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홍준호 편집부국장이 쓴 '힐러리와 다른 박근혜'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오바마가 당내 경쟁자였던 힐러리를 품는 걸 보면서 '왜 한나라당은 이 모양일까'란 탄식과 의문을 쏟아낸다. 그 이유를 꼽자면 아마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그에 앞서 오바마와 힐러리의 '아름다운 포옹'의 실상도 한 꺼풀 벗겨볼 필요가 있다.

    미국 대선을 두 달 남짓 남겨뒀을 무렵,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와 민주당 경선에서 탈락한 힐러리가 한적한 아지트에서 비밀리에 만난다. 매케인은 힐러리를 부통령 후보로 옹립하지 않은 오바마를 비난한다. 힐러리는 경선 때 같은 당 후보로서 차마 꺼내지 못했던, 오바마를 꺾을 비책을 내비치면서 오바마에게 열받은 남편(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책략까지 덧붙인 뒤 말한다. "당신은 2012년 76세나 되니까 재선에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다." 2008년 대통령 매케인, 2012년 대통령 힐러리란 공동의 목표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건배한다.

    물론 이건 실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분열 가능성을 우려한 미국의 언론들이 적극 공론화시켰을 정도로 전염성 강한 음모론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공화당의 전략가들은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 민주당의 다음 대선후보는 무조건 오바마이기 때문에 힐러리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매케인이 오바마를 누를 경우뿐"이란 논리로 힐러리 지지층을 파고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그리고 힐러리 지지자들은 힐러리를 품으라고 연일 아우성인데도 오바마는 꿈쩍하지 않았다. 힐러리 쪽 역시 마지막까지 속을 썩였다. 심지어 오바마 쪽에 선거빚을 대신 갚아 달라고 칭얼대고 클린턴 전 대통령은 금융위기로 대선 게임이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투표일 직전에야 오바마의 유세장에 나타났다.

    미국 정치라고 마냥 산뜻한 것만은 아니다. 대선 때 오바마의 참모들은 구시대를 상징하는 힐러리는 변화를 내건 오바마의 새시대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땐 구시대이던 이미지를 대선 후 갑자기 새 시대의 상징처럼 우길 순 없다. 이보다는 오바마 중심의 권력을 명확히 한 후 힐러리를 끌어들이려는 전략이었다고 말하는 게 한층 솔직할 것이다.

    힐러리에게 대권은 이제 흘러간 꿈이 됐지만,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차기권력의 선두주자이다. 대선이 끝난 지 1년도 안된 요즘 한나라당엔 '월박(越朴)', '주이야박(晝李夜朴·낮엔 이, 밤엔 박)'이란 말이 나돈다. 여당에서 박 전 대표를 미래권력의 한 축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바마와 힐러리는 국정 참여의 기회를 주고받는 단순 관계이다. 이에 비해 현재의 권력인 이대통령 측과 미래 권력의 한 축인 박 전 대표 측의 관계는 누가 권력을 나눠주고 말고 하는 사이가 이미 아니다. 힐러리는 이제 사실상 홀몸이 됐지만 박 전 대표 측은 점점 커갈 정치세력이다. 오바마식 포용정치처럼 단순 방정식으로 풀 수 있는 한나라당 내부가 아닌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동업이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3당 합당 시 내각제 합의각서, DJ와 JP 간 공동정권 합의각서,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합의각서는 모두 휴지가 됐다.

    같은 정치세력 안에서도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은 매번 충돌했다. 현재 권력은 미래 권력에게 협력을 요구하지만 '인기 없는 현재 권력'을 대신해서 '매맞는 역할'을 감당하려는 미래 권력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급해지는 건 현재의 권력 쪽이다. 그걸 감안하면 이 대통령으로선 하루라도 빨리 박 전 대표 진영과 손잡는 게 현실적이다. 그런데도 머뭇거리는 건 그렇게 하다 '월박 현상'을 가속화시킬지 모른다는 또 다른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 권력에 몰두하는 박 전 대표 측은 이 대통령 진영에 비해 서두를 이유가 적기에 현 시점의 협업에 또한 소극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오바마의 포용정치가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소재로만 남는 게 지금의 한나라당이다. 우린 그런 정치를 너무 오랫동안 보아왔다. 다만 이번에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엔 나라 사정이 너무 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