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잃보 6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박두식 정치부 차장이 쓴 '이명박 정부가 매맞는 이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요즘 한나라당 주변에선 "집권 DNA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10년 야당 끝에 정권을 잡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 현 집권 세력의 주류는 대부분 야당 생활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감한 일을 겪을 때마다 '집권 DNA' 운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정권이 제대로 착근(着根)할 때까지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기회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 세력이 계속 집권한다면 혼란은 줄겠지만 국민들이 '변화'를 선택한 이상 일정한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초기의 혼란이 수습되면 정상적인 국정 시스템이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주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위기를 겪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이후 처음으로 국민과의 '허니문(밀월)' 기간을 갖지 않은 정권이란 말까지 나왔다. 지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논란이 어떻게 수습되느냐에 따라 이 정부의 성패(成敗)를 점쳐볼 수 있을 것 같다.

    집권 DNA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 중 하나가 책임의식이다. 집권 측은 나라의 명운이 걸리거나 대형 논란이 예상되는 사안에 대해 그때그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적어도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결정을 둘러싼 논란에서 드러난 현 정부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대표적인 예가 쇠고기 수입 재개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을 가리켜 "노무현 정부가 벌여놓은 일을 설거지해 주는 것"이라고 하는 청와대 측의 설명이다.

    1993년 가을,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도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3국 간의 자유무역협정(NAFTA) 비준을 놓고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NAFTA는 전임 부시 정부가 벌여놓은 일이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부시의 것이지만, 미국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며 이를 통과시키기 위해 총력전을 폈다. 자신이 속한 정당이 FTA에 찬성하는 이명박 대통령과는 달리, 여당인 미국 민주당과 그 지지층은 결사 반대였다. 클린턴은 야당인 공화당과 손을 잡아가며 자기 책임 아래 NAFTA를 성사시켰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미국의 국익에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쇠고기 협상이나 한·미 FTA를 설명하는 이 대통령과 청와대, 한나라당 어디에서도 이런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듣기 힘들다. "전임 정부에서 한 일"이라는 말만 크게 들릴 뿐이다. 지금 절실한 것은 "이 정부와 여당이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국민적 신뢰의 회복이다. 지금 상황이 '신뢰의 위기'로 번질 경우, 이는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4년 9개월여나 남은 이 대통령의 임기 동안 리더십을 발휘할 동력도 잃게 된다.

    야당도 미덥지 않긴 마찬가지다. 통합민주당은 야당 된 지 몇 달 만에 '집권 DNA'를 몽땅 없애버린 듯하다. 얼마 전까지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을, 야당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뒤집기 일쑤다. 한·미 FTA 문제를 시작한 게 민주당이 여당 시절의 일이었는데, '나 몰라라'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엉터리 선동으로 가득한 광우병 괴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건 아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즐기는 눈치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나라의 근본을 위협하게 될 신뢰의 위기를 키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