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진 논설위원이 쓴 '이명박 드라마는 있을 것인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피살 전해인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경호부대 지휘관을 지낸 장군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얼굴에 조금 가려 있는 이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낸 전두환 장군이다.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이는 작전차장보 노태우 장군이다. 뒤에 차지철 경호실장이 서 있다. 차 실장은 독일 나치 히틀러 SS 친위대의 복장을 본떠 경호실 제복을 만들었고 장군들은 그렇게 치장했다.

    이 사진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을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이어받을 후계자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 박 대통령도, 전두환 장군도, 노태우 장군도 몰랐다. 과거 전제군주 시대엔 여러 나라에서 왕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사람들과 한자리에 있었다. 왕위 승계 서열이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민주국가에선 권력의 향방을 아무도 모른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부통령이 한자리에 있었어도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까지 섞여 있지는 않았다. 그러니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3인 회동은 기적에 가깝다. 조물주도 그리기 어려운 그림이다. 그런 드라마가 70년대 한국에서 벌어졌다.

    18년 후인 96년 3월 서울 종로구 독립문 옆 대신고교 운동장. 15대 총선 합동연설회가 열렸다. 김대중(DJ)이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었지만 노무현 후보는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에 남았다. 그는 “이명박 후보의 신화는 부정부패와 착취의 신화”라고 외쳤다. 그는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후보에 대해선 “군사정권 아래서 여당 고위직을 두루 역임한 핵심이 야당에 얼굴을 내민다고 야당은 아니다”고 공격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말 잘하는 정치꾼보다 실물경제를 살릴 수 있는 경제전문가가 반드시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역공했다. 이종찬 후보는 “장학로씨 수표 추적 과정에서 청와대 가신 5인방의 비리가 드러났다는 얘기가 있다”며 김영삼(YS) 정권을 몰아붙였다. 결과는 이명박 4만여 표, 이종찬 약 3만3000표, 노무현 1만7000여 표였다.

    이 선거는 이명박과 노무현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이명박은 첫 지역구 출마에서 노무현을 만났고 노무현은 첫 서울 출마에서 이명박을 만났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처럼 두 사람도 자신들이 대통령 직을 주고받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2년 후인 지난 2월 25일 두 사람은 청와대를 주고받았다. 미국 역사에 42명의 대통령이 있지만 같은 지역구에서 싸우다 백악관을 주고받은 이는 없다.

    한국 정치에는 세계 역사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드라마성(性)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18년 집권 끝에 정보부장에게 피살되자 경호장교 출신 2명이 권력을 이었다. 다음엔 박정희의 최대 정적(政敵) 두 사람이 차례로 대통령이 되었다. 김영삼·김대중은 가난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양김의 시대가 끝나자 어린 시절 가난이 골수에 박힌 두 사람이 차례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88년부터 2003년까지 불과 15년 동안 한국인은 문민화, 여야·동서 간 권력교체, 세대교체라는 4대 숙제를 해치워 버렸다. 북쪽은 또 어떤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장기 암울한 전제·폐쇄 공동체가 진행되고 있다.

    영화 ‘ET(외계인)’를 제작한 스필버그도 이렇게 드라마틱한 권력 스토리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신은 한국인에게 자원과 영토 대신 드라마성이란 탤런트를 부여한 것 같다. 이명박 정권 5년엔 어떤 드라마가 숨어 있을까. 비극일까, 희극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