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에 실린 이 신문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의 글 '휴대폰 폭발 소동과 BBK'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오늘 아침이 올겨울 들어 가장 춥다고 한다. 감기 걸리기 십상인 날씨다. 하지만 똑같이 추워도 누구는 쌩쌩하고 누구는 비실비실한다. 평소 운동도 하고 체질을 건강하게 해 놓았으면 추위와 감기 바이러스 따윈 상관없다. 반면 찬바람만 불면 목이 붓고, 감기 주의보만 나오면 드러눕는 분들도 있다. 요즘 궁금한 게 있다. 세계 11위의 무역대국, 민주화와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룬 나라, 최강의 정보기술(IT) 강국. 대한민국에 쏟아지는 찬사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체질도 그만큼 건강한 것일까. 혹시 우린 덩치만 큰 약골은 아닐까.

    지난달 28일 충북 청원의 한 채석장에서 일어난 휴대전화 배터리 폭발 소동은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38시간 동안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요즘 휴대전화 안 가진 사람 거의 없다. 한데 휴대전화 배터리가 폭발해 사람이 죽었다니 오죽했겠는가. 편집국에서도 기자들이 모이면 그 얘기 했었다. “앞으로 휴대전화는 꼭 뒷주머니에 넣고 다녀야겠어. 엉덩이는 살이 많으니 폭발해도 그나마 나을 것 아냐?” “그러게, 심장 근처인 윗주머니는 안 되고, 바지 앞주머니에도 ….”

    우리만 이런 얘기 나눈 건 아닐 것이다. 해당 휴대전화 회사의 주식 가격까지 내려갔었다니 말이다. 일이 왜 이렇게까지 번졌는지 복기해 보자.

    우선 시신을 검시한 의대 교수가 “(휴대전화 배터리의)폭발 압력으로 폐와 심장이 손상돼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언론은 그걸 아무 검증 없이 그대로 내보냈다. 그 다음은 인터넷에서, 블로그에서, 댓글에서 알아서 굴러갔다. 그저 별 생각 없이 한마디 하고, 별 뜻 없이 보도했는데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은 이 ‘무심함’이야 말로 선진과 후진, 세련됨과 엉성함을 가르는 기준이고, 차이일 것이다. 무엇보다 검안 의사는 확실치 않은 사실을 공표하는 게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런 발언을 그대로 중계해 준 경찰도 엉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속한 집단인 언론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보도했다. 고백하건데 나 역시 사안의 엄중함과 파장에 대한 고려를 별로 못 했다.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결과적으로 한 사람의 거짓말이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소동으로 몰아 넣은 셈이다. 진실이 38시간 만에 드러난 게 그나마 다행이다.

    휴대전화 폭발 소동을 보면서 요즘 대선판을 뒤흔드는 BBK 사건이 떠오른다. 검찰이 내일 결과를 발표한다고 한다. 그동안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나는 BBK와 무관하고, 그에 대해선 대통령이 되고 나서라도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 결과 이 후보가 주가 조작에 관련돼 있다든가, BBK의 실제 소유주였던 것으로 드러나면 이 후보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유권자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게 재미교포 김경준씨의 사기극이었다면 이토록 우롱당한 국민은 도대체 뭔가. 또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의 눈과 귀를 악착같이 BBK로 끌어들였던 정치권, 특히 대통합민주신당은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2002년엔 김대업으로 재미 보더니 이번엔 김경준이었느냐”는 비난에 대해 무슨 답변을 할 것인가. 나뿐 아니라 모두가 그게 궁금할 것이다.

    미국에는 ‘무언 명령(gag order)’이 있다. 법원이 사건 관련자들에게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게 명령하는 것이다. 실체적 진실이 확인될 때까지다. 새빨간 거짓말도 일단 떠들어대고 언론에 보도되고 나면 듣는 사람은 헷갈린다. 나중에 진실이 드러나도 의구심이 남게 된다. 게다가 누군가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더 그렇다. 휴대전화 폭발 소동과 BBK 사건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 것 같다. 한국 사회의 체질은 얼마나 건강한가?