의 나이로 죽은 루스는 십만명에 가까운 팬들이 양키스타디움에서 애도를 표할 정도로 미국 스포츠계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루시안(Ruthian)이란 단어의 뜻은 놀랄만한, 드라마틱한, 경이적인, 거대한 등의 위대한 힘을 상징하는 단어로 루스의 이름에서 따왔다.

    큰 체격에서 나오는 시원한 스윙은 '밤비노의 저주'보다 팬들의 가슴 속에 더 오래 남아 있을게 분명하다.

    베이브 루스 통산 기록(1914-35, 명예의 전당:1936)

    타율 .342, 홈런 714, 타점 2213, 안타 2873, 도루 123, 승 94, 패 46, 세이브 4, 방어율 2.28, 삼진 448, 완투 107, 영구 결번:3
    기타 설명

    1. 1914~1918년 벌어진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며 메이저리그 관중수는 급증하기 시작한다.물론 루스가 야구의 재미를 팬들에게 보여주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루스가 양키스로 온 1920년 그해 뉴욕 양키스 관중수는 48% 가량 상승했다. 하지만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으로 1932년까지 관중이 다소 줄기도 했다.(메이저리그 관중수는 1919년 92.7%, 1920년 26.5% 증가했지만 이후 대공황으로 15% 이상 감소했다. 하지만 경제가 위기를 넘어가며 이후 계속 증가했다.)

    2. Murderer's Row: 상대 투수를 두려움에 떨게하는 살인타선을 말한다. 1927년 뉴욕 양키즈의 타선을 이루던 베이브 루스(60홈런 .356)와 루 게릭(47홈런 .373) 얼 콤스( .356와 최다 안타, 3루타 1위) 토니 라제리(18홈런 .309) 밥 뮤젤( .337)의 별명으로 사용했다. (밥 뮤젤, 얼 콤스, 베이브 루스로 구성된 외야진은 당대 최고였다.)

    3. 밤비노의 저주: 밤비노(Bambino)는 이탈리아어로 아기(Babe)를 뜻한다.이것은 오리올스 첫 스프링 캠프 때 루스를 본 코치가 지어준 별명이다. 이 저주는 보스턴이 양키스에 루스를 넘겨준 이후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한 데서 붙여졌다. 하지만 보스턴은 86년만에 우승(2004년)을 하며 저주를 풀었다.

    4. 예고 홈런(Called Shot): 1932년 10월 1일, 리글리 필드에서 열린 시카고 컵스와의 월드 시리즈 3차전 4대 4로 동점인 상황에서 상대 투수 찰리 루트를 상대로 홈런을 친다. 당시 상황은 투스트라이크에서 배트로 센터 펜스를 가리킨 후 컵스 포수 가비 하트넷에게 “홈런을 날리는 데는 공 하나면 충분하다”는 말을 한 후 149m 짜리 홈런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며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5. 193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최초의 5인(득표율) 타이 콥(98.2%),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95.1%) 크리스티 매튜슨(90.7%) 월터 존슨(87.6%)

    6. 2004년 베이브 루스가 양키스타디움 개장 첫 홈런을 기록한 야구 방망이가 126만 달러에 팔렸었다. 이 기념품은 호너스 와그너의 야구 카드에 이어 가장 높은 가치로 팬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1938년 다저스 1루 코치 시절 입었던 마지막 프로 유니폼이 31만500달러에 경매되기도 하며 그의 높은 인기를 실감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