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종수 논설위원이 쓴 '폐족·청족·탁족'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정치적 동업자인 안희정씨가 지난해 말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친노(親盧)라고 표현되어 온 우리는 폐족(廢族)”이라며 “죄 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라고 썼다. 폐족은 조선시대 조상이 큰 죄를 지어 후손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된 일족을 일컫는다. 대선에서 패해 정권을 내주게 된 자신들의 처지를 폐족에 빗댔다. 짐짓 회한과 자성의 느낌이 물씬 묻어난다.

    도대체 이들은 무슨 죄를 지었고, 누구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인가. 그가 스스로 자백한 죄는 “집권 10년의 역사를 계속해서 지키지 못한 것, 거대 집권여당 세력을 단결된 세력으로 가꾸지 못한 것”이다. 국정을 잘못 운영했다는 고백도 아니요, 정책이 잘못됐다는 반성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시키지 못하는 바람에 정권을 놓친 것이 한스럽다는 것이다. 안씨가 말하는 친노세력의 죄는 국민에게 지은 죄가 아니다. 국민들은 친노세력이 정권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애달파 하거나 서운해 할 일이 없다. 그게 죄라고 생각할 이유는 더더구나 없다. 그렇기에 국민에게 용서를 구할 일도 없다.

    그가 용서를 구하는 상대는 따로 있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로, 새로운 세력으로 우리를 이끌고 정립시켜야 할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것은 국민이 아니라 ‘우리’였다. 정권을 잃은 죄로 벼슬길이 막힌 친노세력에 대한 안쓰러움이다. 이제 권력과 자리를 내놓아야 할 친노 386들은 말 그대로 폐족의 신세다. 안씨는 이들에게 자리를 계속 마련해 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을 표한 것이다.

    전라도 강진에 유배됐던 다산 정약용은 귀양살이 초기 고향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폐족이란 말을 자주 썼다. “폐족으로서 글을 배우지 않고 예의가 없다면 어찌하겠느냐” “너는 지금 폐족이니 만일 폐족의 입장을 잘 대처하여 본래의 가문보다 더 완전무결한 집안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기특하고 아름다운 일이겠느냐.” 자신 탓에 벼슬길이 막힌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아버지의 착잡한 심경이 배어 있다. 폐족이란 말은 듣기에 따라 아픈 상처를 덧내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다산이 폐족이라는 말을 굳이 반복한 것은 냉엄한 현실을 깨우치면서 동시에 그럴수록 공부에 정진할 것을 당부하기 위함이었다. 친노 폐족들도 엉뚱한 울분과 신세 한탄으로 세월을 보낼 게 아니라 다산의 말을 새겨 공부에 정진하고 예의를 갖춰 후일을 도모함이 옳다.

    폐족에 대응하는 말은 청족(淸族)이다. 조상이 지은 죄가 없어 후손이 벼슬을 하는 데 아무런 흠결이 없는 집안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인사 검증에 하자가 없고 경력이 깨끗한 사람이다. 그러나 다산은 청족을 그다지 곱게 보지 않았다. 그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청족일 때는 글공부를 하지 않아도 혼인도 제대로 하고, 군역도 면할 수 있으나 폐족이 되어서 글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찌하겠느냐”고 했다. 벼슬하는 데는 장애물이 없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집안의 위세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양반 자제들을 일컬어 청족이라 한 것이다. 외견상 자격은 갖췄을지 모르지만 능력은 검증된 바 없는 이들이다.

    요즘 새 정부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청족을 자처하는 이들이 대통령직 인수위 주변에 구름처럼 몰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벼슬만을 바라고 권력 주위에 몰려드는 청족들은 잘 가려 써야 한다. 지금은 폐족임을 자인하는 친노세력들도 처음에는 깨끗함을 내세운 청족이었다. 여기다 영혼은 없어도 좋으니 벼슬 자리만 보전할 수 있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관료들마저 권력 줄대기에 가세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에서 한 일은 다 대통령이 시켜서 억지로 한 일이므로 자신들은 아무런 죄가 없는 청족이란 것이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출세만을 위해 정권을 넘나들며 코드를 맞추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이처럼 공직사회의 물을 흐리는 관료는 청족이 아니라 탁족(濁族)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