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손학규의 길'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오는 4월 9일 총선은 두 가지 관전(觀戰) 포인트를 제시한다. 하나는 이명박 정권이 다수당으로 의회 안정석을 확보하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야당인 민주당이 건전하게 재탄생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를 떠나 우리 정치에 보다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야당이 가는 길이다. 전자가 숫자의 게임이라면 후자는 정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지난 12·19 대선은 새로 조성될 야당의 성격을 어느 정도 규정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한민국의 존재와 정통성을 부인하는 '노무현적(的) 좌파'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무책임하고 무경험한 '386정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민을 편안하게, 제대로 먹고 살게 해주지 못하는 정치는 아무리 구호가 요란하고 색채가 현란해도 그만 하라는 지시였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국민이 총선에서 민주당에 바라는 것은 몇 가지 '노(No)'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실패한 열린우리당의 재탕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국민은 '노무현 좌파'의 실정을 비판한 것이지 바람직한 진보·좌파정치 자체를 전면 거부한 것은 아니다. 셋째는 민주당이 또다시 지역 정당 일변도로 가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전한 견제세력으로 나아가고 믿음직한 대안세력으로 커주기를 바라는 것일 것이다.

    '손학규의 야당'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어쩌면 그런 관점에서 손학규씨가 민주당의 재건을 맡게끔 설정됐는지도 모른다. 그는 12·19 대선 패배세력을 모아 오늘의 민주당으로 묶어내는 데 적합한 인물로 선정됐다고 봐야 한다. 그는 오늘의 야당을 좌(左)로부터 중도 쪽으로 서너 클릭 옮겨 놓는 일에 적임자일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장관 인선에서 우왕좌왕할 때 그 허점을 겨냥해 일침을 가하는 전략적 두뇌도 보여줬다.

    손 대표 자신이 어느 지인에게 "내가 당을 맡고 나니 이제 당이 어디로 갈지 걱정 안 해도 되게 됐다는 격려가 줄을 이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손학규씨는 좌파 성향이지만 노무현적 좌파는 아니었고 진보 성향이지만 급진파는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게다가 그는 기호지방 출신이며 글로벌시대의 경제를 체험한 도지사의 경력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손학규씨가 이번 총선에서 그 일을 해내고 계속 당을 이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정치 문외한인 법조인 박재승씨에게 공천심사위를 맡긴 것과 박 위원장이 '저승사자'의 칼을 휘두르며 일대 공천 쿠데타를 감행하고 있는 것에 통쾌해하고 있다. 야당이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손학규씨에게는 양날의 칼일 수도 있다. 지금 박씨의 칼에 잘려 나간 DJ계 정치 프로들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여의도에 입성하는 경우 민주당은 야권 내에 또 다른 가지(枝)를 만든 꼴이 되고 만다. 총선에서 '적절한 승리'를 이끌지 못해도 손 대표는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그는 총선결과에 상관없이 '책임'의 논쟁에 휘말릴 것이고, 잘린 DJ계열이 복귀하는 경우 공천의 실효성에 대한 당내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손학규 대표는 오늘날 민주당에 아무런 뿌리나 기반이 없다. 그가 당내 커다란 뿌리의 하나인 DJ계(系)를 자르고, 또 다른 맥인 친노·386계를 건드릴 때 그의 위치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쩌면 오늘날 민주당 내의 각 계파들은 총선의 고개를 넘을 때까지만 '손학규'를 방패막이로 내걸고 그 이후에는 가차없이 토사구팽할 것에 묵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는 4월 9일 유권자들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결국 사람(후보자)을 찍을 것인가, 당을 선택할 것인가의 원론적인 물음이다. 사람으로 간다면 당의 공천은 의미가 적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즘 민주당의 공천 과정에 환호하고 공심위를 격려해 줄 이유가 없다. 당으로 간다면 사람 씀씀이를 외면하고 당의 막대기만 꽂으면 되느냐는 비판이 되돌아온다. 그러나 당의 중심이 당외적 요소에 의해 좌우되고 당의 리더십이 지리멸렬한 그런 정당이 과연 효율적인 야당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이번 4·9 총선은 아마도 그런 물음이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작용하는 선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