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에 소설가인 이석범 서울경영정보고 교사가 쓴 시론 '청계천 광장에서 제자들을 보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에 아이들이 많이 모인다기에 '정말 그런가?' 청계천광장에 직접 가 보았다. 집회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미친 소 너나 먹어!"라는 확성기 소리 요란한 광장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앞쪽 열들을 살피니 과연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촛불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중간쯤엔 놀랍게도 우리 학교 학생들이 두서너 명 보였다. 그들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저희끼리 쑥덕였다. 내가 작년에 학생부 소속이었기 때문인지 긴장한 것 같았다.

    시위대 주변엔 수많은 기자들이 몰렸고, 교사로 보이는 사람, 혹은 장학사로 보이는 양복쟁이들이 시위대 수만큼 둘러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집회의 진행자가 외쳤다. "교육청에서 각 학교 학주(학생부 주임) 선생님들을 풀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학생들을 적발해서 징계한다고 합니다. 선생님들! 교육자의 양심과 본분에 호소합니다. 아이들을 잡아가기보다 이곳에서 같이 시위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자, 학생들이 차례로 연단에 올라섰다. 대학생, 고교생, 중학생, 심지어 초등학교 3년생까지 올라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청계천광장은 가히 민주주의의 아크로폴리스라 할 만했다. 공교롭게도 지금의 대통령이 자기가 만든 광장에서 자기가 공격당하는 아이로니컬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학생들의 발언을 메모하는 내게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술에 취한 채 욕설을 내뱉었다. "썩을 놈아, 너도 저 학생 잡아가려는 거지?"

    곁에 있던 이가 잽싸게 촛불 하나를 내게 건넸다. "이걸 들고 있어야 해요." 촛불을 들었더니 그 백수광부(白首狂夫)는 저편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고작 쇠고기 때문에 '촛불 든 자'와 '촛불 든 자를 바라보는 자'로 균열되는 이 현실은 누구의 책임인가. 먹고사는 문제야말로 정치(政治)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영역이거늘, 정치의 역할 부재가 결국 민초를 광장에 불러내 욕설과 긴장을 주고받게 했다. 그런 와중에 일부에선 어린 학생들의 시위참여를 부추기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파주에서 온 여중 3년생이 쟁쟁한 음성으로 발언했다.

    "사회시간에 배웠습니다! 정책의 '공식적 주체'는 정부지만, '본질적 주체'는 국민이라고 말입니다!" 여중생의 말에 요란한 함성이 터지고 박수가 쏟아졌다. 열심히 공부하는 착한 학생임이 분명했으나, "거 뉘 집 딸인지 참 당차다"라는 소리가 "뉘 집 딸인지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로 들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본질적 주체'라면서 휴대폰으로 '17일 총궐기 휴교'를 문자로 주고받으며 열 오른 학생들이 행여 '정파 간 투쟁'으로 변질될지도 모를 용광로에 부나비처럼 달려들어 희생되는 일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스럽고 영특한 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교육자의 양심이요 본분일 터이다. 교육자들이 그 노릇을 다할 수 있게 정부가 시급히 손을 써야 한다.

    바로 어제 대통령도 밝힌 만큼 '국민 건강이 최우선'이다. 적어도 먹을거리에서만큼은 한 점의 의혹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 그것이 청계천광장을 조성한 현 대통령의 임무이기도 할 것이다. 자유언론이 꽃처럼 피어나는 이 아름다운 민주광장에 "미친 소를 청와대로!"라는 살벌한 구호 대신, 국제관계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현명하게 헤엄치며 묘책을 짜낸 대통령의 정치력을 찬양하는 집회가 빨리 열렸으면 좋겠다. 그런 집회라면 내가 솔선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몇 번이라도 참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